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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SP음반 녹음을 부탁하는 지인이 얼마 전 또 연락을 해 왔다. 매우 특이한 음반 한 장을 구했는데, 딱지 상태가 희한해서 어떤 내용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녹음도 녹음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음반의 관련 정보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며칠 뒤 실물을 전해 받은 음반은 확실히 딱지 형태가 독특했다. 제목과 작자·가수 이름이 적혀 있을 자리가 하얀 종이로 단단히 덮여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일부러 풀칠해 붙인 것은 확실했다.
 
하얀 종이로 가려진 음반 딱지 모습
 하얀 종이로 가려진 음반 딱지 모습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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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고려레코드 상표와 음반번호 'K No. 3'은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음반번호를 알면 제목이 지워지거나 가려졌어도 대개는 녹음된 내용을 직접 들어 보기 전에 파악할 수 있다. 가사지나 광고 같은 유관 자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려레코드 'K No. 3'은 1947년 8월에 발매된 것으로, 수록곡은 <해방기념가>와 <여명의 노래>다. 해방 이후 최초 음반회사인 고려레코드에서 세 번째로 제작한 음반이며, 며칠 앞서 나온 1번과 2번에는 신·구 <애국가>와 <조선의 노래>, <건국의 노래> 등이 수록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신문 광고를 통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노래, 대체 뭘까 
 
1947년 8월 일간지에 실린 고려레코드 광고
 1947년 8월 일간지에 실린 고려레코드 광고
ⓒ 중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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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파악이 끝났으니, 이제 녹음만 잘 마치면 작업이 끝난다. 음반 끄트머리가 약간 바스러졌고 두 군데 금이 있기도 했지만, 소리를 따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소리는 생각보다 잘 나왔으나, 문제의 음반에 담긴 노래는 <해방기념가>도 <여명의 노래>도 아닌, 난생처음 들어 보는 생경한 곡조였던 것이다.

<해방기념가>는 악보와 가사 자료가 확인되고, <여명의 노래>는 지난 1991년에 CD로 복각까지 된 바 있다. 재삼 비교해서 확인했지만, 앞뒷면 모두 두 곡과는 분명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음반번호 'K No.3'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통상 앞면은 A, 뒷면은 B로 표기되는데, 하얀 종이를 덧댄 이 음반은 양쪽 모두 B, 그러니까 'K No.3 B'로 되어 있었다.

쉽게 풀릴 듯했던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선 해 볼 수 있는 일은 덧붙여진 종이를 벗겨서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딱지에 손상이 가면 안 되기 때문에,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조금씩 종이를 제거해 갔다.
 
덧붙여진 종이를 제거한 뒤 음반 모습
 덧붙여진 종이를 제거한 뒤 음반 모습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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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녹음 내용을 알려 주는 표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했건만, 제거 작업이 진행될수록 또다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기대와 달리 딱지에 적힌 내용은 양쪽 모두 원래 'K No.3 B' 그대로 <여명의 노래>였던 것이다. 녹음된 소리와 딱지 표기가 서로 아무 관련이 없었던 셈이다. 하얀 종이가 덧붙여진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당초 음반을 받아들고 번호만 먼저 확인했을 땐 내심 이렇게 추정을 했다. <여명의 노래>를 작곡한 이건우가 1950년에 월북, 이후 북한에서 많은 활약을 했기에, 그 이름을 지우기 위해 종이를 붙여 가렸을 것이라고(<해방기념가>는 남쪽에서 활동한 이흥렬이 작곡). 나름 그럴듯한 추정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소리도 들어 봤고 딱지 표기도 확인했으나, 음반의 정체는 더욱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녹음 내용을 듣고 단서를 잡아 보려고도 했지만, 정말 처음 들어 보는 멜로디인 데다가, 열악한 음질이다 보니 아무리 들어도 가사는 단 한 마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추적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상당히 막막한 상황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접는 것도 안 될 일이라, 고려레코드 관련 자료를 하나씩 다시 점검해 보았다. 그리고 눈에 띄는 광고를 곧 찾아낼 수 있었다.

인용한 잡지에서 원본 출처를 밝히지 않아 정확한 게재 시점은 알 수 없으나, 1948년 봄 무렵으로 추정되는 신문(또는 잡지) 광고다. <가거라 삼팔선>, <흘러온 남매> 등 대중가요 히트곡과 함께 광고에서 고려레코드 '기발매'로 소개한 제목들이 눈길을 끌었다. <민족청년단가>, <대한독청단가>, <대동청년단가> 같은 곡들 중에서 음반에 담긴 노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왠지 모를 느낌이었다.

실마리를 제대로 잡아서 그랬는지, 검색 성과는 바로 나타났다. 우선 1946년 12월 일간지 기사에서 조선민족청년단 단가의 한 구절을 확인했다. 그냥 녹음만 들어서는 그렇게 알아들을 수 없었던 가사가 기사와 대조해 들으니 바로 파악이 되었다. 문제의 음반에 수록된 두 곡 중 하나는 1948년 봄 추정 광고에서 <민족청년단가>로 소개한 조선민족청년단 단가였던 것이다.

'족청'의 노래 두 곡을 담은 음반
 
조선민족청년단 단가를 소개한 일간지 기사
 조선민족청년단 단가를 소개한 일간지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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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면에 실린 노래도 이어지는 검색으로 역시 정체가 드러났다. 2016년 수원박물관에서 펴낸 <수원 근·현대 증언 자료집 Ⅷ: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에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들의 증언이 수록되었는데, 그 한 대목에서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가 가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단가와 마찬가지로 녹음과 대조해서 들으니 같은 노래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한 줄기 단군의 피다/ 죽어도 또 죽어도 겨레요 나라/ 내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내뻗치는 정성 앞에 거칠 것 없다
<조선민족청년단 단가>

수원성 옛 터전에 새 구령 소리/ 아는 듯이 산도 낮아 앞길을 트인다/ 늦을라 어서 바삐 깃발을 따라/ 늦을라 어서 바삐 깃발을 따라
<조선민족청년단 훈련소가>


두 곡 이어서 듣기

'족청'이라는 약칭으로도 유명했던 조선민족청년단. 1946년 10월에 결성되어 한때 대단한 위세를 떨친 대표적 우익 청년단체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이 바로 이 족청을 조직해 정치 기반으로 활용했고,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로 1949년 1월 대한청년단에 통합되어 해산한 이후로도 '족청계'는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나중에 축출되기는 했으나, 자유당 창당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도 이 족청계였다.

족청의 노래 두 곡을 담은 음반은 1947년 8월 이후, 1948년 봄 이전에 제작된 것은 분명하나, 그밖에는 아직 제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 더 많다. 기사와 구술을 통해 확인한 1절 외 다른 가사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고, 누가 만들고 누가 녹음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 수첩이 그에 대한 궁금함을 상당히 풀어 줄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긴 한데, 아쉽게도 보관처 이전 문제로 당분간은 열람을 할 수가 없다.
 
대한민족청년단 단원 수첩.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민족청년단 이름이 대한민족청년단으로 바뀌었다.
 대한민족청년단 단원 수첩.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민족청년단 이름이 대한민족청년단으로 바뀌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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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자료가 더 나오면 70여 년 전 족청의 노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겠지만,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 공교로움도 있다. 대표적인 우익 청년단체 노래가 녹음된 음반에 왜 하필이면 월북한 좌익 작곡가 작품을 표기한 딱지가 붙었던 것일까. 그 위에 덧댄 백지에는 또 왜 아무런 표기가 없었던 것일까. 보람도 있었지만 의문도 남는, 기이한 좌우합작(?) 음반 발굴이었다.

태그:#고려레코드, #조선민족청년단, #단가, #훈련소가, #대한민족청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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