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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4월 22일 오후 2시 35분] 

서울시장 선거를 며칠 앞둔 지난 4월 초, 출마한 후보 전원이 등기 한 통씩을 받았습니다. 경기도와 전라북도가 시행 중인 공공의료원 내 수술실CCTV 운영 정책을 서울시에서도 해달라고 요구하는 정책제안서였지요. 2020년 조사 결과 경기도 내 정책 지지율 2위, 인지도 6위를 기록한 정책이었기에 서울시장 후보들이 참고할 만했지만 어떤 후보 공약집에서도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기에 등기를 보낸 것입니다.
 
국회 앞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환자권익연구소 이나금씨. 내 어머니이기도 하다.
 국회 앞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환자권익연구소 이나금씨. 내 어머니이기도 하다.
ⓒ 권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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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서를 보낸 곳은 환자권익연구소라는 시민단체였지요. 제 어머니 이나금씨가 지난 3월 설립한 단체입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건 5년 전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왜 시민단체를 설립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시민단체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지금은 어느 곳도 하지 않는 일들을 말씀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시민단체는 시민들의 권익을 대변합니다. 정부와 국회가 정책을 추진하고 법을 만드는 과정에 개입해 목소리를 내고 감시하지요. 시민단체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않고 감시하지 않으면 법은 목소리가 큰 이들 쪽으로 기웁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은 시민들의 권익을 침해하고 억누르기 마련이지요. 2000년도 전까지는 의사들이 강력범죄를 저지르면 면허에 제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금고형 이상 처벌받은 의사의 경우 면허를 취소하자는 법안이 법사위에 계류돼있습니다. 이뿐입니까. 지방에 공공의료원을 확충하고 공공의대를 설립하며 의대생 정원을 늘리자는 요구도 끝내 좌절됐습니다. 시민단체의 목소리보다 이익단체의 힘이 훨씬 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요. 

이처럼 법안이나 정책이 시민 일반에 이익이 되는 것일지라도 좌절되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정책에 일일이 신경쓰기 어려운 일반 시민들은 좀처럼 힘을 모으지 못하지만, 병원과 의사 등 이익집단은 단결해서 강한 목소리를 내는 탓이지요.

기울어진 운동장을 우리는 봤습니다

대한의사협회가 2020년 파업한 사례를 떠올려봅니다. 이들은 지방에 공공의대를 설립하고 의대생 정원을 늘리려는 정부 방침에 반대해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의료현장을 버리고 나와 국민적 지탄이 거셌지만 개의치 않았죠. 의사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의대생들도 민주화운동 때나 있었던 동맹휴학을 결정하고는 거리로 나와 정부와 국회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정부는 관련 정책을 중단하고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지요. 공공의대 설립과 의대생 수 증가에 일반 시민들이 얼마나 찬성하는지는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 대다수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된 환자보호 3법(의사면허 규제 강화, 의료인 행정처분 이력 공개, 수술실CCTV 법제화)에 대해, 이들 단체는 지속적으로 반대의견을 내고 있지요.

그 결과 정부뿐만 아니라 여당이 더불어민주당 의원 중에서도 법안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여 논란이 됐습니다. 21대 국회 384회 제1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록엔 이들이 환자보호 3법에 의협과 얼마나 유사한 목소리를 내는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강도태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수술실에는 자율설치를 하는 방안, 그다음에 입구 설치는 의무화"를 검토한다며 '수술실 안 CCTV 의무화'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외면했습니다.

제 동생 대희의 사망 이후 환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워온 저희 가족은, 이러한 국회 기록들을 보면서 의료 정책이 논의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이 매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걸 절실히 느꼈습니다. 

보건복지부는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법안의 본질을 왜곡시키기 일쑤고, 각종 이익단체는 우기기에 가까운 이유를 들어 훼방을 놓습니다. 국민의 대표여야 마땅한 국회의원들은 회의장에만 들어가면 병원과 의사들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법안으로 합의를 보곤 합니다. 

그게 바로 어머니가 시민단체를 설립한 이유입니다. '환자권익연구소'로, 피해 유족의 외마디 외침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의견을 적극 개진하고자 단체를 만들었죠. 사실 단체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단체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지요.

시민단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뜻을 함께하는 다수 구성원을 모으고, 1년간 단체의 이름으로 목적사업(환자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1년간 활동 이력이 쌓이면 국가에 정식으로 법률적 비영리 단체 심사 및 허가를 요청할 수 있게 되죠. 

다행히 지난 수년간 의료소송 과정에서 재판에 참여해주신 시민들, 1인 시위 과정에서 응원을 보내주신 시민들 상당수가 참여해주셔서 외롭지 않은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울시장 후보들 공약 중 의료범죄나 환자권익 관련 공약이 하나도 없어서 단체의 첫 활동으로 관련 정책 제안 및 공약을 요구하는 우편을 보내게 됐습니다. 

14일에는 다른 시민단체인 간병시민연대의 간병인 불법의료행위 근절 기자회견에 연대단체로 참여했습니다. 19일에는 악의적 유령수술을 상해죄, 살인죄 등으로 강하게 처벌해달라는 기자회견도 진행했습니다. 앞으로 의료사고 피해자들의 제보를 받아 숨어있는 문제를 발견하고 피해구제 및 재발 방지를 위한 정책 연구 등의 활동을 지속해나갈 계획입니다. 

비록 서울시장 공약에 반영되진 못했지만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환자권익연구소 명의로 수술실 CCTV 설치를 공약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서울시장 후보들에게 환자권익연구소 명의로 수술실 CCTV 설치를 공약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 권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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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언급했듯, 환자권익연구소는 서울시장 후보 전원에게 환자보호 3법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으로 첫걸음을 뗐습니다. 유령수술 등 환자권익을 침해하는 범죄가 서울 시내에서 잇따랐는데, 후보 가운데 한 명도 그에 관한 공약을 내놓은 사람이 없는 건 큰 문제였지요.

만약 환자권익연구소가 제안하지 않았다면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기에, 후보들에게 등기를 보내고 주요 후보에겐 직접 찾아가 의견을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오태양 미래당 후보 쪽은 바로 제안을 받아들여 수술실CCTV 공약을 내놓겠다는 연락을 해주셨죠. 이후 신지혜 기본소득당 서울시장 후보와 이수봉 후보도 수술실CCTV에 대해 찬성하며 서울시 관내 병원 도입 등 공약에 추가하겠다고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다만 오세훈 당선자를 비롯해 기타 다른 후보들에게선 연락이 없었습니다.

박 후보 쪽에서 발표날짜까지 통보한 걸 뒤집고 공약을 하지 않기로 입장을 다시 바꾸었지만, 수술실CCTV와 의료범죄 문제를 유력 후보 캠프 관계자들이 논의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환자권익연구소가 질문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조차 없었겠지요.

거절되고 무시받고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번복되더라도, 일어나서 당당히 요구하는 것이 시민단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 환자권익연구소는 보건복지부와 국회, 서울시에도 지속적으로 요구할 겁니다. 왜 수술실 안에 CCTV를 달자는 법안이 수술실 입구 바깥에 달리는 것으로 바뀌어가는지, 어째서 보건복지부가 그렇게 법안을 조정하려 하는지, 무엇 때문에 경기도와 전라북도 공공의료원엔 있는 수술실CCTV가 서울에는 없는 건지 따지고 캐물으려 합니다.

또 속출하는 의료사고 피해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저희들의 경험을 나누어 활동을 지원하려 합니다. 더불어 있어선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는 일부 의료계 일탈 의사들을 벌하고 법과 제도, 판례를 바꾸어 나갈 겁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환자와 시민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환자권익연구소가 되겠습니다.

환자권익연구소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권태훈 올림.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권태훈 시민기자는 환자권익연구소 회원입니다.


태그:#환자권익연구소, #이나금, #권대희사건, #수술실CCTV, #환자보호3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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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정의와 약자의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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