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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관술 1902-1950' 표지에 나온 이관술. 1933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책 "이관술 1902-1950" 표지에 나온 이관술. 1933년 반제동맹으로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이다. 모진 고문을 받고 감옥에 갇혀있으면서도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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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을 이름으로나마 처음 만난 건 지난해 봄, 최백순의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으면서였다.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만만찮은 저작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했고, 이동휘와 박헌영, 김재봉과 권오설 등 그나마 익숙한 이름들 사이로 튀어나오는 낯선 이름들의 이력 앞에서 절망했다.

그것은 임시정부를 포함해, 망명지 중국 땅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나름 잘 안다고 여겼던 한국 현대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 내가 '완전히 무지'하다는 통렬한 깨달음 탓이었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5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기사는,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역사적 맥락을 간신히 더듬어낸 기록이었다(관련 기사: 조선공산당도 '일제 통치 타도·조선 독립'이 목표였다).

경성콤그룹의 이관술... 알고 보니 옛 동료의 외조부였다

<조선공산당 평전> 마지막 장 '당 재건을 위한 분투'의 피날레를 장식한 인물이 이관술이었다. 조선공산당(아래 조공)은 1925년 창당 이후 노동자·농민·청년·학생·여성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을 지도하고 신간회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불과 3년 뒤인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와 조공의 승인을 취소한다는 결정으로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이후 해방까지 각 분파 별로 벌인 당 재건 운동은 모두 실패했지만, 가장 괄목할 만한 활동으로 조공의 명맥을 이어간 조직이 1933년 조직된 경성 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와 1939년 이를 계승한 경성 코뮤니스트 그룹(경성콤그룹)이었다. 이관술은 경성 트로이카의 일원이었던 이재유(1905~1944, 2006 독립장)가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한 뒤 잠행 시기를 함께한 동지로 경성 콤그룹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최후 집결체'로 평가받는 경성 콤그룹은 이관술이 이재유, 해방 후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가 된 박헌영(1900~1956), 지리산 유격대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6~1953), <조선소설사>를 쓴 국문학자 김태준(1905~1949) 등과 함께한 조공 재건 조직이었다. 

<조선공산당 평전>에 실린 조그만 사진 속에서, 감옥의 벽면을 등지고 선 이관술은 마치 친근한 이웃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서른둘이던 1933년 4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작성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 카드 속의 그는 박박 깎은 머리 때문에 선머슴처럼 앳돼 보였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기사를 쓴 뒤, 나는 한동안 이들 혁명가를 잊고 지냈다. 이관술을 다시 호명해 준 이는 밀양에 사는 초임 시절의 제자였다. 제자가 보낸 문자는 "독립운동가 이관술, 그리고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논문의 표지 이미지였는데 그게 '손옥희 선생님 외조부' 얘기라는 거였다. 나는 화들짝 일어나 그 친구에게 바로 전화를 넣었다. 

손옥희 선생은 1984년 3월, 같은 국어과 교사로 경주의 한 여학교에 함께 부임해 4년간 같이 근무한 임용 동기였다. 손옥희와 월성 손씨 인척으로 같은 경주 양동마을 출신인 제자와 통화하여 손옥희가 '이관술의 외손녀'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나는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과 갈등의 비극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몇 가지 자료로 이관술의 생애를 살펴본 뒤, 손옥희 선생과 통화했고 지난 3월의 마지막 금요일 울산에서 그를 만났다. 내가 1988년에 학교를 옮긴 뒤 처음이니, 그새 무려 33년이 흘렀다. 그러나 이순을 넘기며 무관해져서일까. 우리는 이웃처럼 편안하게 동행했다. 

우리는 그의 차로 이관술의 고향인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 들렀다. 너른 들과 물이 넉넉한 입암리는, 학성 이씨 집성촌으로 울산 일대에 잘 알려진 양반 마을이었다. 

이관술 유적비의 수난 

이미 남의 소유가 된 생가 부근, 이관술의 사촌 동생 집 앞 공터에 선 '우국지사 학암(鶴巖) 이관술 유적비'가 화사한 벚꽃 사이로 외로웠다. 1992년 문민정부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 방침을 발표하자 고무된 유족들이, 학암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사촌 동생 이수은 소유의 주유소 안쪽에 세웠던 비석이다. 
 
한때 땅속에 묻혔다가 이관술의 종질 이일환 씨 집 앞 공터에 세워진 이관술 유적비.
 한때 땅속에 묻혔다가 이관술의 종질 이일환 씨 집 앞 공터에 세워진 이관술 유적비.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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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돌비는 지역 반공 보수 성향 단체의 반발과 강제 철거 협박, 경찰과 안기부의 압력 등 탓에 이듬해 자진 철거되어 땅속에 파묻혀야 했다. 묻었던 비석을 파내어 지금 자리에 다시 세운 건 지난 2019년이다. 

상당한 부농의 맏이로 태어난 이관술은 21세 때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진학, 1925년에는 동경제대보다 더 들어가기 어렵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공부했다. 1929년 졸업 뒤 귀국해 바로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지리와 역사 교사로 부임했다. 이관술은 강압적 훈도로 유명한 군국주의 교육 방식에 익숙한 여느 교사들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도 체벌하지 않는, 진보적 교육관을 가져 인기가 높았다. 

당시 광주학생운동(1929) 이후, 그의 제자들도 이듬해 1월의 '경성 시내 여학생 연합 시위'에 동참했는데 이를 지켜보던 이관술은 곧 동덕의 독서회를 지도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만주사변(1931) 이후 조선반제국주의동맹 경성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1933년 1월 구속돼 첫 징역을 살았다. 
 
이관술이 남긴 동덕여고보 앨범에 수록된 교무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양복 입은 이가 이관술이다.
 이관술이 남긴 동덕여고보 앨범에 수록된 교무실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양복 입은 이가 이관술이다.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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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남은 앨범에 남은 사진들. 왼쪽부터 이관술, 여동생 이순금, 제자 이효정
 유일하게 남은 앨범에 남은 사진들. 왼쪽부터 이관술, 여동생 이순금, 제자 이효정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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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하게 살아온 이관술, '전설적 혁명가' 이재유를 만나다  

1930년대의 국내 독립운동은 지하에서 대중운동을 조직한 사회주의운동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지식인 중심의 조직 대신, 공장과 농촌으로 파고 들어가 노동자와 빈농을 조직해야 한다는 등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따라, 이들은 노동계급의 당인 공산당 건설을 목표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관술의 동덕여고보 제자들 가운데 그의 이복동생 이순금, 걸출한 노동운동가로 뒷날 김태준과 결혼한 박진홍(1914~?), 이효정(1913~2010, 2006 건국포장), 1932년 그의 딸을 낳은 박선숙 등이 사회주의운동 전면에서 함께 싸웠다. 특히 이순금과 박진홍, 이효정은 경성 트로이카의 지하 혁명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숱한 여학생들이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한 것은 "사회주의가 일본에 맞서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는 이효정 증언(2006)과 이어진 것이었다. 

'전설적 혁명가'로 불린 이재유가 1933년 김삼룡, 이현상과 조직한 경성 트로이카는 노동자 파업을 잇달아 조직해내면서 새로운 항일운동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가석방된 이관술이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하여 잠행하던 이재유를 만난 것은 1934년 9월 중순이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영서지방 산중을 2개월 이상 전전하며 정세를 살폈다. 열네살에 고향을 떠나와 혼자서 자기 삶을 꾸려온 이재유에게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부잣집 도련님 이관술은 인생과 혁명가의 길을 배웠다. 이관술이 해방 때까지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로 일경을 농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의 경험 덕분이었다.

둘은 양주군 공덕리에 정착, 농민으로 변신해 1년 반 동안 은거했다. 산골 농막에서 이재유가 글을 쓰고, 필적이 좋은 이관술이 철필로 등사원지에 새겨서 발행한 기관지 <적기> 제1호(1936.10.20.)는 40여 쪽 20부를 발행했다. <적기>는 3호까지 발행되었으나, 1936년 12월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이관술은 강원도 쪽으로 몸을 피했다. 

떠돌이 장돌뱅이 행색으로 지방을 전전하던 이관술은 1939년 1월, 석방된 김삼룡을 만나 조직 재건에 합의한다. 뒤이어 출소한 이현상과 수배 중이던 권오직, 박진홍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공산주의자 조직인 동시에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안재성, <이관술 1902-1950>) 경성콤그룹을 결성했다. 

이관술은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4호까지 발행하고 고물 장수로 변장하여 조직 확대를 위해 전국을 순회했다. 잠행 시기의 이관술의 행적은 거의 전설에 가깝다. 그는 고물 장수 외에도 구두닦이, 깨진 솥을 수선하는 솥땜장이 등으로 위장해 일제 경찰의 눈을 속였다. 순탄하게 살아온 소위 '부르주아'가 놀랍게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이념에 대한 확신과 진정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복역할 때 동생 학술에게 보낸 편지. 끝에 둘째딸 성옥에게 보내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관술은 자필로 기관지를 냈다.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복역할 때 동생 학술에게 보낸 편지. 끝에 둘째딸 성옥에게 보내는 글도 포함되어 있다. 이관술은 자필로 기관지를 냈다.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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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연말, 이관술은 출소한 박헌영을 찾아 그를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영입했다. 이미 한 조직의 지도자로 성장해 있었던 이관술이 굳이 새로운 지도자를 영입한 것은, 그가 "뛰어난 두뇌와 헌신성으로 일제 하 국내 노동운동의 최고 지도자였음에도 권력욕이나 소영웅심을 가졌다는 비판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안재성, 같은 책)는 평가와도 이어지는 대목이다.

수배와 잠행 시기의 전설 이관술

1941년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로 이현상과 김삼룡에 이어, 이관술도 1941년 1월 수배 6년 만에 체포됐다. 그는 고문으로 얻은 폐병을 앓으면서 3년 여를 복역하다가 1943년 12월 말 병보석으로 입암리로 돌아왔다. 재수감 명령을 받은 직후인 1944년 3월 31일, 그는 아내와 딸의 방에 찾아와 잠든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말없이 보따리 하나를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솥땜장이를 따라 전라도를 전전하던 이관술은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았다. 그를 비롯한 경성콤그룹에서는 조공 재건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박헌영을 지도자로 추대했다. 1945년 9월 19일 '통일 재건 조선공산당'(총비서 박헌영)이 출범할 때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됐고,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았다. 

보도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의 항일 투쟁을 알고 있던 민중들은, 당시 공산당과 지도자에 대해 상당한 지지를 보냈다. 당원은 100만에 육박했고, 우익성향 잡지 <선구>의 최초 정치 여론조사(1945.12.)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이관술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뽑힐 정도였다. 

그러나 봄날은 짧았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의에서 반탁에 나선 우익의 공격으로 좌익은 궁지에 몰렸고, 공산당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경찰은 조공 간부와 공산당 본부가 있는 근택빌딩 지하실의 인쇄소 조선정판사 직원이 공모해 회사 인쇄시설로 1200만 원이라는 거액의 위조지폐를 찍어 내어 조선공산당 자금으로 사용했다며 당 재정부장 이관술과 해방일보사 사장 권오직을 지명 수배한 것이다. 

1946년 5월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을 계기로 미 군정이 좌익분열 및 조선공산당 고립화 정책을 펴면서 좌익 탄압을 가중하던 시기였다. 혐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던 이관술은 1946년 7월 체포됐고, 경찰이 제기한 증거들의 모순을 이후 4개월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 지적했지만, 재판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형 확정 뒤 대전형무소로 이감된 이관술은 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징역살이에 들어갔다. 1947년 이관술은 옥중에서 울주군 언양의 반곡초등학교를 세우는 데에 540평 농지를 기부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교사 앞에 1956년에 세운 공적비. 1947년 학교를 세울 때 토지를 기부한 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관술은 옥중에서 540평을 기부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반곡초등학교 교사 앞에 1956년에 세운 공적비. 1947년 학교를 세울 때 토지를 기부한 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관술은 옥중에서 540평을 기부했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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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폐범으로 몰려 전쟁 중 처형

1950년 7월 8일, 이관술은 대전 골령골 뒷산 계곡에서 2천여 명 좌익사범과 함께 처형됐다. 향년 48세, 15년간의 항일 투쟁, 9년여의 징역과 10년여의 수배 등으로 점철된 파란 많은 혁명가의 삶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났다. 

막내딸 이경환(1935~ )의 '아버지 찾기'는 부친이 학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난 2005년께부터 시작됐다. 열다섯에 아버지를 여읜 어머니(이경환씨)를 대신해, 딸 손옥희가 나서면서다. 손옥희는 아직도 삭이지 못한 어머니의 한을 위해서 모친 대신 외조부의 행적을 찾아 나선 것이다.

한편 전쟁을 전후해 이관술의 가족들도 결딴이 났다. 그는 본부인 사이에 딸 넷, 박선숙과는 딸 하나를 뒀다. 본부인과 둘째, 셋째 딸은 전쟁 중에 행방불명됐다. 박선숙과 그가 낳은 딸도 전쟁 이후 연락이 끊겼다. 

장녀 정환은 1948년 결혼했는데, 면서기였던 남편 박동철은 장인의 좌익활동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그는 집안을 보호하려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관술의 이복동생 학술과 함께, 울주군 언양읍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읍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되었다. 

막내딸 경환과 맏이 정환의 딸 박경희가 원고로 부당한 불법행위를 저지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2013년이다.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고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6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 승소는 유족들이 할 수 있었던 해원(解冤)의 첫발이었다. 
  
오는 4월 17일 오후 1시부터 울산 입암마을 이관술 유적비 앞에서 이관술 선생 71주기 추념식이 베풀어진다. 이어서 임성욱 교수의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실” 강연도 열린다.
 오는 4월 17일 오후 1시부터 울산 입암마을 이관술 유적비 앞에서 이관술 선생 71주기 추념식이 베풀어진다. 이어서 임성욱 교수의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실” 강연도 열린다.
ⓒ 이관술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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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의 창립은 이런 저간의 상황 변화에 힘입은 것이었다. 창립 세미나에서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2019)의 저자 임성욱 한국외대 교수는 이 사건을 미 군정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고자 '기억의 조작'을 통해 반공주의 체제를 공고화한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희생의 시간과 그 한은, 후손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출범하자, 손옥희는 '정판사 위폐 사건'의 진상 조사를 신청했다. 그러나 2010년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신청 사건은 조사되지 않았다. 2020년, 손옥희는 어머니 이경환 명의로 외조부의 서훈을 신청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 결과' '광복 이후의 행적' 때문에 서훈 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고 통지해왔다. 
 
"할아버지는 ,엄마나 내가 그려온 '좋은 사람'이 틀림없었지요. 그러나 사실이 은폐된 왜곡된 권력의 역사 속에 희생되었던 시간, 한 따위는 후손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땅속에 묻혔던 공적비를 캐내어 다시 세우긴 했는데, 그걸 제자리에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경환(1935~  ) 할머니는 2014년부터 치매를 앓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사진은 2019년 8월 요양원에서.
 현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경환(1935~ ) 할머니는 2014년부터 치매를 앓으면서 과거의 기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사진은 2019년 8월 요양원에서.
ⓒ 손옥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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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은 지금 양동마을 인근의 요양원에 있다. 2014년부터 앓기 시작한 치매로 그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부친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할 때, 열다섯살이었던 막내딸은 올해 여든여섯(86세)이 됐다. 손옥희는 엷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엄마는 치매로 기억을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라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헤어지기만 했던 슬픈 가족사는 물론이고 아버지, 공산주의, 빨갱이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놓아버리는 게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요?"

때로 그들이 지키고자 한 이념에 분단의 귀책을 묻곤 하지만, 그들은 일제에 맞서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되찾은 해방 공간에서 돌연 동족에게 학살되어 버린 이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나라의 기림은커녕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유족들 세월은 또 무엇인가. 이관술의 삶과 투쟁은, 비어 있는 우리 한국 현대사의 한 갈피를 여전히 아프게 환기하고 있다. 

[관련 기사]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http://bit.ly/1vlnw2 
"이관술의 위폐범 누명 벗겨주고 싶었다" http://bit.ly/BsLxE 

덧붙이는 글 | 이관술의 삶과 투쟁은 대체로 안재성 지음 <이관술 1902~1950>의 기록을 따랐습니다. 안 작가는 <경성 트로이카>를 읽은 손옥희와 만나 이관술의 비어 있는 행적을 채워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태그:#이관술, #경성콤그룹,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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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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