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19 11:51최종 업데이트 21.04.19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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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쿠데타 이후 전두환 신군부 집단은 집단지도체제 비슷하게 운영됐다. 박정희가 쓰러진 그해 10·26 사태까지만 해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이 12·12 이후로 펼쳐졌다. 그래서 전두환이 독자적이고 주도적으로 정국을 끌어가는 데는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야심이 있었든 없었든 그는 준비된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태 당일까지 그는 박정희의 총애에 힘입어 성장한 국군보안사령관이었다. 독재자의 신임을 얻는 데 최적화된 정치군인이었을 뿐, 자기 판단으로 정치 상황을 돌파하며 국민의 지지를 얻는 일에는 최적화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전두환은 남의 힘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료 군인들과 함께 집단지도체제 비슷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전두환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역할을 수행한 소그룹이 있다. '쓰리 허'로 불린 허화평·허삼수·허문도가 바로 그들이다. 
 

국회 문공위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이광표 전 문공부 장관. 허삼수 전 청와대 비서관. 이수정 전 문화공보부공보국장. 허화평 전 청와대 보자관(왼쪽부터)이 80년 언론통폐합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1988.11.23 ⓒ 연합뉴스

 
1937년생으로 육사 17기인 허화평은 전두환이 국군보안사령관이 된 1979년 3월 보안사령부(보안사) 비서실장이 됐다. 육사 17기 동기이지만 1년 일찍 태어난 허삼수도 그해에 보안사 인사처장이 됐다. 1940년생으로 서울대 농대 출신인 허문도(2016년 작고)는 조선일보 도쿄 특파원을 거쳐 1979년 주일대사관 공보관이 됐다가 1980년 4월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의 비서실장이 됐다.

이들이 킹메이커 역할을 하다가 청와대 비서실로 결집한 것은 1980년 9월이다. 그해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9월 1일 전두환이 취임한 뒤에 발행된 9월 11일 자 <매일경제> 기사 '전 대통령이 임명장'은 "(11일에) 허화평 비서실보좌관, 허삼수 사정수석, 이학봉 민정수석, 전석영 총무수석, 허문도 공보비서관 등에게 각각 임명장을 수여했다"고 보도했다.


쓰리 허는 육사 18기로 1977년 보안사 과장이 되고 1980년 보안사 처장이 된 이학봉과 더불어 이 시절의 정국 상황을 주도했다. 쓰리 허와 이학봉 간에는 갈등이 있었다. 그리고 쓰리 허 내에서는 허화평·허삼수가 앞섰고, 허삼수보다는 허화평이 앞섰다.

1994년 1월 30일 자 <동아일보> 연재물 '남산의 부장들 (172)'에 실린 인터뷰에서 전두환 정권 초기의 청와대 고위 인사는 "나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 노태우 사령관이 신군부 내 2인자인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그렇지 않더군요"라며 "전 대통령 주변의 최고 실력자는 허 보좌관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말이 보좌관이지 부통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일에 관여했어요"라고 고위 인사는 덧붙였다.

허화평의 위상은 사무실 위치에서도 증명됐다. 그의 방은 청와대 본관 접견실 옆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대통령과 면담 예정인 장관·참모총장 등을 만나고 관계를 돈독히 했다. 이는 그의 정권 내 위상을 더욱 높였다.

12·12 쿠데타로부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대략 8개월 보름이 지났다. 이 기간에 전두환은 5·18 광주를 잔혹하게 진압하면서도 정권 핵심들의 눈앞에서는 주저주저하는 모습도 보였다. 정말로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식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전두환에게 확신을 심어주며 대통령의 길로 몰아간 것이 바로 쓰리 허, 그중에서도 허화평이었다. 1993년 4월 25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37)'에 따르면, 쓰리 허를 잘 아는 1993년 당시의 한 현역 국회의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12·12도 신군부의 속을 들여다보면 허 실장(허화평)이 주역입니다. 지략이 있는 허 실장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주도했지요. 전 사령관은 업혀 간 겁니다. 대통령으로 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두를 못 내는 전 사령관을 몰고 간 사람이 바로 허 실장입니다.
 
전두환이 허화평의 '머리'를 빌렸다고도 볼 수 있지만, 허화평이 전두환의 '군부 영향력'을 빌렸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전두환이 리더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동업자 비슷한 양상이 전두환과 쓰리 허 사이에 존재했다. 그래서 초기의 전두환 정권에서는 전두환이나 노태우뿐 아니라 쓰리 허와 이학봉 등도 '대주주' 비슷한 위상을 띠었다.

정권이 위기에 몰린 1982년

그랬던 전두환 정권이 1982년 하반기에 '전두환 1인 체제' 양상을 보임과 동시에 강경 색채를 현저히 누그러트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바뀌게 된 결정적 원인이 쓰리 허에 있었다. 이들의 약화 내지 실각이 정국 변화에 영향을 줬다.

1982년 12월 28일 자 <동아일보> '정치 1년'은 한 해의 주요 사건을 정리하면서 "막바지에는 제5공화국의 산파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져 있는 청와대의 허화평 정무 제1수석과 허삼수 사정수석 등 두 비서관이 경질되는 등 임오 한 해는 정말 다사다난과 변이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라고 보도했다. 허화평·허삼수가 청와대를 떠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기사다.

허문도 비서관은 그해 1월 5일 차관 인사 때 문공부 차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허화평·허삼수는 12월 20일 경질됐다. 12월 20일 인사는 두 사람을 장·차관이나 해외 대사 쪽으로 내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실질적 의미의 숙청이었다. 허화평은 이듬해 1월 28일 헤리티지재단에서 연구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출국했고, 허삼수는 3월 31일 동서문화센터에서 연구할 목적으로 하와이로 출국했다.

전두환 정권 수립의 실질적 주역인 이들이 1982년 한 해 동안 약화된 데는 정치환경의 변화가 큰 몫을 했다. 미국의 5·18 진압 묵인에 대한 한국민의 분노가 1982년 3월 18일 부산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으로 폭발하고, 전두환의 폭정에 대한 국제적 분노가 김대중 사면운동으로 이어져 그해 3월 4일 김대중 사면 발표로 귀결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정권의 정통성 위기는 1982년에 한층 더 심해졌다.

이 상태에서 현역 순경 우범곤이 홧김에 민가를 돌아다니며 총을 쏘고 수류탄을 터뜨려 95명을 살상한 뒤 자살하는 '우 순경 총기 난사 사건(4월 26일)'이 돌발해 민심이 크게 동요했다. 10일도 안 지난 5월 5일에는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 사건'의 장본인인 장영자가 구속돼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장영자는 자금 사정이 안 좋은 기업에 돈을 빌려준 뒤 채권액의 2배 내지 9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았다. 이렇게 확보한 7111억 원의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현금으로 할인해 물 쓰듯 쓰고 다녔다. 어음을 갚아야 할 채무자들의 실제 빚은 액면가의 9분의 1 내지 2분의 1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이들은 그마저도 제대로 갚을 형편이 아니었다. 대형 금융사고가 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짜장면이 300원 정도이던 1980년대 초반에 7111억 원 치 어음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기업들은 부도를 맞고 국민들은 쓰나미 같은 허탈감을 맞았다.

국민을 더욱 허탈하게 한 것은 장영자의 인맥이었다. 그는 전두환의 처숙부인 이규광(이순자 작은아버지)의 처제였다. 돈의 흐름에 관한 소문 역시 국민들을 더욱더 허탈하게 했다. 그 돈이 민정당에 들어갔다, 이순자와도 관련이 있다는 등등의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5·18 학살 및 쿠데타로 인한 정통성 부족을 은폐하고자 '정의사회 구현'을 표방했던 전두환 정권이다. 그런데 대통령 부인의 친인척이 사건에 연루됐으니 정권이 치명타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신군부 정권에 대한 내외적 도전과 더불어 우 순경 사건 및 장영자 사건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그동안 정국을 주도했던 허씨들의 입지는 위축됐다. 더 이상 강경책으로 일관할 수 없게 되자 강경파인 이들의 발언권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쓰리 허의 몰락

허씨들의 입지를 좁힌 요인과 별개로 이들의 숙청을 초래한 것은 경쟁 구도였다. 이들의 라이벌은 이학봉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전두환이기도 했지만, 이들의 파국을 부른 라이벌은 이순자 일족을 포함한 전두환 친인척들이었다. 전두환 친인척 중에서도 '이순자족(族)'이 허씨들의 몰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영자 사건 이전부터 허씨들과 이순자족(族) 간에는 전두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긴장 관계가 존재했다. 이런 상태에서 장영자 사건이 터지자, 두 허씨는 이를 이순자족 공격의 기회로 삼았다. 국민적 의혹을 받는 이규광의 구속을 촉구해 결국 관철했다. 이규광은 5월 18일 구속됐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제42기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해 임관한 졸업생과 악수하며 격려하고 있다. 1986.3.27 ⓒ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이순자는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권력 주변의 부나방들은 또다시 작은 아버님을 감옥이라는 나락으로 내몰고야 말았다"라며 원통해 했다. '또다시'란 표현을 쓴 것은 이규광이 박정희에 맞서는 쿠데타에 연루돼 근 17년간 낭인 생활을 한 상태에서 두 허씨로 인해 구속되는 비운을 또 맞이했기 때문이다.

허씨들은 이규광 구속을 계기로 외척(왕실 사돈)인 이순자족은 물론이고 전두환 친족들까지 견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규광 구속 직후부터 전두환이 이상해졌다. 이틀 뒤인 5월 20일 전두환은 국면 전환을 위해 민주정의당(민정당) 당직 개편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때 그는 두 허씨와 친한 권정달을 사무총장직에서 해임하고 허씨들과 갈등 관계인 권익현을 그 자리에 앉혔다. '권력 주변의 부나방들'에 대한 전두환의 인식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인사 조치였다.

두 허씨도 가만히 있지 않다. 5월 22일 이들은 반격에 나섰다. 전두환을 제외한 12·12 주역들의 상당수를 궁정동 안기부장 사무실(안가)에 모아놓고 이순자족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해석에 따라서는 '역적모의'라고도 볼 수 있는 회합이었다.

'친인척 비리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이 회의의 결론은 노태우 내무부 장관을 통해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청와대 비서관인 두 허씨의 의견이 12·12 주역들의 중론으로 '세탁'돼 내무부 장관을 통해 청와대로 되돌아가 전두환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 상황은 전두환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1994년 2월 6일 자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 (173)'에 따르면, 전두환은 두 허씨를 약화하는 조치에 착수했다. 허씨들이 너무 커져 전두환 자신까지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1982년 당시의 청와대 고위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모임을 계기로 허씨들을 그냥 놔둘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 것 같습니다. 얼마 후 전 대통령은 허화평 씨를 청와대 본관에서 별관으로 내려 보냅니다. 그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도 대통령의 사전 허락 없이는 본관을 출입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그렇게 1982년 중반부터 두 허씨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한 전두환은 그해 12월 20일 이 둘을 청와대에서 내보냈다. 그해 1월 청와대를 나간 허문도에 이어 쓰리 허 전원이 청와대를 떠나게 됐다. 이순자족에 대한 두 허씨의 선전포고가 전두환의 분노와 경계심을 초래해 쓰리 허 시대의 종말로 귀결됐다.

1982년 하반기에 발생한 이 일은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크게 바꾸었다. 12·12 및 5·17 쿠데타와 5·18 학살에 참여했던 강경파 측근 세력이 도태되면서 집단지도체제 양상이 제거되고 전두환 1인 체제가 부각됐다. 동시에 민중의 도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전두환 정권의 태도도 다소 누그러졌다.

이와 함께 이순자족을 비롯한 전두환 친인척에 대한 견제가 약해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는 친인척의 발호로 이어지고 머지않아 이 때문에 전두환이 국민의 지탄을 받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전두환이 퇴임한 1988년에 대거 구속됐다. 결국엔 이순자족이 타격을 입었지만 이는 훗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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