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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콘서트 티켓을 선물 받았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뒤로 콘서트는 좀처럼 가게 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지난여름 친구 K와 함께 다녀온 피아노 콘서트가 마지막이었다. 그때도 이곳 팔라우 데 라 무지카(Palau de la Música Catalana)였다.
 
팔라우 데 라 무지카
 팔라우 데 라 무지카
ⓒ 한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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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음악당으로도 불리는 이곳 콘서트 홀은 알폰스 무하가 생각나는 아르누보 스타일이다. 입안이 달달해지는 파스텔 톤의 색색깔 타일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벽과 천장에 붙어있고, 로맨틱한 스테인드 글라스 장식이 있다.

건물 입구에 들어섰을 때 직원 한 명이 한 사람씩 손에 알코올 젤을 펌프질 해주는 것이 보였다. 들어오는 사람들의 열을 체크하는 모니터가 있고, 그 앞을 지나 티켓을 보여줄 때는 한번 더 온도계로 체온을 검사했다.

코로나19 방역 때문에 객석은 떨어져 앉도록 되어 있었는데, 판매하는 자리는 어지간히 모두 차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백발성성하고 다정한 모습의 할아버지 피아니스트가 걸어 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피아노가 있는 무대 중앙까지 간 뒤에 마스크를 벗고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인사말로 시작한 그는 말을 이어갔다.

"우리 모두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음악이 필요한 때입니다."

마음의 장벽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우리 모두 음악의 위로가 필요해 그곳에 모였을 테지만, 묘한 긴장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팬데믹 이후 찾아온 뉴노멀은 여전히 어색한 옷이다. 

"오늘 프로그램은 설명할 게 없습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니까요. 음악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죠. 그의 가장 훌륭한 자녀 중 하나는 루디비히 판 베토벤일 겁니다."

이 할아버지 피아니스트는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 글렌 굴드에 이어 바흐 연주의 대가로 불린다는 사람이다.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그의 연주는 유려하면서 정교했다. 손끝이 피아노 건반에 닿을 때마다 기다란 그랜드 피아노의 줄들이 춤을 추면서 콘서트 홀 안은 공명으로 가득 찼다. 음악은 곧 내 심장으로 파고들어 남아 있던 긴장을 모두 씻어내는가 싶더니 내 손등 위로, 어깨 위로 각색의 음들이 내려앉아 괜찮다고 토닥인다. 

클래식 콘서트에 매료되어 자주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행동생물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동물원에서 관찰 데이터를 모으고 있었다. 하루 종일 오랜 시간 일을 하고 있었고 엄마와 동생이 무척 그립기도 했고, 위로가 필요했다.

동물원에서 사귄 친구들과 전화 너머로 듣는 엄마의 목소리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 무렵 친구 M을 따라갔던 콘서트는 내 마른 목을 축여주기에 충분했다. 공명하는 음들이 머리 위로 내려앉고, 내 몸을 감싸고, 하루 종일 긴장했던 근육이 풀리면서 말로 하기 힘든 위로를 전했다. 

바흐를 좋아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클래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줄곧 쇼팽이나 베토벤을 아주 좋아했다. "바흐는 너무 절제되어 있어." 그래서 매력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쇼팽은 80퍼센트 카카오 초콜릿을 먹을 때처럼 달콤함과 씁쓸함이 적당히 섞인 멜랑콜리한 선율이 매력적이라 언제 들어도 좋았다. 베토벤은 생각해보면 나름의 '절제'가 느껴지는 음악이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사람 냄새가 났다.

오늘 이곳 콘서트 홀에 앉아 안드라스 할아버지가 만들어 내는 음악을 들으면서 왜 그랬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흔히 완벽하다고 이야기 하는 바흐의 음악은 모든 감정을 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없는 게 있다. 분노와 절망, 간지러운 행복감 같은 것이다. 이런 감정들은 바흐의 카프리치오에서 이어진 베토벤의 소나타에서 짙게 묻어 있었다.

가슴을 조여 오는 절망과 분노가 어린 시절의 내 가슴에서 요동치고 있었으니까. 그걸 닮은 그의 음악이 심장을 파고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 받음'으로 느꼈던 거란 걸 알게 됐다. 그것은 그대로 완전한 '위로'였고, 나는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자주 콘서트 홀을 찾게 되었던 거다.

그에 비해 바흐의 음악은 세속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행복감(happiness)보다는 만족감(contentment)에 가까운 음악. 절제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애써 절제를 하고 있다는 것과도 달랐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그것을 나는 숨 막히게 느끼곤 했다.

그런 음악을 조금씩 좋아하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을 따라 그가 좋아하는 것에 시선을 섞고, 내 삶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품을 수 있는 것들이 하나씩 늘어나면서였다. 그러니 어쩌면 내 삶의 위로도 조금씩 더 많아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안드라스의 말이 다시 귓가를 스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손등 위에 이 시간을 견뎌낼 힘과 위로가 가닿기를.

태그:#코로나19,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음악당,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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