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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다

봄날의 꽃이 피고 지듯이 3, 4월의 만세운동이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후에 일제 탄압의 칼날이 반도를 뒤덮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모진 고통을 당하고 감옥에서 고초를 겼었다. 만세운동으로 국가에 관한 인식을 하게 되고 애국심을 느꼈다. 하지만 만세를 부른다고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님을 또한 철저하게 깨달았다. 결국은 항쟁의 조직이 필요했다. 또한 실력양성도 필요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국가 경쟁에서 힘이 필요했다. 힘은 배움에서 시작하여 나아가 무장투쟁도 제기되었다.

만세운동을 하고 나서 대다수 사람은 이런 인식을 하게 되었다. 독립이란, 일본의 통치권을 벗어나서 조선사람으로 통치하는 것이요, 우리의 행복을 위해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일강제 병합 이후 일본의 정책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고 무리한 동화(同化)를 강제하여 우리의 문화를 박멸하니 어찌 독립을 열망하지 않겠는가. 일본은 걸핏하면 조선인이 안녕질서를 문란하느니 어찌하느니 하지만 실상 일본인이 우리의 안녕질서를 문란케 하니 우리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독립하여야 한다. 우리가 합병당하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선언서에서 주장하듯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모색하였다. 임시정부에 대한 논의는 3‧1운동 당시부터 있었다. 3월 2일 천도교 『조선독립신문』에 "근일 중에 가정부(假政府)를 조직하고 가대통령(假大統領) 선거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장 먼저 1919년 3월 21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가 러시아 땅(露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립되었다. 대통령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국무총리에 이승만, 탁지총장(度支總長)에 윤현진, 군무총장에 이동휘, 내무총장에 안창호, 산업총장에 남형우, 참모총장에 유동열, 강화대사(講和大使)에 김규식을 각각 추대하였다. 조국 독립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국 민족의 정당한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일본의 통치 철폐, 국제연맹 참가, 일본에 혈전 포고를 주장하였다.

이후 임시대한공화정부(1919.03.29. 간도)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조선민국임시정부(1919.4.10. 서울), 대한민국임시정부 (1919.04.11. 상해), 신한민국정부(1919.04.17. 평안), 한성정부(세칭, 1919.04.23. 서울), 대한민간정부(1919.04.01. 기호), 고려임시정부(1919.04. 간도). 이렇게 총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일부는 종이 전단의 정부이기도 했다.
 
임정 국무원 사진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첫째 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둘째 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숙춘.
▲ 임정 국무원 사진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첫째 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둘째 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숙춘.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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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29명이 1919년 4월 10일 저녁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개회하였다. 국회 역할을 한 임시의정원은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공포했다.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주권재민, 삼권 분립, 민주 공화정,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다. 1910년에 망한 대한제국의 '대한'을 되찾고 국민이 주인인 나라 '민국'을 세웠다. 그리고 1919년 9월 11일 실체가 있었던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세 임시정부가 안창호의 주선으로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상해 임정은 파리강화회의에 외교를 집중하고 각종 법령과 제도 정비하는 한편, 조직 정비를 위해 연통제와 교통국의 설치, 거류민단의 운영을 도모하였다.

통합정부가 출범했지만, 당시 위임통치를 청원한 대통령 이승만과 이를 비판한 국무총리 이동휘 사이의 대립과 불화가 임정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독립운동에서 외교 노선과 무장투쟁 노선의 갈등이기도 했다. 혼란의 시기 1921년 5월까지 상해 임정을 실질적으로 이끈 사람은 내무총장인 안창호와 차장들이었다. 임정은 파리강화회의의 실패로 외교 노선의 한계에 직면하고, 1920년 청산리전투에 이은 경신참변 등으로 독립전쟁은 큰 타격을 입었다.

상해 임정 출발점인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1919.04.10.)에 참여한 29명 중에 영남 출신은 백남칠(白南七, 1892~1952, 경상), 김대지(金大池, 1891~1942, 경남 밀양), 남형우(南亨祐, 1875~1943), 경북 고령), 이영근(李渶根, 경남)이 있었다. 당시 백남칠은 이광수와 함께 서기(書記)를 하였다. 김대지는 일합사 활동 후 임정의 내무위원과 조사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의열단의 간부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남형우는 1909년 대동청년당,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1919년 대한국민의회 산업총장, 상해임정의 법무차장, 법무총장, 교통총장을 역임하였고 1922년 비밀결사 다물단(多勿團)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이후 1919년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은 윤현진(尹顯振, 1892~1921, 경남 양산), 김홍조(金弘祚, 1868~1922, 울산), 최완(崔浣, 1889~1927, 경주), 김정묵(金正默, 1888~1944, 경북 구미) 유경환(柳璟煥, 경남 산청) 백남규(白南圭, 대구), 김동형(金東瀅), 김창숙(金昌淑, 1879~1962 경북 성주), 김갑(金甲, 1888~1933, 부산), 김두봉(金枓奉, 1889~1960, 부산 기장), 현정건(玄鼎健, 1887~1932, 대구), 이규홍(李圭洪, 1893~1939, 경남 양산), 구영필(具榮佖, 1890~1926, 경남 밀양) 등이다. 1920년과 1921년의 의원은 윤현진, 이규홍이었다.
 
임시의정원  1921년 임시정부 및 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이규홍, 오른쪽 세 번째가 윤현진이다.
▲ 임시의정원  1921년 임시정부 및 의정원 신년 축하식 기념사진. 둘째 줄 왼쪽 첫 번째가 이규홍, 오른쪽 세 번째가 윤현진이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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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은 대동청년단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총장 대리, 노동총판,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김두봉은 한글 학자인 주시경(周時經)의 수제자로 국어사전 『말모이』 편찬에 참여하였고, 1916년에 『조선말본』을 저술하였다. 1917년 보성학교를 시작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우리말을 가르쳤다. 최현배가 그의 제자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항일 투쟁의 통일 전선을 구축하고 중국 공산당과 연대하기도 했다. 울산의 김홍조는 박영효의 정치적 동지이자 후원자로 1907년 대한광복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1912년 이회영(李會榮)·이시영 형제 등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도 후원했다. 또 그는 1915년 경남은행을 설립하고 경남신문을 발행하였다. 1921년 태평양 의회에 보내는 이승만(李承晩)의 진정서에 불교진흥회 대표로 서명했다.

1919년 당시 경상도 출신의 임시의정원 중에서 대동청년단원은 단장인 남형우, 윤현진, 최완, 김갑 등이 있었고 밀양의 일합사와 의열단원으로는 김대지와 구영필이 있었다. 그런데 양산 출신으로 윤현진과 이규홍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 임정 차장으로 각각 활동하였다. 현정건은 윤현진의 여동생 남편이지만 기생 출신 여자 의열단원 현계옥의 연인이다. 김홍조는 양산 상삼마을 김정훈의 장인이지만 윤현진의 삼촌인 윤상은과는 사돈이자 사업 동반자였다. 경주 최부자 최완은 백산상회를 운영한 최준(崔浚, 1884~1970)의 동생이다. 최준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동청년단, 대한광복회에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산상회 관련자는 남형우, 윤현진, 최완, 김홍조가 있다. 이렇게 부산, 울산, 양산으로 이어진 삼산지역의 인물들이 상해 임정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의원 활동을 하였다.

윤현진과 이규홍은 양산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학을 같이 유학하여 졸업하였다. 윤현진은 28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9년 당시 대한국민의회와 임시대한공화정부의 탁지총장(度支總長)에 선임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재무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이규홍은 1919년 4월 상해 임정의 청년단 출판 부장을 맡고, 11월에는 학무차장을 지냈다. 그 후 재무총장, 외무총장,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임시헌법개정 위원, 새약헌기초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1년까지 남형우와 함께 윤현진과 이규홍은 상해 임정의 차장 정치시대를 주도하였다. 초기 임정에서 장관 격인 총장들은 부재하여 안창호 내무 총장을 중심으로 한 차장들이 주역이었다.

1919년 되어 박재혁의 노모와 여동생에게 박국선이 빌려 간 돈을 갚으라고 성화가 심했다. 박재혁이 상해 중화국 청년회관에 입학하여 어학을 공부하던 때에도 박국선은 마치 친부처럼 그를 수소문하여 귀국을 종용한 바가 있었다. 경북 왜관에 있던 박국선의 빚 독촉에 가족들이 시달림을 받아 박재혁에게도 연락했겠지만, 박재혁은 귀국할 사정이 아니었다. 결국 1919년 5월 5일 모친 명의로 된 범일동 183번지의 박재혁 생가는 범일동 235번지에 거주하는 백우민에게 팔았다. 그리고 6월 27일 범일동 550번지로 이사를 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명진은 "가족들은 오빠가 상해에 간 것을 모르고 있었어요. 한참 뒤 왜관에서 연락이 와 집을 팔아 오빠가 빌려간 돈을 갚았어요"라고 증언하였다. 현재 범일동의 '박재혁 거리'는 범일동 550번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박재혁이 실질적으로 산 것이 아니라 모친과 동생이 산 집이다. 하지만 이 집에서 1920년 9월 전후로 다시 354번지로 이사한다. 한편 정공단 좌천동에 있으면서 상업 활동을 하였던 김영주는 1919년 9월 15일에 부산 동래부 구포면 만덕리 388번지의 월성박씨 박상순(朴尙順, 1900.06.19.~1973.11.10.)과 결혼하였다.

의열단을 창립하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은 민중의 직접 혁명 가능성을 보여준 역사적 변혁 운동이었다. 하지만 지도자의 역사적 안목의 결여로 혁명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4월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9월에 사이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헌병경찰과 통감부를 폐지하고 조선관리 대우 및 언론자유를 허용하는 등의 유화책을 구사하였다.

상해 임정은 극심한 재정난뿐만 아니라 독립투쟁노선의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이승만의 외교노선과 안창호의 실력양성론(독립운동준비론), 그리고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그것이었다. 상해임정 초창기는 분열과 갈등의 정치투쟁으로 제대로 독립운동을 선도하지 못했다. 이에 실망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해를 떠났다. 김원봉은 1919년 임시정부에 관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각 혁명 단체와 국내 인민의 합법적, 민주적 선출에 의해 조직된 것이 아니고 국토와 인민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훗날 1942년 8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김원봉은 선출되었다. 좌우연합 임시의정원 구성 때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암살단으로 김인태를 보낸 것에서 보듯 김원봉은 외교에 의한 독립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무력항쟁에 의한 독립운동을 강조하였고 무장 투쟁의 길을 추구하였다. 3・1 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군대조직에 의한 군사작전, 국내에서는 결사대에 의한 투탄거사라는 양 방면의 대일항쟁을 전개해 나갈 필요를 느꼈다.

1919년 2월 27일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었으니 현실적으로 군대조직과 운용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이 미비하였다. 결국 방법은 작탄투쟁이었다. 대한독립의군부의 후신인 조선독립군정사 주도로 소수 정예의 작탄투쟁 행동대 창설을 6월경부터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초순에 남경 금릉대학의 유학생 김원봉이 학업을 중단하고 길림으로 갔다. 김원봉은 고모부이자 중학교 때 스승이었던 당시 만주 지역 핵심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독립군정사의 재무부장 황상규의 권유에 따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김원봉은 "무력항쟁을 위한 군대 양성이란 적어도 오늘날에 있어서는 현실과 너무나 몰교섭적인 한계의 망상일 뿐이다"라고 자각하였다. 그는 이제까지의 군대 양성 노선을 포기하고 폭력혁명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아마 이모부 황상규나 김대지의 영향인 듯하다. 비밀결사 단체 결성의 필요성은 대동청년단 출신의 남형우와 그 동지들, 그리고 일합사 출신의 광복단원인 황상규, 김대지도 가지고 있었다.

김원봉은 5월 3일 서간도 류하연 고산자에서 개교한 신흥무관학교로 중국인 폭탄제조 기술 교관인 주황을 대동하고 찾아간다. 김원봉이 신흥무관학교에 가서 한 일은 주황에게 폭탄 제조법을 배운 것, 동향 친우를 포함한 몇 명의 생도를 동지로 규합한 것, 두 가지였다. 6월 길림 신흥무관학교에서 김원봉(金元鳳)・ 양건호(梁健浩, 이종암)・서상락(徐相洛)・김옥(金玉, 金相潤)등과 함께 '급극(急劇)한 직접적 행동을 취할 의열단이라 칭하는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할 것을 숙의하였다. 이어서 7월에 김원봉과 이종암은 상해로 가서 김대지의 주선으로 임정의 구국모험단 단장 집[혹은 김성근의 집]에 유숙하면서 약 3개월에 걸쳐 폭탄 제조법 및 조작법을 배우고, 10월 중순 길림에서 곽재기, 신철휴, 윤소룡, 이낙준, 김원봉은 동지가 되었다. 그리고 앞서 뜻을 모았던 동지들이 길림에 집결하였다.

송화강 상류의 교통 요지인 길림은 망명 독립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였다. 1919년 겨울 11월 9일[10월 하순] 밤이었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潘)씨의 화성여관에 비밀독립결사 결성을 위한 동지들이 모였다. 이 집은 이종암이 전체 집을 세로 얻어 동지들의 거처 및 연락소로 정해두었던 곳이다. 김원봉의 증언에 따르면, 11월 9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진행된 창단 모임 참석자는 김원봉(1898년생, 밀양), 윤세주(1900년생, 밀양), 이성우(1899년생, 함북 경원), 곽경(곽재기, 1893년생, 충북 청주), 강세우(1901년생, 함남 삼수), 이종암(1896년생, 대구), 한봉근(1896년생, 밀양), 한봉인(1898년생, 밀양), 김상윤(김옥, 1897년생, 밀양), 신철휴(1898년생, 경북 고령), 배동선(1899년생, 평양), 서상락(1893년생, 경북 달성) 외 1명으로 총 13명이었다.

그런데 의열단 1차 폭탄사건(밀양폭탄사건, 진영사건)의 1921년 판결문에 따르면, 참석자는 이성우, 곽재기(곽경), 신철휴, 윤소룡(윤세주), 김원봉, 양건호(이종암), 서상락, 김옥(김상윤), 강세우, 한봉근 10명이었다. 김원봉의 증언과 달리 한봉인과 배동선은 없다. 이종암의 1926년 판결문에 따르면, 김원봉, 윤소룡, 김옥, 서상락, 이성우, 강성우, 한봉근, 곽재기, 이종암 등 9명이다. 이 명단에는 신철휴가 없다. 강성우는 강세우인 듯하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신철휴는 의열단 결의 단계부터 참가한 인물이다.

배동선은 당시 중국이 아닌 미국 유학 중이었다. 실재 윤세주는 신병으로, 강세우는 다른 이유때문에 창단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창단 단원이라 알려진 사람 중에 1920년대 의열단 관련 사건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은 강세우, 배동선이다. 이처럼 창단 모임 명단은 정확하지 않다. 창단 명단에는 없지만 황상규(1890년생, 밀양), 윤치형(1893년생, 밀양), 이수택(이일몽, 1891년생, 경북 칠곡), 배중세(1893년생, 마산), 구영필(1891년생, 밀양), 김기득(1899년생, 서울) 등이 의열단 초기부터 활동한 것은 분명하다. 

의열단의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는 것으로 폭탄을 사용하여 조선에서의 요로(要路)의 인물을 죽이고 중요한 건물을 파괴하여 민심을 소란하게 함으로써 독립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 밀양폭탄 관련자들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김원봉이 주관을 하였지만, 아직 22살에 불과한 김원봉이 청년자가 아니라, 곽재기가 임시단장[수반(首班)]을 하고, 나머지는 단원이 되고, 이수택과 배중세, 윤치형은 자금조달방법을 원조하기로 하였다. 최연장자인 황상규는 재판 과정에서 의열단원은 아니지만, 단체의 취지, 목적에 크게 찬성하였다고 하였다. 일합사. 광복단, 대한광복회, 대한독립의군부, 북로군정서 등 독립운동을 온몸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실제 의열단 창단의 숨은 주역이었다.

1919년까지 김원봉은 실제 민족해방운동의 투쟁 경력은 미비했다. 그에 비해 일합사 출신들은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의열단 창단의 조력자에 머물렀다. 나중에 의백은 투표로 김원봉이 되었고 김재기는 부단장이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여기는 애국자들인 의열단원은 그동안의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조직 운영 방침과 당면 활동 방향을 철야 논의한 끝에, 11월 10일 의열단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공약 10조'를 결정하였다.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2.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희생하기로 함.
3. 충의(忠義)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4.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5. 의백(義伯) 일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6. 하시하지(何時何地 :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매월 일차씩 사정을 보고함.
7. 하시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 함.
8. 피사 (被死) 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9. 일(一)이 구(九)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함.
10. 단의에 반배(返背)한 자를 처살(處殺)함.

의열단의 역사를 쓴 유자명에 따르면, 의열단의 행동강령은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다음과 같다.

1) 천하 정의의 사업을 맹렬하게 실행하자.
2) 동지 사이의 단결은 두 손의 열 손가락과 같은 것으로서 한 사람은 아홉 사람에 복종하고 아홉 사람은 한 사람을 위하여 책임지자.
3) 책임자 하나를 선거하여서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정의'의 '의'자와 '맹렬'의 '렬'자를 합해서 '의열단'이라고 한 것이고, 의열단이 말한 '정의의 사업'은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박재혁은 언제 의열단원이 되었을까?
 
초기 의열단원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의열단 창립 초기 멤버들의 단체 사진. 오른쪽 위부터 단장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김태희), 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다. 오른쪽 아래는 일제 경찰이 따로 붙인 김익상 사진이다.
▲ 초기 의열단원 서울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 남아 있는 의열단 창립 초기 멤버들의 단체 사진. 오른쪽 위부터 단장 김원봉, 곽재기, 강세우, 김기득(김태희), 이성우. 앉은 사람은 정이소이다. 오른쪽 아래는 일제 경찰이 따로 붙인 김익상 사진이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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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초기 단원을 분석해보면 나이로 보면 가장 연장자가 1890년생인 30살의 황상규였고 가장 어린 단원이 1900년생인 20살의 윤세주였다. 1913년에 결성한 일합사 출신인 구영필, 이수택, 황상규, 김대지, 윤치형은 창단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자문 혹은 조력자, 숨은 주역들이었다. 1918년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김원봉, 이성우, 이종암, 김상윤, 서상락, 신철휴, 한봉인, 강세우였고 이들은 대부분 창단 모임에 참석했다. 지역적으로 밀양 출신은 김원봉, 김상윤, 한봉인, 한봉근, 윤치형, 황상규, 구영필, 윤세주였다. 윤세주와 김상윤은 밀양 3・1 만세운동의 주도자였다. 초기 의열단원은 밀양 출신과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주축이었다. 김원봉・이종암・한봉근・김상윤은 길림에서 같이 동거히며 생활했던 인물들이었다. 전통적인 지연, 학연의 친밀함이 배신을 가장 안 할 동지였기 때문이다.

김원봉의 기억과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박재혁은 의열단의 초기 단원이 아니다. 그런데 『유자명 수기』의 "의열단의 내력과 반향"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이 폭발한 뒤에 황상규(黃尙奎), 곽경(郭敬, 곽재기), 김약산(金若山, 김원봉), 윤석주(尹石冑, 윤세주), 한봉근(韓逢根), 박재혁(朴在爀) 등은 중국 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유자명은 박재혁을 의열단 창단 인물로 보고 있다.

유자명은 의열단에 무정부주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는 1921년에 천진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이래 의열단의 활동에 이론을 제공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활약하였다. 그는 후에 《의열단간사(義烈團簡史》를 저술할 만큼 의열단 활동에 깊숙이 간여하였다. 유자명은 의열단 창단 조직원으로 박재혁을 거론하고 있다. 다만 박재혁을 '밀양 출신'으로 오해하고 있다. 의열단의 「밀양진영폭탄 사건」 관련자로 "황상규, 윤석주, 한봉근, 박재혁 등은 밀양 사람으로서 폭탄을 그들의 집까지 갖다 놓고 쓰기로 했던 것이다"라고 이 사건 연루자로 박재혁을 거론하였다. 유자명의 기억은 박재혁이 밀양 사람이라는 오해로 인해 부산경찰서 투탄도 밀양경찰서 투탄으로 착각하게 하였다.

부산경찰서 투탄 이후 신문 보도에 따르며, 박재혁은 김원봉으로부터 1920년 3월에 독립운동에 가맹하라는 권고를 받았으니 그때에는 가사 사정으로 거절하였다. 이것은 사실인지 혹은 경찰의 신문에 박재혁이 거짓 답변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3월 이전에 박재혁과 김원봉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의열단 가입을 권유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신뢰할 동지라는 뜻이다. 만약 유자명의 기록은 일부 기억의 혼돈이 있지만, 초기 의열단 역사인 《의열단간사(義烈團簡史)》를 쓴 유자명이다. 유자명에 따르면, 박재혁은 의열단 초기부터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의열단은 일단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7가살과 5파괴 대상이었다.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의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왜적의 밀정, 반민족 토호열신(악덕 지방유지)이다. 그리고 '5곳의 파괴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들이다. 또 의열단은 구축왜노,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의 강령에서 보듯이 민족해방과 계급투쟁을 함께 이루고자 했다. 또 민중 직접 혁명을 추구하고 테러주의에 입각한 반(反)권력적인 자유연대(아나키즘)적 경향이 있었다.

의열단은 1919년 12월 제1차 의거를 준비하면서 임시정부를 찾아가 협의하였다. 하지만 1920년 임정의 독립노선과 다른 독자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은 창립부터 '급진단', '급진대'로 일제의 감시망에 포착되었다. 하지만 천하에 정의를 맹렬히 실천하려 한 의열단은 1920년 3월부터 본격적 작탄투쟁을 시도하였다. 의열단은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관을 비롯하여 일제의 시설물과 요인, 밀정 등을 파괴 또는 암살하려 하였다. 1920년 3월의 밀양폭탄반입사건(진영사건), 9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12월의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사건을 잇달아 일으켜 일제에게 의열단은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고 조선 민중으로부터는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1922년 신채호가 의열단 선언문으로 쓴 「조선혁명선언」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의열단은 자치와 문화운동이 아니라 민중의 직접 혁명을 추구하였다. 조선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강도 일본을 쫓아내야 하며, 쫓아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혁명으로 할 뿐이다. 그 이외의 방법은 없다. 외교는 국가나 민족의 사활문제를 외국인의 처분 결정을 기다리는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언제까지 '준비! 준비!'를 외칠 것인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민중혁명, 직접 혁명이다. 폭력-암살-파괴-폭동을 통하여 일제의 시설을 파괴하고, 친일 관리와 친일 모리배를 처단하여야 한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리하여 고유적 조선, 자유적 조선, 민중적 경제; 민중적 사회, 민중적 문화 건설을 추구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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