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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박동진 판소리 명창-명고대회
 공주 박동진 판소리 명창-명고대회

[인터뷰①] 34년간 녹음한 소리만 450여개... "민속학자는 내 팔자" http://omn.kr/1srf2

공주 문화원 부원장을 지낸 민속학자 이걸재(64)는 34년 동안 충남 공주에서 채록한 450여 곡의 소리와 기존에 있던 150여 곡을 합쳐 책 <계룡산의 울림 공주의 소리>와 <금강 여울 공주의 소리>를 출간했다. 

- 판소리꾼 박동진 명창과 친하셨다던데,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겠어요.

"제가 공주시청 문화관광과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박동진 선생이 공주로 오시고 난 뒤 시에서 '박동진 명창 명고 대회'를 만들었어요. 제가 담당자였죠. 근데 명칭을 놓고 추진위원장인 심우성 선생과 박동진 선생이 정면으로 부딪힌 거예요. 당시 공주민속극박물관 관장인 심우성 선생은 '박동진 명창 명고 대회'로 해야 된다고, 박동진 선생은 "내가 살아있는데 왜 내 이름을 거기다 거냐. 나를 우상으로 만들 셈이냐. 나는 한 사람의 소리꾼일 뿐이다. '공주 명창 명고 대회'로 가자"고 하고.

그런데 그 명칭을 확정 짓는 날 박동진 선생이 안 오신 겁니다. 박동진 선생의 제자였던 김양숙씨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서울가셨데요. "오늘 명칭을 확정지어야 되는디, 선생님 안 오셔서 전부 기다리구 기셔유" 했더니 계룡저수지에 낚시 가셨데요. 바로 운전하구 달려갔더니 붕어 낚시대 몇 대 펴 놓고 앉아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 가~" 했더니 "안 가 이 놈아. 나를 어디다 취직시키려구" 하는 거여. "아니, 가서 멱살잽이를 하던 싸움을 하던 오늘 정해야 한다구요." 설레발을 쳤더니 "집에 가서 옷이나 갈어 입구 가자" 하시데요. 그래서 "벼슬이 낮어두 시장이여. 기다리구 앉었는디 무슨 옷이여." 그라구는 차로 모시고 왔죠. 다수결로 하니까 박동진 이름 넣지 말자는 사람이 혼자 밖에 없어 '박동진 명창 명고대회'로 정해졌지요."
  
이걸재씨는 소리꾼 장사익씨의 권유로 노래를 시작했고, 천재 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지도로 제대로 된 소리꾼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이걸재씨는 소리꾼 장사익씨의 권유로 노래를 시작했고, 천재 피아니스트 임동창씨의 지도로 제대로 된 소리꾼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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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가 재미있고, 충청도 사투리도 구수하네요.

"하나만 더 얘기 할까요. 박동진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 서울삼성병원 장례예식장에 모셨다고 해서 문상을 갔어요. 문상을 갔는데 박 선생님이 안 보이는 거에요. 선생님은 뵙고 내려와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둘레둘레 찾는데, 이 분이 실의에 빠져셔 내빈을 모시는 두 번째 방벽에 쪼그리고 앉아 계시데요."

- 사모님이 별세했으니 많이 힘들겠지요.

"선생님이 오죽하면 문상객에게 인사도 못하나 싶었어요. 그대로 두고 내려오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제가 무릎으로 쾅쾅 소리나게 호들갑을 떨면서 선생님 앞에까지 기어갔어요. 선생님 얼굴 앞에 내 얼굴을 대고는 "문상 왔어요"하고 인사를 한 게 아니라, "인져 선생님 차례다 잉." 그러니까 그 소리는 듣기 싫으셨나 "뭐여 이놈아!" 하구 소릴 질러요. 그래서 "뭐여는? 내가 여러 번 봤네. 금슬 좋은 분들 연세 많아 돌아가시면 1년 못 되어서 따라 가시데." 하구는 "인져 선생님 차례 맞다구." 하니께 "이런 잡놈이" 그러시더니 제가 왜 그랬는지 느낌이 온 거예요. 일어서더니 하늘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웃으시데요.

그리고는 "정신 차리라고?" 하시는데 "아니, 그런게 아니고 진짜가 그려. 선생님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시면 1년 안에 돌아가신다." 하니께 "그려? 그람 내가 몇 년이나 살어주랴." 하셔요. 그래서 "10년이 길어 20년이 길어. 나이가 백살 밖에 없나?" 했더니 "7년은 더 살어 줄께." 그러시데요. 그래서 제가 "짧어. 조그만 더 써. 10년만 더 써!" 했더니 "그게 사람 마음대로 되냐 이놈아" 하세요. 그리고는 문상객들에게 인사하셨어요. 그런데 7년 못 채우고 돌아가셨지요. 이분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내가 소리하다가 무대 위에서 죽는 복만 받으면 좋겠다." 하셨는데 그 복은 못 받으셨지요."

- 그런 숨겨진 이야기가 있었군요.

"박동진 선생에 대한 추억이 참 많아요. 하루는 선생님에게 "득음이 뭐여?"하고 툭 여쭤봤어요. 박 선생님 왈 "득음 득음 하는디 자고 일어나서 헛기침 세 번만 하고 소리를 해도 최상의 소리를 뽑아 낼 것, 자기만의 목청을 가지고 있을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웃게 하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그 세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 아주 재미있는 얘기들이 많으시네요. 또 인기 소리꾼 장사익 선생하고 인연이 있다고요?

"제 스승인 심우성 선생의 인연으로 장사익 선생을 알게 되었고, 장사익 선생이 공주민속극박물관에서 공연할 때 제가 사회를 봐서 친해졌어요. 제가 민요 채록을 해서 좋은 노래들을 정리해 음원을 장사익 선생에게 보내 드려요. 그걸 보내드린 이유는 그 분이 가객이니까 그 소리를 좀 불러주세요 해서 보내드렸는데 안 해요.

그러다가 1997년쯤인가 민속극 박물관에 장사익 선생이 왔길래 제가 "선생님, 제가 보내드리는 노래를 왜 안해요?" 하니까 "동상. 그거 나더러 노래 부르라고 보낸겨?" 그래요. "그람 나도 시간 들여서 채록하고 돈 들여서 정리하는 건디. 한 곡이래두 맘이 드는 소리가 있으면 요새걸루 정리해서 불러 달라는 거지" 하니까 "나 그거 못햐. 그 소리가 좋은 줄 아는 사람은 동생뿐이다"며 "쫄밋쫄밋하다가 후회하지 말구 니얄부터 햐." 그러시데요. "니얄부터 햐." 그 말이 참 어렵게 들립디다. 니가 안하면 아무도 안 할 것이다. 해서 북통 짊어지고, 녹음기 하나 가지고 금강다리 밑으로 내려 갔어요. 거기서 혼자 연습했어요. 저는 공주에 있는 소리들 중에 노랫말 좋고 음악성 좋은 노래가 살아남기를 원해서 노래를 시작한 거죠."
  
이걸재씨는 스승인 심우성 선생의 혹독한 지도와 가르침 덕분에 민속학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 의당집터 다지기 전시관에서  이걸재씨는 스승인 심우성 선생의 혹독한 지도와 가르침 덕분에 민속학자로서의 올바른 자세와 정신을 갖출 수 있었다고 한다.
ⓒ 조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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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사익씨 권유로 소리를 시작한 건가요?

"그랬지요. 아이고, 생각해봐요. 그때는 공무원들이 야근을 밥 먹 듯 할 때요. 시간외 근무수당도 없을 때, 저녁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서 야근하다가 아홉시나 열시에 퇴근할 때요. 장사익 선생의 그 말이 없었다면 제가 소리한다고 흉내 내지 않았을 거에요. 너무 바빴거든요."

- 천재 피아니스트 임동창 선생과도 인연이 있다고요.

"스승인 심우성 선생님은 소리를 하고 싶으면 제대로 해라며 임동창 선생을 만나라고 하시데요. 그런데 전화를 해도 만나주지를 않아요. 그러다 기획자 한 분이 고택음악회를 열었는데, 임동창 선생과 저랑 함께하는 공연을 짰어요. 그 인연으로 임동창 선생을 처음 만났는데, '내가 평생을 집중해서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천재다'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분이 제 소리의 장단점을 집어주시고, 노래하는 방법을 알려주셨어요. 이분이 일러준 대로 연습하고는 1년 만에 대전에 있는 마당 소극장에서 하루에 1시간 반씩 20일간 공연을 소화해 낼 수 있게 되었어요."

- 좋은 가르침을 받았군요.

"임동창 선생과 두 번째 공연 때 저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시골분들을 데리고 가서 연습을 했어요. 임 선생이 제가 회원들 연습시키는 것을 보더니 "예술의 완성을 위해서 사람을 잡지는 말아라, 즐겨라"고 말해요. 그 분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놀이예요. 그래서 저도 그 이후로 노래를 즐기기 시작한 거예요. 저와 함께하는 분들이 대부분 노인들인데, 연습을 즐기기 시작하니까 실력이 빨리 늘어요. 임동창 선생이 저에게 끼친 영향은 굉장히 큽니다."

- 이야기 중에 계속 스승인 심우성씨가 나오는데 어떤 분인가요.

"심우성 선생은 민속학자면서 1인 무언극 배우였어요. 일본 관동 대지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었잖아요. 그 내용을 심우성 선생이 아시고 백기완 선생과 돈을 모아서 큰 종을 만들어서 일본 관동 지역에 갔어요. 삼발이로 큰 종을 매달아 놓고 웃통을 벗고 그 종을 하루 이틀 몸으로 쳤어요. 그리고 3일째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왔을 때 "내가 한국 사람인데, 관동대지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위로행사도 하지 못해서 종을 몸으로 쳐서 그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라고 기자회견을 하신 거예요. 그 일로 재일동포들에게 전설이 되었지요."

- 심우성씨와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요.

"이 분은 제 고향 사람이세요. 우리 가족도 다 알아요. 이 분이 공주 민속극 박물관 관장으로 내려 왔을 때, 제가 공주시청 문화관광과에 근무하면서 민속 채록을 하고 있을 때라 조사한 것을 정리해서 선생님께 감수를 받았어요. 제가 마을 사람들이 쓰는 사투리를 표준어로 고쳐 가지고 가면 "민속에서는 그 마을에서 쓰는 말이 표준어다"며 혼나기도 하고, "조사할 때 민속만 조사하지 말고 마을의 역사와 유래 등 일반 민속을 포함해 조사해야 그 민속의 정서가 제대로 나온다"고 가르침을 주셨어요.

이 분이 저에게 알려주신 것은 민속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의 '지식 싸움'이 아니라 얼마나 소중히 다루고 있느냐의 '의식 싸움'이라는 거죠. 또 하나, 민속은 그 민족의 잘난 놈들인 귀족들이 한 것이 아니고 보통사람들이 행했던 것이기 때문에 이를 초라하게 생각하는 놈은 민속하면 안 된다고, 그걸 가르쳐 주신 거예요. 심우성 선생님은 민속을 대하는 자세와 정신에 대해서 큰 가르침을 주셨지요."

태그:#이걸재, #심우성, #박동진, #장사익, #공주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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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tracking photographer. 문화, 예술, 역사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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