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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포스터
ⓒ 홍시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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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늦은 밤 지방 소도시로 장시간 자동차를 운전해간다. 새벽녘 임시 숙소에서 전형적인 사무직 노동자 복장을 한 여성이 빨대 꽂은 팩소주를 마시면서 절망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에 가득 차있다. 주인공인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지방 하청업체에서의 1년간의 시한부 파견근무를 명령받았다.

이 장면에서 나는 언젠가 사무직 여성 노동자가 오지에 있는 현장으로 파견 발령이 났으나 개의치 않고 그 상황을 극복해 최고의 현장 노동자 가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태겸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그 뉴스 때문이라고 한다.     

동기들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고 사내 모든 일에 일등이던 박정은 대리는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권고사직을 종용받다가 타협으로 1년만 하청업체에서 일하고 돌아오라는 파견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듯 내려온 낙후된 지방 소도시의 송전탑 관리하청업체는 소장 포함 직원이 고작 네 명뿐이고,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원청에서 좌천되어 온 사무직 직원을 반기는 사람 은 아무도 없다. 사무직이던 정은은 작업관리 대장을 만드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하지만 돌아오는 동료들의 말과 시선은 차갑다.

게다가 하청에서는 파견노동자의 인건비까지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원청의 인원감축방침은 원래 일하던 직원들의 일자리까지 위협한다. 파견 내려온 정은을 잘라내려는 목적이지만 근무평가 결과에 따라 누가 해고될지 모를 일이다. 급기야 원청은 평가관을 내려 보내 하청업체 평가를 실시한다.

정은은 꿋꿋하게 자신도 현장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밤늦게까지 무거운 전기 작업 도구들과 씨름해가며 스스로 일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작업을 나가려고 하는 순간 자신이 입을만한 작업복도 없으며 심지어 현장 노동자들에게 특수 방전 작업복이 지급되기는커녕 그것을 자비로 구입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청의 갑질과도 같은 평가과정, 노동자의 안전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행태는 공공기관의 민영화와 다단계 하청구조나 노동자를 어떤 식으로 쥐어짜고 위험으로 내모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는 게 그냥 알바에요"

정은이 자신의 일을 혹은 '자리'를 찾지 못 하던 처음 며칠, 남성 동료들은 작업장 구석 칸막이 옆에 조그만 책상을 배치해둔다. 이미 원청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뺏기고 사무실 바깥 복도 어딘가에 놓인 좁은 책상에 앉아서 일하던 그녀에게는 파견 명령을 받던 그 시간이 소환된다.

사무직 여성에게 현장직 남성들의 일이 주어질 리는 만무하고, 남성 동료는 자신들이 식사하고 난 자리를 치우는 것이 그녀의 일이라고 여긴다. 정은은 더욱 오기가 난다. 일을 주지 않는다고 지방노동위에 신고할 생각까지 한다.

성별에 따라 해야 할 일의 종류를 구분하려던 남성 동료들의 잘못된 인식만큼이나 견고하게 여성을 노동 현장에서 차별하는 것은 바로 노동의 환경 자체다. 여성 노동자의 신체 사이즈에 적합하지 않게 만들어진 작업복, 작업도구, 송전탑에 오르는 발판 사이의 폭조차도 남성 노동자의 신체에 맞추어져 있다.

모든 것이 여성 노동자를 작업의 환경으로부터 배제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래도 여성이 한 걸음도 그 안으로 들어설 수 없도록 만들어진 강고한 남성 중심의 노동 환경은 정은의 끈질긴 노력과 동료들의 수긍으로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동료 중 '막내'씨는 낮 시간에는 송전탑 관리 일을 하고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 편의점이 끝나면 밤늦게 또 대리운전까지 한다. 아내 없이 딸 셋을 키우는 그는 적어도 쓰리잡 이상을 뛰고, 그러다보니 직장에 출근해서도 늘 피곤해 시간이 날 때마다 쪽잠을 잔다.

그런 것이 또 그의 근무평점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잠이 부족할 정도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데도 삶은 풍요해지지 않는다. 아니, 이미 불안정한 삶 자체는 끊임없이 알바와 부수입을 강제한다. 사는 게 알바와 다름없다. 그런 막내씨가 두려운 것은 일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서운 거는 해고예요. 해고되면 알바만 해야 되니까."

죽음보다도 직장 없이 불안한 삶이 지속되는 것이 더 공포스럽다는 것은 그것을 겪어 본 이들, 그것을 겪고 있는 이들, 혹은 그것을 곧 겪게 될 이들이기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해고는 죽음이라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두려움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해고든 사망이든 그게 뭐가 달라요."

퇴근 후 편의점에서 늘 정은과 마주치던 막내씨는 원청의 실태 점검 평가 기간에 정은이 겪는 어려움을 알고 알바로 그녀에게 일을 가르친다. 평가에서 자신이 낮은 점수를 받고 해고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동료를 위해 시간을 내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약까지 먹어가며 고소공포증을 극복해보려는 정은은 처음엔 송전탑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 처음엔 동료의 작업이 다 끝날 때까지 1미터도 올라가지 못했지만, 막내씨 덕분에 고소공포증도 극복하고 일도 배우면서 삶의 활기를 조금씩 찾아간다.

동료들과의 뜨거운 연대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한 장면. 정은의 끈질긴 노력과 동료들의 수긍으로 정은은 '여성' 노동자인 자신을 배제하는 노동 환경에 한 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한 장면. 정은의 끈질긴 노력과 동료들의 수긍으로 정은은 "여성" 노동자인 자신을 배제하는 노동 환경에 한 걸음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 홍시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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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을 내려온 지 90일째 되는 날, 전기 작업을 하기 좋지 않은 흐린 날씨지만 응급상황이라 작업팀은 송전탑 작업에 나선다. 하지만 송전탑에 오른 막내씨는 그만 사고를 당해 사망하고 만다. 장례식장으로 걸려온 원청 동료의 전화는 근무평가가 낮은 막내씨만 제치면 정은이 직장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정은에게 그의 죽음은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의 죽음이다. 동료의 죽음이자 나의 죽음. "우리가 제발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원청 관리자들에게 외치는 정은에게 파견이든 하청이든 구분은 의미가 없다. 오직 동료밖에 없다.

정전 때문에 장례식장에서 부패해가는 동료의 시신, 섬마을이라 가볍게 무시되는 전기의 혜택을 정은은 이제 두고 볼 수 없다. 그녀가 이미 해고되었다는 원청 관리자의 말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해고 통보, 만류하는 소장, 흐린 날씨, 바람에 흔들리는 송전선,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혼자의 힘으로 송전탑에 올라 기어코 전선을 연결해낸다. 그들이 나를 해고하 더라도, 자신은 결코 스스로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 굳은 결심.

통쾌한 복수나 반전을 보여주는 결말은 없다.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이 영화에는 정말 노동의 현장에서 발생 가능한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있다. 민영화, 권고사직, 하도급 파견노동의 차별, 노동자와 노동자 사이의 무한 경쟁, 관리감독이라는 명분으로 이루어지는 본사의 갑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불안정한 삶.

정말 당장 포기하고 싶을 만큼 노동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나를 둘러싸고 옥죌 때에도 나는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정은에게서 강철처럼 단련되는 삶의 의지, 노동의 의지를 읽는다.

매일 아침 그들이 외치던 "우리는 생명, 우리는 빛"이라는 현장 구호는 노동과 삶의 가치를 스스로 드높이고 긍지를 갖게 만드는 주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과 삶의 가치를 무너뜨리고 손쉬운 해고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들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는 동료들과의 뜨거운 연대처럼 송전탑을 통해 저 멀리까지 이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김상민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4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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