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출아, 너는 가슴에 품은 게 있냐? 지금이다. 아직 안 늦었어."

최근 드라마 <나빌레라> 속 70대 두 친구의 대화에 많은 이들의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특히 '나이 들어 이제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 자포자기 하고 있던 이들은 더더욱이요. '꿈을 좇는 당신에게'에선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몸소 보여준 영화-드라마 속 캐릭터들을 살펴봅니다.[편집자말]
 줄리(에이미 아담스)와 줄리아(메릴 스트립)

줄리(에이미 아담스)와 줄리아(메릴 스트립)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줄리 & 줄리아>(2009)는 두 여성의 자아실현에 관한 영화다. 작품은 반세기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뉴욕과 파리에서 각각 자신의 삶을 일구어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로 보여준다. 

나이 때문일까. 나의 시선은 중년의 줄리아에게로 향한다. 줄리를 잠깐 소개하고 줄리아의 삶을 집중 조명하기로 하자. 줄리는 2002년 30세 생일을 맞았다. 남편과 단둘이 뉴욕 퀸즈에 살고 있다. 9.11관련 문제를 처리하는 말단 공무원인 그녀는 온갖 민원을 처리하느라 저녁 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다. 대학시절 교지 편집장이자 성공 영 순위로 꼽히던 그녀였는데... 그녀의 유일한 탈출구는 요리다. 요리할 때만은 불확실한 자신의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녀는 줄리 차일드의 요리 레시피 524개를 1년 안에 만들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블로그에 올린다. 가장 좋아하는 것과 가장 잘하는 것의 조합이다. 그녀는 기쁨과 좌절과 끈기가 잘 버무려진 1년을 보낸 결과, 유명세를 타고 작가로 발돋움한다.

1949년 줄리아 차일드의 삶

줄리의 롤 모델이었던 줄리아 차일드는 1949년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파리에 도착한다. 그녀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하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르사유 궁전과 같은 집에서 사랑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 성격도 좋다. 까칠한 프랑스인들을 가장 다정한 사람으로 여길 정도다. 이런 그녀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삐딱남'조차 그녀를 보면 웃는다. 그녀의 프랑스어 실력이 한두 마디 인사를 건넬 정도인데도 말이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그녀는 세계 최고의 도시 파리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알콩달콩 살다가 남편의 임기가 끝날 때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남편에게 묻는다.

"난 뭘 하면 좋을까요?"

어! 마냥 행복해 보였던 그녀도 이런 고민을 하다니.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설에 의하면, 그녀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일까.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욕구라고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잘하는 것,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통해 개인적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싶은 욕구다.

그녀는 결혼하기 전, 남편이 일하는 정부 기관에서 문서 작성 업무를 담당했었다. 40세가 되기까지 달걀 삶는 법도 모른 채 말이다. 지금은 일을 그만둔 상태다. 그렇다고 다시 정부 관련 일을 하기는 싫다. 그 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부 요직에 있던 아버지가 권유해서 공무원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고 대사관 직원 부인들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도 그녀의 체질이 아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

줄리에게서 나의 모습이 보인다. 나도 사회적 요구에 순응하여 엄마요, 아내로 산 세월이 벌써 25년이다. 비교적 순탄한 일상을 보내며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들의 성취가 나의 깊은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줄리아처럼 항상 웃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까지는 웃을 수 없었다.

40대가 돼서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은 줄리아
 
 코르동 블루 요리학교에서 실습 중, 제일 빠르게 양파를 썬 줄리아.

코르동 블루 요리학교에서 실습 중, 제일 빠르게 양파를 썬 줄리아.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줄리아는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모자 만들기 강습도 듣고, 브리지 게임도 배워본다. 하지만 그녀의 취향, 적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뭘까. 그녀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한참 마시멜로와 냉동식품이 유행하던 미국과는 달리 프랑스 요리는 먹을 때마다 감탄이 쏟아진다. 그녀는 프랑스 요리를 배워보기로 한다.

전문 요리 교실은 벽이 높다. 수강생들이 전부 미국 남자 군인이다. 게다가 그녀는 칼질도 서툴러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분위기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집에서도 쉬지 않고 칼질 연습을 한다. 양파를 산더미처럼 썰어놓는 바람에 집안을 매운 맛으로 채워놓기도 한다. 그녀의 이런 노력은 결국 열매를 맺는다. 칼질이든 프라이든 뒤집기든 다른 수강생들의 실력을 앞지른다. 줄리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이런 면이 있는 줄 나도 몰랐어."
"난 천국에 있는 기분이야. 평생 할 일을 찾아왔는데..."


줄리아는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에 자신을 쏟아붓게 된 것이다. 그것을 자아실현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하늘이 내린 소명대로 사는 것, 본래 가지고 태어난 적성을 살리는 것, 자기답게 사는 것, 꿈을 이루는 것 등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하게 되었을 때 천국에 있는 기분이란다. 

줄리아는 요리 전문학교를 졸업하여 요리 선생 자격증을 따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요리사가 없는 미국 여성들을 위한 프랑스 요리책을 출판하고 싶어 한다. 그 당시 출판업계는 여성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또한 사진이 들어가는 요리책을 발간하는 건 비용이 만만치 않아 출판사를 찾기 어려웠다. 8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상황 앞에서 낙천적인 줄리아조차 낙담한다. 하지만 남편 폴은 그녀를 북돋운다.

"누군가 당신 책을 출간할 거고, 당신 책을 읽고 진가를 깨달을 거야. 당신 책은 훌륭하니까. 당신 책은 천재적이고 당신 책은 세상을 바꾸게 될 거라고. 내말 믿지?"

남편 폴의 믿음이 행운을 가져온 것일까. 줄리아는 결국 주디스라는 여성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 Mastering the Art of French Cooking >이란 제목의 책을 출판한다. 이 책이 디딤돌이 되어 줄리아 차일드는 프렌치 셰프로서 미국 요리 역사의 전설이 된다.
 
매력적이고 매력적인 줄리아 이야기
 
 출판된 요리책을 받아보고 감동하는 줄리아와 그의 남편 폴

출판된 요리책을 받아보고 감동하는 줄리아와 그의 남편 폴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줄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의 옆지기가 떠올랐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번듯한 남자로 살아남고자 50여 년간 쉼없이 달려왔다. 퇴임을 몇 년 앞둔 그는 남은 인생 후반전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고 있다. 자기가 진짜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 뭔지 탐색 중이다.

부엌에서 여러 가지 반찬과 간식을 만들고, 왕복 3~4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 농장으로 가 땅을 파고 씨를 뿌리기도 한다. 포클레인 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시험장을 들락거린다. 이런 과정 중에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얼마 전 카메라에 잡힌 그의 얼굴은 봄꽃처럼 화사했다.

"미랄아, 아빠 변하지 않았냐? 옛날에는 사진 속에 혼자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 좀 봐봐! 아빠 엄청 웃고 있잖아!"
"맞아, 엄마! 아빠가 많이 변했어."


요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인다. 어떤 사회적 성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데 말이다. 그 과정에서 맛보는 즐거움도 큰 것이리라. 물론 줄리나 줄리아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며 어떤 결실을 맺고 사회적인 성취에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나도 몇 년 전 부분적으로 엄마 파업을 선언한 후,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일본어 번역을 해볼까 싶어 학원에 달려가기도 했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라인댄스를 추고, 기타를 쳐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렇게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나도 줄리아처럼 천국에 있는 기분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순간순간의 기쁨을 만끽한다면 그것이 나답게 사는 것이요, 꿈을 이루는 것이요, 자아실현이 아니겠는가. 꿈을 이루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블로그, 브런치에도 실리는 글입니다.
중년의 꿈 중년의 자기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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