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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출판사에서 일하면서 40년간 약 2천 권의 책을 펴낸 강맑실 대표가 유년 시절 살았던 집 이야기를 담은 책 <막내의 뜰>을 펴냈다. 저자가 수채화 삽화도 직접 그려 넣은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막내는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열 개의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교직에 몸담고 있어 이사를 자주 다녔고, 덕분에 막내는 무려 10개의 집에 얽힌 추억을 갖게 됐다. 막내 강맑실은 두 번째 문장을 이렇게 썼다.
 
그 가운데 일곱 개의 집에 머물러 있던 유년의 기억을 불러내어 모두의 유년과 손잡게 하고 싶었다.

유년의 기억을 불러내려는 저자의 바람은 <막내의 뜰>을 읽은 많은 독자에 의해 실현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막내의 뜰》에는 저자 강맑실이 유년 시절에 살았던 일곱 개 집의 도면이 나온다. 사진은 막내 강맑실이 태어나서 네 살까지 살았던 전남여중, 전남여고 관사의 도면인데, 저자가 직접 그렸다.
 《막내의 뜰》에는 저자 강맑실이 유년 시절에 살았던 일곱 개 집의 도면이 나온다. 사진은 막내 강맑실이 태어나서 네 살까지 살았던 전남여중, 전남여고 관사의 도면인데, 저자가 직접 그렸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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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과 손잡게 하는 책

<막내의 뜰>에는 교육자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소소하면서 감칠맛나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펼쳐진다. 교장으로 재직했던 막내의 아버지는 우리가 학창 시절에 흔히 봤던 평범한 교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과서에 한자를 섞어 쓰던 시절에 자녀의 이름을 맑실, 별(언니), 밝(오빠) 등의 순 우리말로 지은 것만 봐도 그렇다.

막내의 아버지는 자녀들과 등산을 즐겨 다녔는데 포도주를 수통에 담아 배낭에 챙겨 넣고 어린 막내에게도 권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님들은 성찬식 때 쓰는 포도주는 절대 술이 아니라 여겼다. 막내의 어머니 역시 일꾼들에게 막걸리를 주면서 막내에게도 얼음과 콜라를 탄 막걸리를 권하기도 했다. 얼음을 채우고 콜라와 흙설탕을 넣은 막걸리를 단숨에 마셔 버린 막내에게 일꾼들이 "와따, 어린 것이 술 잘 묵네"라고 말하자 엄마는 "머시. 이거이 술이간디 음료제"라며 맞받아쳤다.

이 책에는 이렇게 맛깔난 이야기들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이것 이상으로 나를 잡아 끈 것은 저자가 직접 그려 넣은 일곱 개의 집(적산가옥까지 포함하면 여덟 개의 집)의 도면이었다. 강맑실 대표는 일곱 개의 집에서 벌어진 유년의 은밀한 기록을 직접 세밀하게 그린 도면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일곱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서 네 살까지 살았던 전남여고 관사, 다섯 살 때 지낸 광주제일고등학교 관사, 여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 머문 성전중학교 관사…… 열한 살부터 살았던 누문동 한옥까지.

막내가 태어나서 네 살까지 살았던 전남여고 관사의 도면에는 아버지 서재, 할머니 방, 아버지와 엄마 방, 오빠들 방, 언니들과 막내 방, 다다미방, 벽장, 찬방, 부엌, 마루, 툇마루, 목욕탕, 창고, 화장실 등등이 나온다. 관사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1950년대 집치고는 매우 다양한 공간이 등장한다.
  
40년 동안 약 2천여 권의 책을 펴낸 사계절 출판사 강맑실 대표가 직접 쓴 첫 번째 책. 유년 시절의 집과 가족 이야기를 담았다.
 40년 동안 약 2천여 권의 책을 펴낸 사계절 출판사 강맑실 대표가 직접 쓴 첫 번째 책. 유년 시절의 집과 가족 이야기를 담았다.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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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집의 구조를 상상하다

<막내의 뜰>에 나오는 집의 도면을 몇 장 살펴보다 나도 모르게 60년(아니 벌써!!) 전에 태어난 경기도 파주 시골집의 구조를 상상해봤다. 파주의 미군 부대에 취직한 아버지는 부대 근처 산기슭에 자리한 큰말이라 불리던 작은 마을의 농가에 세 들어 살았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결혼해서 충청도 할아버지 댁에서 반년 정도 살다가 쌀 한 말과 간장 한 병을 들고 파주로 이사 왔고, 몇 달 안 지나 나를 출산했다고 한다. 한 살에서 서너 살까지 세 들어 살던 파주의 첫 번째 집에서 떠오르는 장면은 툇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던 주인집 할머니의 어렴풋한 모습뿐이다.

세 살 때 큰말 건너편 새터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서 대여섯 살까지 살았다. 방 하나에 부엌이 달린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모두 다섯 개의 집(파주, 안양, 서울)에서 살았는데, 새터에서 태어난 여동생을 포함한 네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았다.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서울 신림동으로 이사한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독방을 차지하고 생활했다.
  
막내 강맑실은 여덟 살에서 아홉 살까지 광주고등학교 관사에서 살았다. 나는 이 시절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살펴봤는데, 그 이유는 내 유년의 기억 중 동화나 소설처럼 극적인 장면이 많이 떠오르던 때가 바로 이 나이 무렵이기 때문이다.

막내는 이 무렵에 학교 오빠들이 "한일 굴욕 회담 반대!"라고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놀래 집까지 헐레벌떡 뛰어갔다. 막내의 아버지는 학생들이 교내에서 시위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권에 밉보여 가을 학기에 해남에 있는 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예닐곱 살 때쯤 파주시 법원리 사거리에 있는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왔다. 미군 부대 노무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돈을 모아 샀다는 이 집에는 가운데 꽃밭이 있었고, 방도 네 개씩이나 됐다. 하지만 우리 네 식구는 여전히 방 하나에서 살았고, 나머지 방은 모두 세를 줬다.

그중 하나의 방에는 미스 조라는 누나가 세 들어 살았는데 수시로 나를 데리고 극장을 갔다. 박노식, 허장강 등등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를 심심찮게 봤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맘씨 착한 미스 조 누나는 밤이면 클럽에 나가고 새벽에 퇴근했던 것 같다.

파주 법원리에는 미군들이 춤추는 클럽이 있었다. 나를 포함해 그 동네 코흘리개들은 클럽 앞에서 미군에게 '기브 미 초콜렛'을 외쳐 댔다. 가끔 키다리 미군이 술에 취해 십 원짜리 지폐를 뿌렸고 운이 좋아 지폐 한 장 주우면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멀리 미군들이 비행기에서 낙하산 타고 내리는 걸 보면 구경하러 간다며 숨차게 쫓아가기도 했다. 동네 아줌마들이 용주골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놀리는 말에 속아서, 친엄마를 찾아 용주골 가는 버스에 올라탔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막내의 뜰》을 읽고 필자는 60년 전에 태어난 집의 구조를 알고 싶어서어머니에게 도면을 그려 달라 부탁을 했다. 위 사진은 어머니가 그린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던 세 개의 집 도면 원본에 필자가 설명을 달은 것이다.
 《막내의 뜰》을 읽고 필자는 60년 전에 태어난 집의 구조를 알고 싶어서어머니에게 도면을 그려 달라 부탁을 했다. 위 사진은 어머니가 그린 경기도 파주에서 살았던 세 개의 집 도면 원본에 필자가 설명을 달은 것이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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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려준 옛날 집의 평면도

강맑실 대표가 책 안에 직접 그린 도면을 보다가 나도 따라서 꼭 해보고 싶은 게 하나 생겼다. 유년 시절에 살던 집의 도면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태어나 이삼 년간 살던 첫 번째 집의 구조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두 번째 집 역시 어렴풋이 떠오를 뿐 정확하게 그릴 수는 없었다.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파주에서 살았던 세 개의 집 도면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어머니는 40년 전에 직접 도면을 그려 지은 단독주택에서 홀로 거주하신다. 어머니는 6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파주 천현면 대능리의 집 평면도와 인근으로 이사한 두 번째, 세 번째 집의 그림을 그린 뒤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셨다.

엉금엉금 기어다니다 걸음마를 배웠을 첫 번째 집의 구조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대문 앞에 느티나무가 서 있던 두 번째 집에서는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엄마가 젖 뗀다고 고추장을 발랐다는데 그때의 충격적인 매운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느 날인가는 그 허름한 초가집에 도둑이 들어 옷가지를 훔쳐갔다고 한다.

4~5년 전쯤 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 파주로 추억여행을 간 적이 있다. 파주의 세 개의 집과 2년을 다녔던 ㅊ초등학교, 학교 소풍으로 자주 갔던 율곡 묘 등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법원리의 세 번째 집 주변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골목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싶은 남루한 동네였다. 전쟁놀이 하며 뛰어놀던 그 넓은 골목길이 차 한 대 다닐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말에 놀라 아버지와 동네의 여러 집이 서둘러서 파주를 떠났다. 그때나 지금이나 법원리, 특히 내가 살던 동네는 개발과는 거리가 먼 변방, 철책선에서 가까운 변방이 아닌가 싶다.

법원리 사거리에서 미군 부대를 지나 일이십 분쯤 걸어가면 도착하는 거리에 있던 첫 번째, 두 번째 집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함께 기억을 되살려 찾아간 큰말과 새터에는 농공단지가 들어서 있었다. 도면 속의 집들은 모두 철거된 것 같았다. 옛말에도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는데,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를 겪은 사회에서 50~60년 전에 있던 집이 사라진 건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엄마가 안고 있는 아이가 막내 맑실이다.
 엄마가 안고 있는 아이가 막내 맑실이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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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의 추억, 감정, 냄새가 담긴 집의 도면

강미선 교수(이화여대 건축학과)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은 단순한 집채 이상이고 꿈의 집적체'라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썼다.
 
기억에 의존해 직접 그린 집의 도면들은 물리적 공간만이 아닌 그 시절의 가족들, 추억, 감정, 심지어 냄새까지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사한 수채화입니다(……) 저도 지금의 나를 찾으러 유년의 집으로 떠나보려 합니다.

<막내의 뜰>에 도면이 소개된 일곱 개의 집은 지금 어떤 상태로 남아 있을까? 자기가 태어난 집, 엄마의 젖을 먹으며 크던 방이 남아 있고 그것을 바라보거나 만져볼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세상에 태어나 첫 울음소리를 내던 방을 오래 전에 상실해서 그 느낌을 상상해 보는 게 어렵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 집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 책을 참조하여 도면을 그려본다면 어떤 영화나 소설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특별한 감정에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집의 도면을 부모, 형제의 도움을 받아 그리다 보면 가족 간의 원초적 관계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해주는 최고의 선물은 저자의 말처럼 잊고 지내던 나의 "유년과 손잡게" 한다는 점이다.

막내의 뜰

강맑실 (지은이), 사계절(2021)


태그:#막내의 뜰, #강맑실, #사계절출판사,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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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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