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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전 기사 "조선은 미국을 적으로 여깁니다"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에요. 왜 내가 이동인 스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나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다가 결국 젊은 나이에 이국 땅에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동인 스님에 깊은 동병상련을 느낍니다. 앞으로 두 차례 정도로 마무리하고 내 이야기로 돌아갈까 합니다.

한영 수교 조약의 초안을 만든 사람이 바로 이동인 스님이었다고 한다면 믿어지나요? 사실입니다. 한미조약 초안을 스님이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국 이야기는 아마 금시초문일 겁니다. 이 비사는 1880년 11월 21일(양력) 주일영국대사관에서 본국의 그랜빌G.L.G. Granville 외교장관에게 보낸 기밀 문서(No. 179, Very Confidential)에 담겨 있습니다. 문서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배경을 더듬어 봅시다.  

이동인이 사토우에게 작별을 고한 것은 1880년 9월 4일이었습니다. 사토우는 이 날짜 일기에 "아사노(이동인)가 작별을 고하러 왔다. 나는 그에게 나의 오페라 망원경(opera-glass)을 이별 선물로 주었다. 그는 연말까지는 돌아올 것 같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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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우가 자신의 오페라 망원경을 선물로 준 것은 아마 그동안 한글을 가르쳐준데 대한 사례이자 정리의 표시였을 겁니다. 또한 이동인이 서양문물로 조선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한다는 것도 고려했겠요. 아무튼 그게 조선에 처음 상륙한 오페라 망원경인 셈입니다. 지금 어디에 남아 있을지…

사토우는 이동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한글 공부를 이어갑니다. 동료 아스턴(Aston, 주 고베영사)와 주고받는 편지는 주로 한글 공부에 관한 것이군요. 10월 30일 아스턴에게 보낸 편지에 흥미로운 대목이 보입니다.
 
"언젠가 조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질 것임에 비추어 조선의 고유명사를 일본식으로 쓸 게 아니라 조선말로 제대로 표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겐산' 대신에 '원산'으로, '토라이' 대신에 '동래'로 표기하고…."
 
좀 옆길로 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서양인들이 동양의 지명을 다루는 태도는 제국주의적이적인가 아닌가를 가늠해 주는 시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양인들은 원주민이 수천년 불러온 지명을 제거하고 서양식 지명을 이름을 지도에 새겨놓았죠.

이 점에 비추어 보면 영국인 사토우의 사고방식은 인상적입니다. 내 자랑같지만, 나는 조선 팔도의 모든 지명과 산과 강, 섬들의 원래 이름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 지도에 새긴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지도가 미국에 보관되어 있을 겁니다. 나중에 실물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그건 그렇고, 조선에 갔던 이동인이 동경에 다시 나타난 것은 그 해 11월 15일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두 달 남짓 만에 나타난 이동인은 도착 당일 한밤중에 여행가방을 들고 바로 사토우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깜짝 놀란 사토우는 아예 방을 하나 내줍니다. 이동인은 조선방문 중에 일어난 일을 밤새워 이야기합니다. 그 날짜 사토우의 일기입니다.
 
"아사노 동인(朝野東仁)이 갑자기 한밤중에 큰 여행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방금 막 도착했다는 그는 국왕의 개화(enlightenment)에 관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 그는 왕이 하사한 여행 허가증 (passport)을 소지하고 있었다. 국왕은 러시아의 위협에 큰 경각심을 가지고 있으며 머지않아 개화파(the liberal party)가 현재의 배외 정부(antiforeign ministry)를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 한다. 그는 우리 영국이 곧바로 가능한한 큰 규모의 위압적인(imposing) 군대를 이끌고 그곳에 가기를 열망한다. 무력 시위는 전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일개 선장의 개인 사업이  아니라 국가의 공적인 원정(expedition)임을 보여주는 것이어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공교로운 일이지만 사흘전에 케네디(공사대리)와 이동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가 과연 다시 나타날 것인가 궁금해 한 일이 있었다.(후략)"

조선에서 이동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개 승려로서 불법 밀항자 신세였던 이동인이 어떻게 돌연히 국왕의 여행허가증을 가지고 나타날 수 있었을까요?  

시간을 약간 앞당겨 보겠습니다. 사토우에게 작별을 고하고 귀국길에 오른 이동인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0월 2일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일 후인 10월 6일, 서울을 떠나 일본으로 가기 위해 원산항으로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동인이 서울에 머문 기간은 4~5일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그 며칠새에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서울에서 민영익의 사랑방에 유숙했던 이동인은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을 알현했습니다. 당시 민영익은 민왕후의 조카인데다 국왕 부처의 신임이 각별하여 궁중을 무상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천지에서 이동인만큼 세상 돌아가는 형세를 잘 알고 있는 국제통도 없었고 그만큼 일본인 및 서양외교관들과 친교를 가진 사람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만큼 외국어를 잘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는 또 화술이 뛰어났고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남달랐습니다. 게다가 그는 손목 시계, 오페라 망원경, 성냥, 서양사진과 신서적 등의 신기한 문물을  가지고 갔습니다. 아마 고종 부처는 그때 처음으로 성냥을 그어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1880년 말 고종은 확실히 개화개방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는데 그렇게된 데에는 김홍집의 일본 출장 보고, 러시아의 안보 위협, 청나라의 적극적인 권유 등이 작용했겠지만 이동인의 설득 또한 큰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종이 불법 출국자 이동인 승려를 자신의 외교 밀사로 간택했을 리가 없었겠지요. 갑자기 날개를 달게 된 이동인은 이제 드디어 큰 뜻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 무한 감격했겠지요.

당시 이동인이 임금으로부터 부여받은 미션은 미국과의 수교 교섭이었습니다. 청나라 측에서는 러시아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과 수교해야 한다고 강력 권고하고 있었습니다. 이동인이 일본에 밀파된 것은 대미수교문제에 대하여 동경의 중국 공사관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대미수교  활동은 극비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보수세력의 반대가 극렬했기 때문이지요.

헌데 이상한 일은 동경에 도착한 이동인이 중국 대사관 접촉은 며칠 뒤로 미루고 화급히 영국 측에 조선과의 수교교섭을 촉구했다는 점입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 보기로 이제 영국의 기밀 문서를 들여다 보겠습니다. 앞서 말한 11월 21일자의 보고서에 이동인이 사토우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했던 이야기와 정보가 상세히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보고서는 서두에서 조선 정부의 대외 정책이 문호 개방 쪽으로 크게 변했다고 강조하고 그 배경에 대해 이동인의 설명을 자세히 전합니다. 러시아의 군함이 동해 바다에 나타남으로써 고종이 경각심을 가지게 된 것이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중국 측의 강력한 권유도 못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서는 분석합니다.

보고서는 이동인이 국왕의 인장이 찍힌 여행 허가증을 소지하고 있음을 소상히 설명한 데 이어 조선에서 이동인이 가져온 여러 문서와 자료의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이어서 영국이 신속한 수교교섭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하는 이동인의 발언 및 이동인이 마련한 조약문 초안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합니다.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밀사(이동인)는 사토우에게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진 영국 사절을 두세 척의 군함과 함께 지체없이 조선에 파견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습니다. 그 까닭으로서 그는 러시아 함대의 출현을 들었습니다. 조선 정부가 지금 러시아의 위협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대영수교 협상에 적극성을 띨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반면에 러시아 함대가 사라지거나 러시아가 조선을 압박해 오거나 하면 기회(한영 수교 교섭)를 잃게 될지 모른다고 그는 언급하였습니다.

밀사는 또한 통상우호조약(Treaty of Commerce and Friendship)의 초안을 마련했습니다. 조약 초안은 주요 수입품목(영국 물품)에 대한 관세율을 10%로 정하고 있습니다(The Agent also sketched out a draft Treaty of Commerce and Friendship, framed in a liberal spirit, with a fixed Tariff at 10 percent, upon the chief articles only of import). 밀사는 또한 이곳의 중국외교관 및 독일외교관을 접촉하고 있습니다.(하략)"
 
놀랍지 않나요?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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