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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지난해 가을 충북대학교 발굴팀의 유해 발굴이 한창이었다
▲ 골령골 유해발굴 현장  지난해 가을 충북대학교 발굴팀의 유해 발굴이 한창이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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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은 전국에서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 중에서도 대전광역시 동구 산내면 골령골에서 발생한 학살은 그 희생자가 5천 명을 훌쩍 넘겨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학살 현장은 총 8개 구역, 1Km에 걸쳐 있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리기도 한다.
   
군경에 의한 학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점령된 적 없었던 낙동강 이남 지역은 군경에 의한 학살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외 지역은 국군과 인민군의 점령과 수복을 거치면서 양측에 의한 학살이 반복되었다. 대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령골의 희생자들은 주로 대전과 청주 등 인근지역의 형무소 수감자들과 민간인들이었다.

대전 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해방 이후에는 좌익 사범 등 정치범들이 수감되었던 곳이다. 수용 정원은 1200명 정도였으나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숙군 등을 거치면서 1949년에는 3401명까지 수감인원이 늘어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기지역 형무소 재소자들이 이감되어 약 4천 명에 이르렀다. 그래서 7~8명 정원의 감방에 15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초기, 정부는 대전으로 피신한다. 대전은 영남과 호남으로 모두 갈 수 있는 요지였기에 국군과 UN군은 총력을 기울여 방어한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1950년 7월 16일, 정부는 대구로 이동한다. 이 때 대전 형무소 수감자를 '정리'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 정리 작업은 총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1950년 6월 28일부터 30일경에 일어났다. 일부 여순사건 관련자와 보도연맹원 약 1400명을 헌병대가 골령골로 끌고가 총살한다. 이후 시신을 50~60구 정도씩 모아 미리 준비해둔 장작더미 위에 던지고 불을 놓았다.

그리고 7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1800여 명을 골령골에서 학살했다. 이들은 제주 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 정치/사상범 혹은 10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일반 죄수들이었다. 마지막으로 7월 6일부터 7월 17일 새벽에 걸쳐 경인지역과 청주 형무소 등에서 이감된 재소자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살해했다.

전쟁 직전에 살해된 인원까지 합치면 대전형무소에서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4300여 명에 달한다.

반복되는 고통, 인민군에 의한 학살
 
대전 형무소 망루   형무소의 흔적은 망루를 포함해 일부만 남아있다.
▲ 대전 형무소 망루  형무소의 흔적은 망루를 포함해 일부만 남아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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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남한 지역의 상당부분을 점령한 북한은 점령지 관리를 위해 '전시 조건 하에서 발생하는 범죄에 대해서 형법 적용에 관한 지도적 지시(1950년 7월 22일)'와 '군사행동 구역에서의 군사재판소에 관한 규정(1950년 8월 21일)'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남한의 '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회부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는 인민군이 학살을 자행하는 근거가 되었다.

정부가 대구로 이동한 후 7월 21일 인민군은 대전을 점령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우익인사와 종교인, 외국인들을 잡아서 인민교화소(대전 형무소)와 인근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수감했다. 미군이나 군경 포로들은 대전경찰서에 수감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은 패퇴한다. 이 와중에 9월 25일과 26일에 걸쳐 형무소와 수도원 수감자들을 형무소 후문 취사장 우물과 용두산 탄방리 등으로 끌고가 살해했다. 그리고 9월 27일 새벽 3시 경에 후퇴 준비를 마친 인민군은 대전경찰서에서 나머지 포로와 부상자들을 살해한다.

대전이 수복되고 10월 초, 교도관들은 시신을 5군데에 나누어 가매장한다. 이후 1952년에 충남도청이 이를 다시 수습해서 합동 안장했다. 이 때 발표한 희생자 수는 총 1557명이었다. 하지만 군경에 의한 희생자는 제대로 수습하지 않았다.

현실로 다가온 충격
  
대전 형무소 우물   이 곳에서 인민군은 재소자들을 살해했다.
▲ 대전 형무소 우물  이 곳에서 인민군은 재소자들을 살해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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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날 때마다 과거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곳을 찾아다니지만, 그 중에서도 골령골은 가장 큰 충격으로 다가온 곳 중 하나였다.

나는 지난해 늦가을 무렵에 이곳을 찾았는데 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처음 접하는 발굴 광경에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현장에서 발굴된 유골을 직접 마주하자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까지 학살 현장을 다니면서 본 것은 수풀로 덮인 공터나 추모비, 총탄 자국 정도였다. 그런데 실제 유골, 그것도 막 발굴된 유골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유골을 직접 보자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왔다. '진짜 여기서 사람들이 죽었구나!!'라는 현실적인 체감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소위 '멘탈'이 무너졌다. 악몽을 꾸기도 하고 갑자기 눈물이 솟구치기도 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에 가까운 지인은 학살 현장 찾아가는 일을 그만두라고 강하게 만류했다. 그래서 실제로 지난 수 개월 간 현장 답사를 그만두었고, 글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나는 유골만 보고도 이렇게 충격을 받았는데, 그 긴 세월 동안 유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유족들은 참으로 원통하고 어이없는 일들을 겪어야 했다.
 
발굴된 희생자 유골  처음 희생자 유골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 발굴된 희생자 유골  처음 희생자 유골을 직접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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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보다 중요한 땅값

골령골 인근은 소위 땅만 파면 유골이 나올 정도였지만, 그동안 수 차례에 걸쳐 공사 허가가 내려졌다. 하지만 이미 사유지였기에 유족들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유족들은 하루 빨리 골령골의 유해를 발굴해 수습하길 원했다. 그러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골령골에 대한 직권 조사를 결정한다. 하지만, 유골 발굴은 사유지를 피해 산기슭 곳곳에 흩어져 있던 34구를 발굴하는 데 그쳤다.

위원회는 학살 현장의 땅을 매입하기 위해 토지 소유자와 여러 차례에 걸쳐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의 보상금 요구에 결국 무산되었다.

그래서 위원회는 토지 매입은 미뤄도 현장 보존과 유지를 위해 표지판이라도 세우려고 했다. 그래서 관련 예산을 책정하여 대전시와 동구청에 내려 보냈다. 하지만 대전시와 동구청은 두 차례에 걸쳐 이 예산을 반려한다. 표지판이 있으면 부정적인 인식이 생겨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거라는 주민들의 반대 여론을 이유로 들었다. 결국 학살 현장은 안내판 하나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 활동 중 수습한 유골을 모아서 항아리에 임시로 보관했다. 그런데 2010년 여름, 이 유골 항아리에 빗물이 가득 흘러 들었다. 유족들은 항아리에서 물에 흠뻑 젖은 유골을 꺼내어 말리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후 2015년에 민간 차원에서 공동조사단을 꾸려 20구의 유해를 추가로 발굴한다. 그리고 2020년 9월 20일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캠프가 설치되고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기억의 '균형'이라도...

유가족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비단 유골 발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부정적 낙인이 찍혀 억울함을 호소하기는커녕 오히려 후환이 두려워 꾹 참고 눌러야 했다. 이는 전국의 학살 피해 유가족들이 겪었던 공통적인 고통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노력이 조금씩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과 공격도 거셌다. 어떤 이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은 덮어두고 왜 군경에 의한 사건만 들추는 것이냐며 불편해 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금 대전 형무소는 담벼락 일부와 우물, 그리고 망루 정도만 남아 있다. 이 망루 뒤에는 오래전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안내판이 있다. 여기에는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만 기록되어 있고 군경에 의한 사건은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도로 쪽에 새로 설치한 안내판에는 아예 학살 사건 자체가 없다.

그리고 현재 자유총연맹 대전지부가 들어서 있는 형무소 자리 한 켠에는 위령비가 있다. 이 역시 인민군에 의해 학살 당한 우익 인사만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오히려 수십년 동안 한쪽의 기억만을 강요 받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군경에 의한 학살 사건을 규명하는 것은 치우친 기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 공동체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노력이다.    
 
망루 뒷 편 과거 안내판   인민군에 의한 학살만 기록되어 있다.
▲ 망루 뒷 편 과거 안내판  인민군에 의한 학살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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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 터 한 켠에 있는 위령비   인민군에 의해 희생된 우익 인사만을 위한 것이다.
▲ 형무소 터 한 켠에 있는 위령비  인민군에 의해 희생된 우익 인사만을 위한 것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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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서중석 외, <전쟁 속의 또다른 전쟁, 미국 문서로 본 한국전쟁과 학살>, 도서출판선인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오마이뉴스(2010. 7. 15), < "부모 유해조차 수습 못하는 나라... 서러워 말도 안 나와유">
진실화해위원회, <대전ᆞ충청지역 형무소재소자 희생 사건 보고서>
진실화해위원회, < 대전지역 적대세력사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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