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문화재 중 태실(胎室)이 있다. 대부분 생소하게 느끼는 태실은 쉽게 아기의 태를 묻은 장소로, 과거 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길지에 묻었다. 이는 장태 문화와 풍수지리가 결합되어 나타난 형태다. 때문에 태실이 있는 곳은 태봉산(胎封山), 태전동(胎田洞), 태봉마을 등의 지명을 남기게 되는데, 지명이 남긴 역사의 흔적인 셈이다.
 
파헤쳐진 구덩이 안쪽에 태함이 남아 있다.
▲ 남양주 광전리 태실 파헤쳐진 구덩이 안쪽에 태함이 남아 있다.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실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에는 태봉마을이 있는데, 이곳에는 마을 주민들이 '태봉'이라는 부르는 봉우리가 있다. 처음에는 태실의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찾는 데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접근성 역시 좋은 편은 아니다. 해당 태실의 경우 1999년 <조선의 태실>에 언급이 된 바 있으며, 작년 경기문화재연구원의 태실 조사를 통해 재확인되었다. 
 
남양주 광전리 태실의 태함
▲ 지상에 노출된 태함의 개석 남양주 광전리 태실의 태함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한편 태봉의 정상에 오르면 파헤쳐진 구덩이가 남아 있는데, 내부에는 태함의 함신과 개석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기록된 태실비의 명문을 통해 해당 태실이 홍치 6년인 1493년(성종 24)에 태실이 조성되었고, 아명이 금수(金壽)인 성종의 왕자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저 산 정상에 있는 석물 하나를 통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태실의 흔적을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군부대와 민통선 안에 태실이? 시흥 무지내동 태봉과 파주 정자리 태실

태실을 찾는 과정에서 평소라면 접하기 쉽지 않은 경험을 하곤 하는데, 가령 태실의 위치가 일반적인 곳이 아닌 군부대 혹은 민통선 안에 있는 경우다. 이 경우 일반적인 답사・조사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 군부대 안에 있는 태실을 방문하기 위해 시청의 문화재 담당자와 해당 부대 관계자와 여러 번 통화하며 협조를 요청한 끝에 시흥 무지내동 태봉(시흥시 향토유적 제6호)을 방문할 수 있었다.
 
군부대 내에 위치한 시흥 무지내동 태봉
▲ 시흥 무지내동 태봉 군부대 내에 위치한 시흥 무지내동 태봉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시흥 무지내동 태봉의 태함 개석
▲ 지상에 노출된 태함의 개석 시흥 무지내동 태봉의 태함 개석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시흥 무지내동 태봉의 경우 시흥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위치 자체가 군부대 안에 있다 보니 접근성의 제약이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처럼 잘 알려진 장소는 아니다.

이와 함께 해당 태실이 있는 봉우리의 형태는 마치 그릇을 엎어둔 모습이다. 또한 태지석과 태실비 등이 남아 있지 않기에 누구의 태실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지금은 지상에 노출된 태함만이 이곳이 태실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지난 2020년 4월 <경인일보>의 기사를 통해 파주 정자리 태실비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다. 해당 태실비는 2019년 12월에 그 존재가 확인이 되었는데, 초기 태실비의 형태를 잘 보여주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 장소가 민통선 내에 있다 보니 접근성의 측면에서 큰 제약이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해당 태실을 조사했던 차문성 소장(파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의 도움으로 현장 방문을 위한 준비와 일정 등의 조율 끝에 파주 정자리 태실을 찾을 수 있었다.
 
지난 2020년 4월 <경인일보>의 기사를 통해 태실비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다.
▲ 파주 정자리 태실비 지난 2020년 4월 <경인일보>의 기사를 통해 태실비의 발견 소식이 전해졌다.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태실지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파헤쳐진 구덩이와 그 앞쪽에 있는 태실비였다. 이날 태실비의 명문을 판독할 수 있었는데, 전면에는 '왕자□□아기씨태실(王子□□阿只氏胎室)', 후면에는 '□(치)육(년)구월초□□□(□(治)六(年)九月初□□□)'로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앞서 언급했던 남양주 광전리 태실처럼 파주 정자리 태실도 홍치 6년인 1493년(성종 24)에 입비한 성종의 왕자 태실인 것을 알 수 있다.

야산에 나뒹굴고 있는 태실 유적, 보호와 관심 필요

이처럼 전국의 수많은 태실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태실지의 첫인상은 파헤쳐진 구덩이와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태실 석물이었다. 태실 유적은 전국적으로 고르게 분포하고 있고, 그 수도 작지 않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비지정 문화재다.

이렇다 보니 접근성의 측면에서 태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쉽지 않고, 관리의 측면에서 보면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이 같은 방치가 태실 유적의 유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태실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 진천 지암리 태실의 태함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태실의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 김희태

관련사진보기

 
실제 사례가 있는데, 경기도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 있던 태봉산(훼손)에는 왕녀 승복의 태실이 있었다. <조선의 태실>을 보면 1999년까지만 해도 태실비의 상단과 태함의 개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는 상태다. 또한 지난 2008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태봉산에 있던 태함이 도난당했다.

이후 범인이 잡혀 태함을 되찾기는 했지만, 방치된 태실 유적이 도난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다시 재발하지 않도록 태실 유적에 대한 보호와 관심이 필요하다.

태그:#남양주 광전리 태실, #파주 정자리 태실, #태실, #시흥 무지내동 태봉, #태실 유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에 이야기를 더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