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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 노인이 자신 키보다 훨씬 높게 쌓은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도로 위를 힘겹게 걸어간다. 같은 길 위, 누구는 자동차로 빠르고 편하게, 또 다른 누군가는 몇 푼 안 되는 폐짓값을 벌고자 그 버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사,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무게는 다 제각각이다.
 백발 노인이 자신 키보다 훨씬 높게 쌓은 폐지를 손수레에 싣고 도로 위를 힘겹게 걸어간다. 같은 길 위, 누구는 자동차로 빠르고 편하게, 또 다른 누군가는 몇 푼 안 되는 폐짓값을 벌고자 그 버거운 짐을 지고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한 번 왔다 가는 인생사, 살아가는 방식과 삶의 무게는 다 제각각이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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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통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4~5년쯤 됐을까? 동네 이웃이 된 분으로 대장암에 걸리셨다 완치되신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손쓸 수도 없이 다른 장기로 암이 전이돼 향년 73세로 작고하셨다는 기별이었다.

등산로 계단 옆 연분홍 진달래가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끼고 있었으니... 작년 봄 딱 이맘때였나 보다. 뒷산 약수터에 올랐다가 그 어르신과 우연히 마주했다. 테니스 강좌에 등록하고 저녁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시는 건 알았는데, 아침 등산까지 하며 건강관리에 강행군인 줄은 미처 몰랐다.

짧은 안부와 근황을 묻고 답하고는 어르신은 산 정상을 향해, 나는 집 쪽으로 내려왔다. 그게 어르신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요 얼마간 안 보이신다 했더니 투병 중이셨던 모양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무게가 버거워진 탓인지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새롭게 사람을 사귀기란 생각같이 쉽지 않다. 그런 만큼 청첩장보다는 부고장을 더 받는 나이에 (생과 사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각별했던 사람들과의 이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다가온다.

자양강장제와 얽힌 추억 
      
 비 오는 날, 지상변압기 위에 누군가 마시고 버린 빈 '박OO'병이 올라앉아 있었다.
 비 오는 날, 지상변압기 위에 누군가 마시고 버린 빈 "박OO"병이 올라앉아 있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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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비 오던 날이다. 길을 걷다 보니, 지상 변압기 위에 다 마신 자양강장제 박OO 한 병이 올라앉아 있다. 평소 같으면 무심코 지나쳤겠지만, 비에 젖은 모습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케케묵은 상념을 떠올리기에 이르렀고, 주체못할 그리움, 측은함, 고마움... 여러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할머니께서 식사 때마다 한 방울 두 방울 아껴가며 참기름 보관용으로 쓰시던 박OO 병이 먼저 떠올랐다. 손목을 기술적으로 돌리고 꺾어 단 한 방울의 참기름도 허투루 쓰시지 않으려 결연했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요즘처럼 소주병에 담긴 참기름을 기분 내키는 대로 이 요리 저 요리에 퍼부어대며 제맛 내는 비법으로 치부하는 내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게 알뜰살뜰 거둬주신 분이셨다.

큰아들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떠안았던 어머니 친구분도 생각났다. 빚쟁이들한테 하루가 멀다고 시달리는 데다, 다만 얼마만이라도 벌어 생활비에 보태야 했던 처지여서 어머니 친구분은 노동판에 뛰어들게 되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은 쉬이 손에 익지도 않았고, 약한 체력으로 노동의 강도에 휘둘리다 보니 한동안은 음식을 넘기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때 유일하게 드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박OO였단다. 보약을 대놓고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삼시 세끼 박OO로 버티셨다니.... 들여다보지 않아도 다 타들어 간 그 속이 훤하다. 다행히 큰 고비 작은 고비 넘겨 크나큰 근심 걱정은 줄었지만, 지금도 어르신은 '인이 백이어서' 기운이 없는 날은 박카스를 박스째 대놓고 드신단다. 

2년 전에 잃어버린 신분증을 찾아주신 은인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그분은 실제 박OO 광고로 얼굴을 알린 출연자였다. 신분증을 되찾고 마음이 놓인 것도 잠시, 광고에서 본 인물이 '떡'하니 눈앞에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요즘은 본업인 영화 관련 일을 하러 동분서주 중이라는 풍문만 듣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으로 이 피로회복제와는 연(緣)이 예사롭지 않은 듯하다.

지난달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여벌 앞치마가 있어 식당 하는 이한테 요긴하게 쓰라고 갖다주었다. "빨래하기 쉬운 옷감에 양옆으로 주머니가 있어 너무 좋아요"라고 흡족해하는 모습이 민망할 정도였다. 게다가 '성의' 표시라며 식사 한 끼를 대접한다고 잠시만 앉아 계시란다.

'그깟 소용 닿지 않는 앞치마 하나 건네주고 뭔 식사 대접을 받나' 싶어 서둘러 내빼려 하니, 급하게 냉장고에서 박OO 하나를 꺼낸다. "그럼, 이거라도 드시고 가세요" 하며 건넨다. 평소 약국에서 하나씩 주는 자양강장제도 안 먹고 놔뒀다가 제조연월일이 지났다는 핑계로 버릴 만큼 탐탁지 않아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절하면 서운해할 것 같아 어정쩡하게 받아들었다.

피로를 날려주는, 고마운 호의 
 
 누가 깜빡 잊고 길거리에 놓고 간 어린이 부츠가 놓여 있었다. 한 짝만 있었거나, 신발 임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금방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임자를 찾았는지 아니면 임자가 찾아갔는지 모를 일이나 며칠 후 신발은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없었다. 일의 끝은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게 분명하다.
 누가 깜빡 잊고 길거리에 놓고 간 어린이 부츠가 놓여 있었다. 한 짝만 있었거나, 신발 임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면 금방 쓰레기통에 버려졌을지도 모른다. 임자를 찾았는지 아니면 임자가 찾아갔는지 모를 일이나 며칠 후 신발은 같은 자리에서 볼 수 없었다. 일의 끝은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게 분명하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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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고 나서 때아닌 감기에 걸려 주말 내내 누워 지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코맹맹이 소리를 듣더니 건강 챙기라는 당부를 먼저 한다. 그리고 이어진 진짜 통화 용건은 앞치마를 건네받은 식당 사장이 꼭 같이 와서 밥 먹으라 하니 날짜를 정해 보라는 것이다. '으이구, 친절도 이쯤 되면 병인 양하다!' 마냥 사양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상치 못한 부고를 듣게 되고, 조심성이 부족하여 감기에 걸리게 되고, 몸도 마음도 꽤나 지쳐 있던 한주였다. 식당 주인의 고운 마음씨를 알았으니, 어여쁜 그 마음 닮은 꽃 화분 하나를 준비하고 가봐야 할까 보다. 막상 식당 주인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나니, 한주의 피로감을 확 날려줄 박OO 같은 따뜻한 한 끼 밥상이 몹시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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