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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패망 직후 소련이 대마도를 한국에 귀속시키려 했던 비사가 드러났다. 미국의 역사학자 웨더스비(KATHRYN WEATHERSBY,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수)가 공개한 소련 문서에서이다.   

웨더스비는 1993년 12월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소련의 한국 목표와 한국전쟁의 기원, 1945-1950: 소련 문서의 새로운 증거)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관련 문건을 공개하고 논평했다.

문제의 문서는 소련 외교부에서 각각 1945년 6월 및 9월에 작성한 정책 자료이다. 그동안 오랫동안 비밀로 봉인되었던 이 문서들은 아직 그 내용과 의미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1945년, 소련 외교부 문서에 담긴 의미

먼저 6월의 문서를 살펴본다.

소련 외교부의 제2 극동국의 두 관리가 작성한 이 문서(작성자의 실명과 작성일지는 미기입)는 포츠담 회담(1945. 7.17– 8. 2)을 앞두고 소련 측 대표단이 협상 시에 참고하고 지침으로 삼을 자료로 작성된 것이다(이하 '지침서'라 칭함). 지침서는 전후 한국 문제에 대한 소련의 의중과 기본 정책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1945년 8월 10일 자정 즈음에 황급히 38선을 그었던 미국은 그 불가피성으로서 소련의 한반도 점령 위협을 들어왔다. 국내에서도 그러한 관점을 대체로 수용하고 있다. 헌데, 우리는 소련이 정말 애초부터 한반도를 점령하여 공산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무장해제시키고, 축출한 다음 철수하려고 했는지에 대해 어떤 정보도 없었다. 
  
1946. 1. 16.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 앉은 이는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
 1946. 1. 16.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스티코프 소련군정청사령관이 연설하고 있다(왼쪽에 앉은 이는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
ⓒ NARA(미국 국립문서보관청)/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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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더스비가 공개한 문건은 바로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정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월 지침서는 서두에서 19세기 중반부터 열강들이 한국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인 역사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지침서는 1943년의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은 적당한 시기에 독립되어야 한다고 규정했음을 환기시키고 열강에 의한 한반도 공동관리 전망을 언급한다.

지침서는 결론 부분에서 5개 항목을 강조한다.

첫째, 러시아가 러일 전쟁시(1904-1905) 일제의 한반도를 경유한 아시아 대륙침략에 맞선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성이 입증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막을 힘이 부족했고 더구나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일본이 영국, 미국 그리고 독일의 지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둘째, 일본은 한국에서 영구히 축출되어야만 한다. 왜냐면 한국이 일본이 지배하고 있는 한 소련의 극동지역에 항구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의 독립은 한국이 열강의 소련 침략을 위한 각축장이 되는 것을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독립과 소련의 안보를 가장 확실히 보장할 수 있는 길은 소련과 한국 사이에 우호 친선관계(friendly and close relations)를 수립하는 일이다. 이 점이 앞으로 한국 정부 수립 시 반영되어야만 한다.

넷째, 한국 문제 해결은 미국과 중국의 기존 이해관계로 인해 난국으로 치달을지도 모른다. 이 두 나라는 일본이 대만과 팽호도(澎湖島)를 빼앗긴 것에 대한 보상으로서 일본에 한국 내 "안전밸브(safety valve)"를 갖도록 허용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일본의 경제적 이권을 인정하는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는 한국에서 일제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이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 일본은 한국과 통상적인 교역만 허용되어야 하며, 어떤 이권도 가져서는 안 된다.  

다섯 번째,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면 소련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상이 지침서의 개요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간취할 수 있는 점은 소련이 한국 문제에 있어서 일제의 축출과 청산을 최우선시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미국 역사학자 웨데스비의 해석을 들어보자.

"문건 내용으로 보아, 분명한 사실은 소련 정부가 북동아시아에서의 열강의 패권 다툼의 각축장이자 일본의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역사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보고서는 또한 한반도를 병탐할 것을 주창하는 것이 아니라 우호선린관계를 수립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주목할 대목은, 일관되게 일본을 핵심적인 위협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술하겠지만 일본 위협에 대한 경계 태도는 한국 군사 점령시기, 나아가 한국 전쟁 첫해까지 지속된다."


일본 견제 중이던 소련..."대마도를 한국에 이관하는 안 제시할 필요"

이러한 대일 견제 및 공포심이 소련으로 하여금 대마도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마도 문제는 한반도를 신탁통치할 경우 관할지역 할당에 대한 소련 측 복안에 포함되어 있다. 옛 소련 외교부에서 1945년 9월 작성한 문서(작성 일자 및 작성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음)의 개요는 아래와 같다.  
 
-북위 38도 선 이북에서 소련 점령은 남쪽 지역의 미국 점령과 동일한 기간 동안 유지되어야 한다. 

-2년 정도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군사점령체제가 끝나고 나면 한국은 4대국의 신탁국이 되어야 한다. 그때 부산, 제주도 및 제물포(인천) 등의  전략요충지역은 소련군 통제지역으로 할당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국이 태평양에서 전략요충 지역을 할당받고자 하는 희망을 역이용하여 미국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제안이 반대에 부딪칠 경우에는 이 지역(부산, 제주도, 인천)에 대한 소련.중국 양국의 공동 관할을 제시하는 것도 가능하다.

-미래 한일 간 국경을 결정하면서 대마도를 한국에 이관(transfer)하는 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 제안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아시아 대륙 국가들 특히 한국에 대한 침략의 발판으로 대마도를 이용해왔다는 사실로써 정당화될 것이다.


이 문서는 또한 쓰시마 해협의 통항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대마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블라디보스토크-원산-대련을 오가는 해안 선박들의 보급기지를 신설하기 위하여, 나아가 블라디보스톡-미국- 캐나다 노선을 운항하는 소련 상선의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마도와 홋카이도 항구를 접근·관할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대마도와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
 대마도와 부산을 오가는 여객선.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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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우리는 소련의 비밀 문건을 살펴보았다.

대마도가 한국 땅? 상상해본다

먼저 대마도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일본에서 떼어내어 한국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소련의 구상은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 안이었을까? 만일 미소 관계가 루스벨트 대통령 시기처럼 우호 협력적이었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통일 독립 한국이 수립되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달았다.   

1945년 12월 소련 정부는 부산, 인천, 및 제주도를 관할함으로써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했다. 미소 관계의 악화로 미국이 전략 요충지를 포기할 가능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마도 한국 귀속 구상도 무산되었다.

소련의 외교부 서랍에서 잠시 머물다 증발해 버린 대마도 한국영토 이관은 실현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서 우리에겐 흥미와 상상을 유발한다. 만일 그 때 대마도가 한국 품에 안겼더라면? 지금 대마도 사람들은 부산말을 쓰고 있을 것이고, 행정구역은 부산광역시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한편, 소련 문서는 그동안 유통되어온 38선의 기원과 책임 문제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는 점에 더욱 의미가 있다. 

웨더스비는 소련 외교부의 1945년 9월 문서를 통해 분명해진 사실이 있다고 강조한다. 즉, "1945년 9월 소련의 목적은 한국 내에서 모종의 공동 관리를 통해 소련의 전략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었으며 폴란드 경우처럼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스탈린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었으며,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기보다는 미국의 입장 제시를 기다리는 전략이었다고 분석한다. 

웨더스비는 또한 한국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 스탈린은 남한의 공산당 활동을 지원하려 하지 않았으며, 직접적인 선동 공작에 개입하지도 않았다고 짚는다. 1945년 가을 북한에서는 소련당국이 소련 스타일의 사회 정치적체제 수립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였지만, 그런 활동을 38선 이남으로 확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갑자기 대일 선전포고를 한 데 이어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위험이 절박하였으므로 미국이 황급히 38선을 그어 소련의 남하를 제지했다는 담론이 그간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소련문서는 그러한 통념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

소련은 일본군을 점령·축출하려고 한 것이었지, 한국의 영토를 점령·지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38선을 그은 것은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국토분단과 민족상잔의 근원이 된 38선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미국 외교관이자 한국 문제 전문가인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가, 1974년 출판한 책에서 한 지적은 아직도 유효하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그 어떤 분단도, 한국의 경우처럼 그 기원이 경악스러운 사례는 없다. 그 어떤 분단도 당시 그 나라의 국민감정과 그토록 동떨어진 경우는 없다. 지금까지 그처럼 해명되지 않은 것도 없다. 어떤 분단도 그토록 엉뚱한 실수와 경솔함이 그토록 큰일이 되어버린 일도 없다. 마지막으로 미국 정부가 한국의 분단만큼 무거운 책임이 있는 사례도 없다." 
(그레고리 핸더슨,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중에서)

태그:#대마도 , #소련 문서, #일제, #웨더스비, #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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