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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산 상이암에 구룡쟁주 명당의 홍보용 사진이다.
▲ 상이암 구룡쟁주 사진 성수산 상이암에 구룡쟁주 명당의 홍보용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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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성수산 상이암은 성수지맥이 부채꼴로 휘감아가는 안쪽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바위 능선이 합죽선의 댓살이라면 암자는 합죽선의 댓살이 모이는 안쪽 구심점이다. 임실 성수산을 오르는 연화봉 근처의 등산로에서 상이암을 중심으로 하는 구룡쟁주의 산세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암자 앞의 작은 바위 봉우리는 용의 여의주다. 깎아지른 듯 아홉 산줄기가 용트림하며 힘찬 기운을 펼쳐내며 여의주를 품으려고 하는 형국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875년)에 도선 국사가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이라며 가람 터를 잡아서 이 암자를 창건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과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기도하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두 왕조의 건국 설화가 상이암의 으뜸 되는 서사 구조이다. 성수산 상이암의 건국 설화는 '군주는 하늘이 낸다'는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내포한다. 고려와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龍飛於天) 설화로서 기능과 명분을 확보했다.
 
상이암의 무량수전 불당
▲ 상이암 무량수전 상이암의 무량수전 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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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쟁주 명당의 중심인 여의주(향로봉) 바위다.
▲ 상이암 여의주 바위 구룡쟁주 명당의 중심인 여의주(향로봉) 바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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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산 상이암 사적(寺蹟)에 사찰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도선 국사가 875년에 팔공산 도선암(현재 성수산 상이암)을 창건하고, 송악의 호족 왕융의 가문을 찾아가서 귀공자의 출생을 예언하였다고 한다. 예언대로 왕건이 출생하였고 17세 때 이곳 도선암을 찾아 큰 깨우침을 얻고 '환희담(歡喜潭)'이란 글씨의 암각서를 남겼다고 한다.

선종의 승려인 도선 국사가 한 호족 가문을 특별히 찾아가 아들의 출생을 예언했다는 설화의 내용은 아마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후에 지어진 이야기일 것이다. 설화는 구비 문학이다. 성수산 상이암과 관련된 건국 설화는 고려와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왕권의 강화를 위할 필요와 목적에서 도선 국사를 의탁하고 그의 풍수지리설을 차용하여 만들어진 설화일 수 있다.

도선 국사의 행운유수와 백성들의 참상

도선 국사는 신라 헌강왕의 초청으로 잠시 궁중에서 왕사로 있었다. 그때 궁중은 호화로운 사치에 중독되어 있었고, 귀족들은 아수라의 권력다툼에 몰두하였다. 도선 국사는 행운유수(行雲流水) 수행승으로 전국을 떠돌며, 귀족들의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마주하였다.

재산 많은 귀족 집에서 종노릇이라도 하면 굶어 죽지는 않겠지. 연이은 흉년에 자식들을 노비로 팔았다. 집안에 식량이 다 떨어져 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어린 자식을 땅에 파묻었다는 풍문도 있었다. 효행 설화로 알려진 삼국유사의 손순매아(孫順埋兒) 설화는 사실 백성들의 눈물겨운 참상을 완곡하게 외면하고 있던 셈이다.

농민들은 몇 해 계속된 흉년으로 농사를 망쳐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리대(高利貸)를 쓰게 경우가 많았다. 고리대를 갚지 못하고 땅마저 뺏기고 이곳저곳 유랑하며 빌어먹다가 농민 봉기에 합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의 귀족들은 백성들의 농지를 수탈하여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바다의 섬 하나를 목장으로 만들어 사슴을 방목하며 사냥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도선 국사, 새로운 시대를 예언하며 백성들에게 희망을
 
현호색꽃은 하늘이 땅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 성수산 현호색 현호색꽃은 하늘이 땅을 그리워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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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 국사가 구룡쟁주의 땅을 찾아내고 도선암을 창건(875년)하는 시기에, 중국 당나라에서는 황소(黃巢)의 반란이 발생하였다. 당나라도 왕실과 귀족들이 호화로운 사치에 빠져있으며 백성들은 수탈하였다. 농민 봉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소금 밀매조직 출신인 황소가 농민들의 봉기를 지도하였다.

황소는 한때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황제를 자칭하기도 하였다. 결국 황소의 난이 진압되었지만 907년에 당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라의 운명도 이와 같은 미래를 가까이 앞두고 있었다.

신라 말의 경주 진골 귀족들의 사치와 정치 투쟁과 백성 수탈의 현장을 목격한 도선 국사다. 신라 말의 농민 봉기의 동력을 호족 세력들은 자신들의 지역적 정치적 기반 확대의 수단으로 활용하여 성장하고 있었다. 도선 국사가 진골 귀족들의 부활을 위하여, 지역 호족들이 새로운 왕족으로 성장하라고 풍수지리설을 확립하였을까?

도선은 섬진강 변에서 모래로 산세의 모양을 세우고 허물며 풍수지리를 익혔다고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명당자리를 찾아내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느 곳이든 배산임수 지형이 많고 명당이 없는 곳이 없다.

어느 고향이나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피는 아름다운 땅이다. 어느 고향이나 평화롭게 어느 백성이나 존중받으며 사는 세상을 염원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마을이 풍수적으로 조금 결함이 있으면 비보(裨補) 풍수로 보완할 방안까지 자상하게 제시해 주었다.
 
제비꽃이 한 포기에서 꽃이 아홉 송이가 피었다.
▲ 성수산 제비꽃 제비꽃이 한 포기에서 꽃이 아홉 송이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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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진골 중심의 신분제의 굴레를 벗어나라!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방편으로 풍수지리설을 확립하였을 것이다. 백성들이 평안히 살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임실 성수산 상이암의 '구룡쟁주'가 아홉 용이 서로 여의주를 차지하려고 다툰다면,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성장하는 여러 지역의 호족들의 왕권을 목적으로 하는 투쟁의 형태로 이해된다.

'무설설 무법법(無說說 無法法)'의 이치를 깨우친 도선 국사다. '구룡쟁주'에서 '구룡'은 신라의 지방 조직인 9주(州)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본다. 그러면 9주(州)의 모든 지역이 다 소중한 여의주를 품고 있어, 경주 중심을 벗어나 지역 평등의 의미가 있다.

달을 바라보아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목표는 아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우리나라 방방곡곡이 다 살기 좋은 곳이다. 이 땅의 어느 곳이나 살기 좋은 곳이 되어야 한다는 백성 사랑의 선언이 될 수 있다.

도선 국사가 풍수지리를 확립하여 이곳에 구룡쟁주의 명당을 찾아내고, 백성들의 편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염원한 것이 아닐까? 임실 성수산 상이암의 구룡쟁주 명당은 도선 국사의 백성들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방편이 아닐까?

춘분이 지나고 청명으로 절기가 이동하는 봄날이다. 임실 성수산에 생강나무는 노란 꽃이 지고 연둣빛 싹이 돋아난다. 현호색과 제비꽃이 등산로에 낮은 자세로 한세상을 밝게 꽃피우고 있다.

도선 국사가 구룡쟁주의 산세를 확인하며 답산하는 천 년 전의 봄에도 임실 성수산에 현호색과 제비꽃은 흐드러지게 피었을 것이다. 용트림하는 성수산 산줄기가 봄바람 같이 따뜻하게 숲의 뭇 생명을 표용하고 있다.

태그:#성수산, #상이암, #성수산 왕의 숲, #구룡쟁주, #도선 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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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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