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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육고기파 패밀리다. 돼지며 닭이 우리 가족이 섭취하는 육식의 99프로였다. 나는 해물이 밥상에 올라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생일 잔칫상이나 되어야 임연수 정도를 만날 수 있고 평소에는 김이 유일한 바다 음식이었다.

내륙에 사는 우리 가족의 숙명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아빠의 음식 독재 덕분이다. 본인이 먹고 싶은 것을 포기하는 데 익숙한 엄마는 아빠 입맛에 맞춰야 했고 그 밥상에 쿠데타는 없었다. 친구들의 희귀한 도시락 반찬은 모두 땅이 아닌 곳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 낯섦이 단순히 아빠들의 취향 차이인지 계층 차이인지를 잠깐은 궁금해했었다.

더구나 유년시절에 이어 긴 기간 해물을 안 먹으니, 이제 이질감마저 들었다. 음식의 맛은 기억이다. 맛은 혀로 느끼는 것이 아니다. 맛있게 먹었다는 경험의 도파민이 그 음식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해물이 내 취향이 아니란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나는 직장을 따라 이사를 했고 회사 근처에 항구가 있었다. 집 반대쪽으로 차를 돌려 항구로 가곤 했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비현실이 내 앞에 풍경으로 보이는 쾌감이 좋았다. 회, 해물탕, 아귀찜, 생선구이 등 자연스럽게 바다 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중에 나에게 으뜸은 봄이면 먹어야 한다는 그 '주꾸미'였다.

내겐 '저 세상 맛'이었던 주꾸미
 
주꾸미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을 나의 접시에 먼저 놓아주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 주꾸미 샤브샤브 주꾸미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을 나의 접시에 먼저 놓아주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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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를 믿는 바람에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는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주꾸미를 한자어로 준어(蹲魚), 속명은 죽금어(竹今魚)라고 썼다고 한다. 주꾸미를 좋아하는 남자친구 덕분에 처음 먹어보게 되었다. 남자친구와 봄이면 수산물 시장을 갔다. 구경하는 재미부터 별미다. 머리 큰 놈으로 즉석에서 샤브를 해 먹는데 정말 이 세상 맛이 아니었다.

남자친구는 푹 끓여 먹는 편이지만 나는 가볍게 살짝 익혀야 보드랍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주꾸미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을 내 접시에 먼저 놓아주는 다정함이 참 좋았다. 머리 부분을 씹을 때 그 알의 꼬돌꼬돌한 식감이 재밌고 고소한 게 참 맛있다. 냉이를 넣고 끓이는 것도 신기했고 검은 국물에 라면을 끓여서 마무리하면 완벽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 미끄덩한 생물의 느낌이 여전히 낯설었다. 끓는 물에 살아있는 것을 넣는다는 것, 이 거부감이 더 문제였다. 고통을 수반한 동물의 죽음이 순식간에 식사로 변하는 장면은 불편했다. 죄지은 것 없는 저 착한 눈은 어쩔 것인가? 저것은 식자재가 아니라 생명이지 않나. 투신당하여 인간에게 공양되는, 온몸으로 저항하는 모습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 걸까?

살아있는 바닷가재를 끓는 물에 넣으면 형사 처벌을 받는 스위스나 '산 낙지 규제'라는 녹색당의 공약에 너무 공감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 잔인한 행위는 남자친구가 다 하는 걸로 하고 나는 눈을 감고 죄책감을 덜기로 했다. 탱글탱글한 바다의 맛에 나의 남은 죄책감마저 함께 삼켰다.
 
끓는 물에 살아있는 것을 넣는다는 것, 이 거부감이 더 문제였다.
▲ 수산물 시장 끓는 물에 살아있는 것을 넣는다는 것, 이 거부감이 더 문제였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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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봄은 결석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번 봄에 주꾸미 데이트는 없다. 봄이 오는 길목에, 그 사람과 헤어졌기 때문이다. 봄에 주꾸미를 볼 때마다 나의 이별이 생각날 것이다. 주꾸미를 사주는 그 사람을 사랑한 걸까? 주꾸미 먹는 봄을 사랑한 걸까?

우리 집은 텃밭농사 패밀리다. 올해는 비닐하우스를 한 동을 지었다. 간단한 조리도구를 마련하여 비닐하우스 안에서 점심을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밖에서 먹으면 다 맛있다. 일하다 먹으니 무얼 먹어도 맛있다. 그래도 나한테는 외식이니 아무거나 먹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조리가 가능하니 그동안의 도시락보다 엄마 아빠에게 특식처럼 차려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별의 음식이 효도 상품으로
 
 엄마는 쌈을 좋아하니 비닐하우스 상추를 뜯으면 안성맞춤이었다.
▲ 비닐하우스 상추쌈  엄마는 쌈을 좋아하니 비닐하우스 상추를 뜯으면 안성맞춤이었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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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도 했겠다, 이 참에 잔인한 요리도 겸사겸사 끊지 뭐... 했으나 봄이고 해서 주꾸미가 생각이 안 날 수 없었다. 엄마 아빠 핑계일까? 그 사람과의 주꾸미 데이트가 그리웠던 걸까? 감자 심는 날, 나는 어느새 조리할 채비를 해서 나서고 있었다. 냉이는 밭에서 바로 캐면 되고 엄마는 쌈을 좋아하니 비닐하우스 상추를 뜯으면 안성맞춤이었다. 그 사람과 데이트하던 수산시장까지는 굳이 가지 말자. 아파트 앞 마트로 갔다.

"살아있는 게 있고 죽은 게 있는 데 뭘로 드릴까요? 천 원 차이니까 싱싱한 거 가져가세요."
"네. 살아있는 걸로 주세요."


그래 싱싱한 거. 그런데 걱정이다. 내가 살아있는 걸 어떻게 넣지?

"아, 잠깐만요, 사장님. 살아있는 걸 죽여서 싸줄 수는 없나요?"
"네? 뭐라고요? 왜요?


그럼 죽은 것을 사 가면 되잖냐며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한 사장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아빠. 이거 안 먹어봤지? 봄이면 이걸 먹어야 한다니까요. 봄은 주꾸미야. 하하하."

이별을 애써 잊으려는지 나도 모르게 저 혼자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아무거나 먹으면 되지 이렇게 비싼 걸 왜 사 왔냐면서도 맛있게 먹는 엄마 아빠를 보니 마음이 좋았다. 이별의 음식이 효도 상품으로 장르가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데이트하면서 나만 먹던 것을 반성했다.

봄은 주꾸미 맞다. 이제는 엄마 아빠와의 주꾸미 추억으로 이별을 덮어 씌우기 하고 싶다. 덜 싱싱하더라도 반드시 살아있지 않은 걸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봄의 맛, #주꾸미,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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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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