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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군 하성면 부역혐의자 학살터 태산공원
 김포군 하성면 부역혐의자 학살터 태산공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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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경기도 김포 면소재지의 '여왕봉다방'은 지하에 있었다. 민경철은 코트에 잔뜩 묻은 눈을 털고 다방 문을 밀었다. 다방 안은 담배 연기에 너구리 굴이나 다름없었다. "경철이 형, 여기요." 김연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연호는 경철에게 용건을 말했다. 

"형, 이번에 법무관 서기보 시험 봤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한테 신원조회 문의가 왔어." 김연호는 경철의 친구 김원호의 동생으로, 당시 보안사(국군보안사령부) 김포 담당자였다. "그래서 어떻게 처리했어?" "당연히 잘 썼지.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 형하고 김재춘 아저씨를 만나봐." 김연호의 얼굴은 진지했다.

썩은 동아줄을 잡은 사내

김연호의 당숙 김재춘이 누구인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김재춘이었다. 김재춘은 육사 5기생으로 제6관구 참모장을 맡았었고, 5.16 쿠데타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과 제3대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김재춘은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출신으로 김연호의 오촌 당숙이었다. 민경철 집안 내력을 아는 김연호는 김재춘에게 신원조회를 무사히 통과하게끔 부탁을 하라는 것이다.

며칠 후 민경철은 한강농지개량조합에 근무하는 김원호를 찾아갔다. 둘은 인근 막걸리 집에 갔다. "이번에 법무관 서기보 시험을 봤는데, 1, 2차 시험에 합격했네." "아이구 친구야, 축하한다." "그런데 말이야"라고 말을 꺼낸 민경철의 얼굴빛은 밝지 않았다. "3차는 신원조회인데,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지가 6.25 때 죽었잖아." "그런데, 그게 왜?"라며 김원호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아버지 일로 신원조회에 떨어질까 봐 그러네." "별걸 다 걱정하네"라며 김원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당숙한테 신원조회가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부탁 좀 해 주면 안 될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지만 이런 부탁을 하기가 민망했던 경철의 얼굴은 빨개졌다. 김원호는 흔쾌히 대답했다. "친구야, 이게 무슨 부탁이야? 내가 당장 내일 당숙 어른한테 이야기할게. 걱정하지 마" 김원호의 장담에 민경철은 그제서야 안심했다.

1968년 1월경 최종 합격자 발표 날이 되었다. 민경철은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있는 국방부로 합격자 확인을 하러 가기 직전에 김원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니 당숙에게 부탁해봤냐?" "친구야, 걱정 말어. 한 턱 낼 준비나 해라" 국방부로 들어가 합격자 발표 벽보를 쳐다본 민경철은 고개가 푹 꺾였다. 자기 이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물을 머금고 발길을 돌렸다.

1, 2차 시험도 합격했고,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춘에게 부탁도 했는데 왜 떨어졌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민경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1968년 당시 김재춘은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썩은 동아줄'이었다.

김재춘은 제3대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육사 8기생을 숙청하고, 4대 의혹사건(5·16 쿠데타 후 군사정권 하 4가지 비리 사건.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기 사건)을 조사하다가 박정희의 미움을 사 중앙정보부장에서 중도 하차했다.(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4』) 김재춘의 후임이 바로 김형욱(1963~1968)이었다. 이 시기 김재춘은 '이빨 빠진 호랑이', 아니 박정희에게 미움을 받아 썩은 동아줄 신세였다. 그런 그에게 인사청탁(?)을 했으니, 될 리 만무했다.

여성동맹원들 줄줄이 엮여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나자 민경희(당시 17세)는 후다닥 뛰어 뒷문으로 나갔다. 잠시 후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이어 치안대가 집에 들이닥쳤다. "민경희 어디 있어?" 집에는 민경희의 올케 이옥임(1927년생)만이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요." 치안대의 추궁이 이어졌지만 민경희는 달아난 후였다. 1950년 10월 쌀쌀한 가을날이었다. 전날부터 인공 시절 여성동맹(여맹) 활동을 한 이들을 검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민경희는 다음날 개 짖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버선발로 옆 동네로 피신했다.

여맹 전력자들은 경기도 김포군 하성지서로 잡혀갔는데 구타와 고문에 시달렸다.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민경희의 옆집 사는 이해구가 당시 CIC(미군 24군단 소속 첩보부대)에 근무했는데, 치안대가 마을 여자들을 잡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해구는 치안대에 찾아가 권총을 들이대며 "이 새끼들, 너희가 무슨 권한으로 사람들을 잡아들이냐!"라고 호통쳤다. 기고만장한 치안대원들도 CIC 앞에서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 민경희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녀는 화를 입지 않았지만 당시 민경희 집안은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민만기(당시 48세)는 대한민국 군·경 수복 후인 1950년 10월 20일 치안대에 연행되었는데 인공 시절 마조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에서였다. 6.25 직전 마을 이장을 지낸 민만기는 할 수 없이 인민위원장을 맡았었다.

대문에 빨간딱지 붙여놔

농민위원장을 맡았던 민만기의 동생 민남기도 연행되었다. 민만기-민남기 형제는 하성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었는데 1주일 후 하성면 양택리 태산골짜기와 하성국민학교 뒷산, 천주교 골짜기 등지에서 처형되었다.

민만기의 삼촌과 아내 남궁아기가 민만기 형제의 시신을 수습하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민만기 집안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민만기의 장남 경욱과 차남 경찬, 막냇동생 형기와 조카 경인이 의용군으로 간 후 소식이 두절됐고, 삼남 경석은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여기에다 딸 경희도 연행될 뻔했으니 십년감수가 따로 없었다. 이후에는 집에 치안대가 들이닥쳐, 그릇과 가재도구를 빼앗아갔다. 그나마 재봉틀은 숨긴 걸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대문에는 빨간 딱지를 붙여놔 가족들이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 이장을 맡았던 김순명(당시 37세)도 수복 후 치안대에 연행돼 죽임을 당했다. 인공 시절 가금리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였다. 민만기와 김순명처럼 국군 수복 후 부역 혐의로 연행돼 죽임을 당한 김포군 하성면 사람들은 100여 명에 달한다. 김포군에서는 고촌면, 김포면, 양동면, 양촌면, 하성면, 월곶면 등지에서 최소 600여 명이 학살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25 때 아버지를 잃고, 형 둘이 의용군에 가자 민경철은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었다. 어머니 남궁아기를 도와 농사를 짓다가 형 민경욱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로 석방돼 돌아오자 그때서야 경철은 학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연유로 경철은 중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갔다. 김포중학교에 이어 김포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가정형편으로 직업반인 축산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 안 양계장을 관리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그러던 1962년 어느날, 김포농업고등학교 훈육주임이 교실 두 곳을 다니며 투표(?)를 했다. '생일에 초대할 가장 친한 친구'와 '본인이 결혼할 때와 부모 환갑잔치에 초대할 사람' 이름을 써내라고 했다. 가장 믿을 만한 친구 한 명을 써내라는 것이었다.

결과 최다 득점자는 민경철이었다. 중학교에 2년 늦게 들어간 민경철은 그만큼 동급생에게 믿음직스러운 존재였다. 인기투표 결과, 그는 대대장을 맡게 됐다. 대대장은 매주 월요일 조회나 3.1절 행사 때 학생들의 사열(査閱)을 지휘하는 일을 했다. 당시 학생회장은 김연호로 후일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김재춘의 오촌조카였다.

안기부에 찾아가 항의
 
아버지 민만기가 학살된 태산공원에서의 민경철
 아버지 민만기가 학살된 태산공원에서의 민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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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자식'이라는 꼬리표는 질기게도 붙어 다녔다. 민경철은 나중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데 1980년대 초반까지도 학교로 정보부와 경찰에서 찾아와 신원조회를 하고 사진 촬영을 했다. 법무관 서기보 시험에 낙방한 민경철은 실의에 빠져 동국대학교 법학과를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자퇴했다.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돕는 등 방황기를 거쳐 사촌동생의 권유로 교사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연평도에 소재한 연평국민학교로 초임발령을 받았다.

민경철이 경기도 포천의 노곡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경찰에서 찾아와 동정(?)을 살피길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당시 남산에 있던 안기부(국가안전기획본부)에 찾아가 항의했다. "물어볼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면 되지, 왜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겁니까?" 겁 없는 학교 선생의 항의 방문이었다. 1983년 전두환 신군부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다행히 이후에는 정보기관과 경찰이 민경철을 괴롭히지는 않았다.

신원조회에 시달리기는 김순명의 아들 김정흠(1947년생)도 마찬가지였다. 6.25 때 아버지 김순명을 잃은 그는 베트남전쟁에 자원했지만 신원조회로 뜻을 접어야 했다. 또한 11사단 수색중대에 차출됐지만 이 또한 신원조회에 걸려 낙방되었다.

지금 민경철(82세, 경기도 김포시 장기동)은 김포유족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평생 동안 따라붙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딱지를 떼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태그:#중앙정보부, #의용군, #김재춘, #동아줄, #신원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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