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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여린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햇살. 그 틈으로 불어오는 은근한 미풍은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봄'의 형상이다. 매년 따뜻한 봄이 되면 많은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온화한 날씨를 만끽한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는 무리가 있고 뛰어노는 아이들도 보인다. 봄이란 계절은 겨우내 멈춰있던 삶의 재생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태동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봄은 독서의 즐거움, 구체적으로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계절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독서는 정적인 사유 활동이다. 이 말은 곧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며, 실제로 책 읽기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책장을 넘긴다.

그렇다면 봄이 소설을 읽기에 특별히 좋은 계절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봄이 갖는 상징성과 관련 깊다. 나는 단순히 '구애받지 않는 것'과 '즐기기 참 좋은 것'은 전혀 다른 개념이라 생각한다.

'봄'과 '소설'이란 단어가 갖는 사전적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순기능은 같다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닮았다. 앞서 서술했듯 자연에서 봄의 역할은 '멈춰있던 삶의 재생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태동'인데, 사회에서의 소설이 갖는 궁극적인 목표 또한 이러한 진리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연관성을 설명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수작 <인셉션>은 타인의 꿈속에 들어가 어떠한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내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작품의 구성, 연출 등도 뛰어나지만 내가 특히 인상 깊게 느낀 부분은 등장 인물들의 목표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그들은 타인에게 어떠한 생각을 직접적으로 '심는' 것보다는 '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극 속에서도 사건을 기승전결로 구성하여 결과적으로 목표로 하는 인물이 어떠한 생각에 도달하게끔 기획하고, 그러한 그들의 시도는 성공으로 마무리된다. 소설이 갖는 힘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비문학과 달리 소설은 작가의 생각을 독자에게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등장인물의 대사, 묘사하는 배경과 그들이 겪는 사건만으로 독자가 어떠한 생각을 하게끔 유도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생각 혹은 신념은 힘이 세다. 타인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고 오롯이 본인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기는 감정은 쉽게 잊히질 않고 여운이 남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란 바로 이러한 것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글이다. 봄이 계절로서 멈춰있던 삶의 재생과 새로운 생명의 태동을 가능하게 한다면, 좋은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읽고 사유하며 세상 이치를 깨닫고 건전한 신념의 발현이 가능하도록 안내한다.

내가 두 명사의 이러한 케미스트리를 깨달은 때는 강원도 화천의 산골짜기에 머물던 어느 봄이었다. 당시 나는 소속 병과의 특성으로 잦은 파견과 반복되는 작전을 수행하며 심적으로 지쳐있었다. 장기간 여러 부대를 떠돈 탓에 휴가를 포함한 출타가 제한되었고, 바깥 공기를 오랫동안 마시지 못하자 매너리즘은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무얼 해도 개운치 않고 지겨운 기분 말이다. 그러한 시기에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을 읽었다.

스타인벡의 시선으로 미국 사회의 목가적인 풍경을 탐험하는 일은 자못 흥미로웠다. 적은 분량이 아니었지만 다 읽고도 아쉬울 만큼 읽는 내내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원천에는 소설 속 배경에 스며드는 자연이 있었다. 단내 섞인 봄바람과 산골짜기의 비스듬한 수평 광 아래에서, 활자는 텍스트라기보단 심원하면서도 입체적인 현실로서 다가왔다.

소설 속 칼이 느끼는 죄의식, 이를 인정하고 극복할 수 있도록 애덤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리, 인간으로서 짊어지는 원죄의 극복이 스스로의 의지와 실천에 달렸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오랜 시간 눈과 머리 안을 맴돌았다. 새로운 생각의 발현과 봄이란 계절이 품은 시작의 이미지가 교차하며 (나 자신이 무교라는 사실이 무색하도록) 묘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그 후로 나에겐 밖에 나가 책장을 넘기는 취미가 생겼다.

위의 이유로 나는 봄의 정취를 느끼며 소설을 읽는 게 참 좋다. 그렇지만 이러한 순기능의 일치가 단지 봄과 소설 사이에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비록 봄을 소설에 비교하며 예를 들었지만 사실 수필, 칼럼, 비평을 포함한 모든 문학과 비문학이 포함된다. 어떠한 글이 정보로써 유입되고 지식이나 가치로 변화하여 나의 것으로 재생산된다면, 글의 종류를 구분하는 일은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앎, 혹은 가치는 시대에 따라 때로는 크게 변화해왔다. 신민은 시민이 되었고 불합리한 관행이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 건전한 물음과 이를 탐구하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찾아 끝없이 나아간다. 그리고 그러한 사유의 근원을 거슬러 오르면 재생과 탄생의 계절, 봄과 마주하게 된다.

인류가 품어온 프레임의 전환은 한 권 한 권의 책이 수없이 모여 기존의 틀을 허물며 발생한다. 그러므로 결국 봄과 책은 시작, 혹은 재출발의 의미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이 지저귀고 여린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리며, 그 사이로 은근한 미풍이 불어오는 봄. 밖에 나가 자연 속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평소 느끼지 못한 새로운 것을 마음속에 심어보는 건 어떨까. 분명 누리는 즐거움이 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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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봄, #문학, #비문학,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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