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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3세로 한국에서 과거사위원회 일을 한 후 미얀마로 가 그곳에서 출가한 위르겐 김(필명)씨가 현지 사정을 담은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미얀마 거리에 사람이 죽어 있다.
 미얀마 거리에 사람이 죽어 있다.
ⓒ 미얀마 시민불복종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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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인과 경찰이 무자비하게 쏘아대는 총에 맞아 사망한 미얀마 시민들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이 글을 쓰는 나보다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왜냐하면 군·경이 학살하는 미얀마 시민들의 수는 매일매일 증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미얀마에서는 인터넷이 차단되고, 민간 언론사가 폐간됐다. 미얀마 국영방송은 가짜뉴스만 퍼뜨리고 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나는 쿠데타가 일어난 2월 1일 아무것도 모른 채 지냈다. 그날은 아침부터 전화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는데, 통신 사정이 열악한 미얀마에서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스님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떠드는 광경을 봤지만 그냥 무심하게 지나가 버렸다.

근처 시장에도 가봤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아무도 나한테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럴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겠으나 미얀마인들은 외국인들과 뚜렷하게 선을 긋고 산다. 그래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한 모양이다. 어처구니없지만 나는 다음날이 되어서야 쿠데타를 알게 되었다.

유튜브를 보는데 국가 고문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감금되었다는 한국 뉴스가 떴다. '왜 옛날 뉴스가 뜨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가 미얀마 관련 뉴스를 자주 검색해서 그런가 싶어서 한번 클릭을 해봤다. 그랬더니 전날 일어난 사건이었다.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2021년에 군사쿠데타?'라는 의문이 스쳤다. 때가 어느 땐데... 주변 사람들한테 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따졌더니 당연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총칼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을 나 혼자 모르고 있었다.

곧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진행 중인 미얀마인들이 3월 24일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의 따미네(Thamine)에서 청년들이 눈과 입을 가린 채 항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해 시민 불복종 운동을 진행 중인 미얀마인들이 3월 24일 침묵시위를 벌였다. 미얀마 최대도시 양곤의 따미네(Thamine)에서 청년들이 눈과 입을 가린 채 항의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 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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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매일 미친 듯이 뉴스를 보고 정보를 수집하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쿠데타 발생 3일 후부터 군벌을 규탄하는 행동을 하자는 제안이 SNS에 돌았다. 실제로 3일 정도 지나고 난 후에 시위하는 사람들이 만달레이와 같은 도시에서 조금씩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다.

쿠데타 다음날부터 공무원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의 일환으로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시민들은 밤 8시가 되면 냄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악귀를 쫓는 미얀마의 풍습인데 쿠데타를 일으킨 군벌을 악귀로 간주해 몰아내자는 뜻으로 군벌의 만행에 저항하는 표시였다.

내가 사는 곳은 작은 규모의 지방도시지만 여기 시민들도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어서 시내에 나가봤다.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면서 군벌을 규탄하고 아웅산 수치 여사 석방을 요구했다. 모두 하나같이 화가 나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국민의 신임을 받은 적이 없는 군벌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로 선출된 문민정부를 뒤집어엎었기 때문이다. 외국인인 나도 화가 났다.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막강한 군사력 앞에서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다행히도 군벌을 규탄하는 움직임이 파도처럼 거세게 미얀마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매일 시위가 벌어졌다. 젊은이들은 시작하는 시간과 장소를 매일 변경하면서 군경의 진압을 피했다. 처음에는 어디서 몇 시에 시작하는지 알 수가 없어 시위대를 따라다니기가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피켓을 든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가는 방향에서 시위가 시작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얀마 군벌은 낮에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위하게끔 놓아두었다가 시위 지도자를 알아낸 후 밤에 거처를 습격해 체포하는 식으로 민주화운동을 탄압해 왔다. 그러나 미얀마 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었고 중간집단도 많이 생겼다. 내가 관찰하기에 시위대의 수뇌부 같은 것은 없어 보였다. 단체나 모임마다 각자 알아서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농협노조, 교원노조, 헬스클럽, 자전거 동호회, 무슬림 모임 등이 각자 연락해 모여서 시위하는 것 같다. 큰 도시에서는 LGBT(성소수자) 모임도 시위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위의 규모가 날마다 커져가면서 2월 22일을 맞이했다. 2021년 2월 22일은 숫자 2가 다섯 개나 들어 있어서 '22222 항쟁'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지난 1988년 8월 8일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벌인 '8888 항쟁'을 모델로 삼아 군벌에 맞서 항쟁한 정신을 계승하자는 의도가 담겼다.

이날 전국적으로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어 있었다. 가게들이 모두 문을 닫았고 시내 중심가에는 인파가 몰려와 앉을 공간도 없을 정도였다. 거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시위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고, 세 손가락 경례를 하고, 준비한 음식과 음료를 시위대에 나눠주었다.

시민들이 시위를 할 때면 차도 다닐 수가 없어서 '자유 미얀마'의 분위기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군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낙관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이 열렬히 민주주의를 갈망하는데 누가 막을 수 있겠나.

공포에 질린 시민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3월 22일 만달레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을 전해온 MPA(Myanmar Pressphoto Agency)는 "전날 밤 군부 테러리스트의 강압적인 진압이 있었고 13살 소년을 포함해 적어도 4명이 죽었다"고 전했다.
 군부 쿠데타에 저항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이 3월 22일 만달레이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을 전해온 MPA(Myanmar Pressphoto Agency)는 "전날 밤 군부 테러리스트의 강압적인 진압이 있었고 13살 소년을 포함해 적어도 4명이 죽었다"고 전했다.
ⓒ M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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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얀마의 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군벌의 유혈 진압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980년 광주에서는 5월 18일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본격적인 유혈 진압이 시작되었다. 나중에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미얀마의 2월 28일은 미얀마 군벌이 시민들을 본격적으로 유혈 진압하기 시작한 날이다.

22222 항쟁의 성공에 힘입어 2월 28일 또다시 전국적으로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가 예정되었다. 그러나 미얀마 군벌은 더 이상 자신들을 규탄하는 목소리와 움직임이 퍼져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도 시위를 구경하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내 중심가에 갔다. 마음의 여유는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깨지고 말았다. 중앙시장 앞에 군경의 차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군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져 버리는 것을 난 보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미얀마에서는 1988년과 2007년 시민들이 민주화 시위를 했는데 군경의 유혈 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패배한 적이 있다. 그러한 비참한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은 군벌이 강경하게 진압하는 날이 곧 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장한 군경이 차에서 내리는 광경을 시민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지켜봤고, 이 장면을 본 나도 매우 불안해졌다. 중심가를 군경이 장악해서 시위대는 외곽에서 모인다는 말이 돌았다. 집합 장소에 가봤더니 그곳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았다. 모인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군경이 집합 장소를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떤 이들은 시위하겠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겁에 질려 있었고, 어떤 이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가려고 했다.

이날 시위는 비참하게 끝났다. 아니다. 정확히는 시위를 끝까지 할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출발하기는 했는데 군경과의 충돌을 피해 계속 시 외곽으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시위하는 코스를 예측할 수 없어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결국 난 시위대를 놓치고 말았다. 시위대를 따라다니려고 했던 시민들 여러 명을 거리에서 만났는데 다들 시위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순간 군경을 싣고 지나가는 차를 봤다. 시위대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다고 추정했다. 다행히도 이날은 체포자도 사망자도 없었다. 시위대는 군경이 진압해 오자 골목길로 빠져 들어가 모두 도망친 모양이었다.

이날 양곤이나 만달레이 같은 도시에서는 군경이 발포한 총에 맞아 수많은 시민이 사망했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릴 만큼 전국적으로 군경이 강경 진압을 했다.

한국이 희망 
 
3월 20일 미얀마 광주연대가 제3회 딴뽕띠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3월 20일 미얀마 광주연대가 제3회 딴뽕띠 집회를 진행하고 있다.
ⓒ 미얀마 광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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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주주의에 관해서 한국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내가 태어난 일본은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성취한 적이 없는 나라다. 그러나 한국은 시민과 학생의 힘으로 두 번이나 부패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최근에도 평화로운 촛불시위로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뒤엎었다.

한국에는 광주의 경험과 기억이 있다. 현재 미얀마의 상황은 1980년 5월 광주와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얀마 전역이 광주가 된 상황이다. 현재 미얀마 군벌이 인터넷을 차단해 미얀마 전역은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다. 당시 광주에서는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고립하려고 전화선을 차단했다. 군벌이나 신군부가 통신을 차단한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다.

미얀마 군벌은 시위를 뿌리째 진압하려고 저격병을 투입하고, 기관총을 쏘고 있다. 시민들을 위협하려고 전투기가 저공비행하고 있다. 미얀마 군벌은 시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아니다. 무장한 군경이 평화롭게 시위하는 시민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총과 탱크로 무장한 군경에 용감하게 맞선 미얀마 젊은이들은 "군정 아래 삶은 의미가 없다"라고 하면서 죽을 각오로 거리로 나서고 있다. 유서를 쓰고, 팔에 연락처와 혈액형을 적고 시위 현장에 나가고 있다.

3월 11일 양곤에서 시위에 참여했다가 숨진 칫민뚜라는 25세 청년은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아내에게 "내가 오늘 거리로 나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아내와 뱃속에 있는 아기, 그리고 세 살배기 아이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세계 곳곳에서는 목숨을 바쳐 싸우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없는 나라들이 아직도 있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결과에 불복해 민주주의를 짓밟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시민을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미얀마 군벌 최고사령관 민 아웅 흘라잉은 2021년의 전두환이다.  
 
미얀마 군은 1일 성명을 내고 "'선거 사기'(election fraud)에 대응하여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등) 정부 인사들을 구금을 했다"며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에게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 2021.2.1
 미얀마 군은 1일 성명을 내고 ""선거 사기"(election fraud)에 대응하여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등) 정부 인사들을 구금을 했다"며 "1년간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 최고사령관인 민 아웅 흘라잉에게 권력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민 아웅 흘라잉 군 최고사령관. 2021.2.1
ⓒ 연합뉴스/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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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는 1948년에 영국에서 독립했다. 1962년 군벌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약 50년간 미얀마 시민들은 군정 아래에서 살아야 했다. 민주주의의 가치와 민주화 과정의 고통에 관해 깊이 이해하는 한국이 이번에 신속한 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민주화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군벌과의 협력을 중단하고, 최루탄 등 군용 물자의 수출을 불허하며, 인도적 목적의 사업을 제외하고 국제개발협력사업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미얀마인들은 일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미얀마에서도 한류의 인기는 대단해서 한국의 드라마와 노래를 일상적으로 즐기는 젊은이들이 많다. 한국어학원에서 한국어를 배워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하고, 한국의 최신 휴대폰을 갖고 싶어 한다. 젊은 층은 오히려 일본보다 한국을 선호하는 것 같다.

가난한 식민지였다가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루어 내고 선진국이 된 한국을 미얀마인들이 유사한 역사를 지닌 자국의 모델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재 미얀마에서는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면서 사무실이나 직장에 출근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불복종 운동을 하다가 수입이 끊기거나 줄어든 이들을 한국 시민사회가 모금 등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UN 총회에서 세 손가락 경례와 함께 군정 반대 연설을 한 쩌모툰 미얀마 UN 대사는 3월 13일 KBS와 한 공식 인터뷰에서 지난 11월 8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미얀마 국민에게 선출된 의회 의원들로 구성된 미얀마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한국이 지지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나 역시 한국이 앞장서서 CRPH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다. 즉, 일제에 항거한 임시정부가 현재 대한민국의 출발인 점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잘 이해하는 한국인과 한국 정부는 외교 관행상 쉽지 않겠지만 CRPH를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5.18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제일은행(현재 무등빌딩) 앞에서 최루탄이 터진 상황에서 한 시민이 방독면을 쓴 계엄군에 둘러 싸여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다.
ⓒ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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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한국에서는 언론 통제와 왜곡 보도로 광주 시민에게 가해지는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이 완전히 차단되기 전 미얀마 시민들은 SNS를 활용해서 군벌이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을 온세계에 알렸다. 그 점이 1980년 광주와 2021년 미얀마의 차이라고 하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계엄군과 맞서는 광주 시민과 시민군들이 무엇을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 것이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이 기다린 것은 서울이나 부산과 같은 대도시에서도 시민들이 신군부에 맞서 저항에 나서고,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의 군대가 광주시민을 구하러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얀마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찍어 보내온 동영상을 보고 2021년의 광주(미얀마)의 실상을 알게 된 한국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한국도 이제 문화콘텐츠나 자동차나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인권, 평화와 같은 보편적인 이념도 수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각국이 모델로 삼고 싶어 하는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와 임시정부의 의미에 대해 뼛속까지 아는 한국이야말로 미얀마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나중에 꼭 승리할 미얀마 민주주의 미래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태그:#미얀마, #민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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