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다 > <결백> <오케이 마담> <반도> <오!문희> <침입자>. 지난 설 연휴에 지상파와 종편,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방영된 TV 영화들이다. 방영일을 기준으로 개봉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최신영화'들이 대거 TV를 통해 시청자들을 만났다. 이처럼 최근엔 극장에서 IPTV, IPTV에서 TV로 방영되기까지 매우 짧은 시간이 걸린다. 극장에서 내려간 후에도 비디오로 출시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걸렸던 과거와는 환경이 크게 달라졌다.

지금처럼 TV를 통해 최신영화를 본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던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명절에 꼭 빠지지 않고 전파를 탔던 영화가 있었다. 바로 80~90년대 홍콩 최고의 액션스타 성룡이 출연하는 영화들이다. 성룡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들은 대부분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 어렵지 않은 스토리, 빠지지 않는 코믹요소, 권선징악의 결말이 어우러지면서 명절에 남녀노소 부담없이 즐길 수 있었다.

<취권>과 <용형호제> <폴리스스토리> 시리즈로 아시아를 평정한 성룡은 90년대 중반 할리우드에 진출해 <러시아워> <턱시도> <상하이눈> <80일간의 세계일주> 등에 출연하며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런 성룡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 최고의 영화시장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한 작품이 바로 캐나다에서 촬영한 홍콩 영화로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크게 흥행한 <홍번구>였다.
 
 75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홍번구>는 북미에서 32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제작비의 4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75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홍번구>는 북미에서 32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제작비의 4배가 넘는 돈을 벌었다. ⓒ 골든 하베스트

 
북미 박스오피스 1위 오른 성룡의 본격 할리우드 진출작

성룡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외국배우 중 한 명이다. <사형도수>와 <취권>을 시작으로 <오복성>, <프로젝트A>, <쾌찬차>, <폴리스스토리> 시리즈, <용형호제> 시리즈, <미라클>, <쌍룡회>, <시티헌터>, <썬더볼트>, <나이스 가이> 등 일일이 손에 꼽기 힘들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소룡을 우상으로 삼았던 성룡은 이소룡처럼 액션배우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성룡은 로버트 클루즈 감독(이소룡의 <용쟁호투>와 <사망유희>를 연출한 감독)의 <배틀 크리크>와 <캐논볼> 시리즈에 출연하며 미국진출을 노렸지만 냉정한 북미 관객들은 브루스 리의 아류로 보이는 낯선 동양배우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의 모 영화 잡지에서는 성룡을 '아시아의 D급 배우'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 수 많은 액션 영화를 히트시키며 아시아 전역에서 명성을 얻은 성룡은 1995년 뉴욕을 배경으로 한 액션 영화 <홍번구>를 통해 11년 만에 다시 북미 시장을 두드렸다. 그리고 75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제작된 <홍번구>는 <브로큰 애로우>(공교롭게도 오우삼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다)를 제치고 개봉 첫 주 북미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등 총 320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제법 높은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성룡은 <홍번구>의 성공 이후 할리우드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았지만 <썬더볼트>,<폴리스스토리4>,<나이스 가이>,<성룡의 CIA>등에 출연하며 아시아 팬들에 대한 애정을 보여줬다. 그리고 1998년 동양인 형사와 흑인 형사의 콤비라는 독특한 조합을 내세운 <러시아워>를 통해 북미 1억 4000만 달러, 월드와이드 2억40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렸다. 총 3편에 걸쳐 제작된 <러시아워> 시리즈는 세계적으로 무려 8억49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러시아워> 시리즈를 통해 명실상부한 '월드스타'로 도약한 성룡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액션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8년 동안 3편에 걸쳐 제작된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쿵푸팬더> 시리즈에서는 몽키의 목소리 연기를 맡기도 했다. 성룡은 작년에도 영화 <뱅가드>에서 국제 민간 경호업체의 리더를 연기하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어서와, 이렇게 정신 없는 액션은 처음이지?
 
 성룡은 <홍번구>를 통해 아시아 관객들에게 익숙한 성룡만의 '3NO 액션'을 북미 관객들에게 확실히 보여줬다.

성룡은 <홍번구>를 통해 아시아 관객들에게 익숙한 성룡만의 '3NO 액션'을 북미 관객들에게 확실히 보여줬다. ⓒ 골든 하베스트

 
<홍번구>는 삼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뉴욕을 방문한 아강(성룡 분)이 우연히 다이아몬드 절도 사건에 연루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액션물이다. 사실 결혼식에 참석하고 얌전히 홍콩으로 돌아갔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아강은 위험에 빠진 이웃 엘렌(고 매염방 분)을 도와주겠다며 오지랖을 떨다가 커다란 범죄 사건에 휘말린다(역시 전 세계 어디서나 이불 밖은 위험하다).

성룡의 액션 영화들이 이연걸 영화들과 가장 차별화된 부분은 바로 코믹 요소가 강하게 들어간다는 점이다. 하지만 <홍번구>는 총을 들고 덩치가 큰 서양인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다른 성룡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코믹 요소가 적은 편이다. 성룡이 밖에선 거울이지만 안에선 밖이 보이는 보안 유리를 보며 근육 자랑을 하거나 가벼운 엘렌이 슈퍼 문을 닫다가 셔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공중부양을 하는 장면 정도가 관객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전달한다.

코믹요소가 줄어든 대신 성룡 특유의 주변 사물과 도구를 이용한 현란한 액션들은 <홍번구>에서 더욱 아낌없이 보여준다. 차량 선루프를 통해 몸을 숨겼다가 조수석으로 빠져 나오고 주차장에 있는 안전바를 이용해 오토바이의 추격을 뿌리치고 안전장치 없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 넘는 성룡의 '3No(No Wire, No Stunt, No CG) 액션'은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아마도 서양 관객들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신세계'였을 것이다.

대형 수륙양용 자동차가 등장하는 해변 추격신은 <홍번구>의 북미 개봉을 겨낭한 듯 많은 제작비를 투자한 스케일이 큰 장면이다(성룡은 악당들이 탄 수륙양용 자동차에 쫓겨 도망가는 와중에도 모래 장난을 치던 어린이를 구한다). 영화 중반까지는 서로 총을 겨누고 주먹을 휘두르며 원수처럼 지내던 아강과 토니가 의기투합해 적의 최종보스를 골탕 먹이는 마지막 장면도 상당히 통쾌하다.

여느 성룡 영화들처럼 <홍번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은 역시 'NG모음'이다. 물에서 수상스키로 수륙양용 자동차를 추격하다가 줄을 놓쳐 물에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바이크 스턴트맨들도 위험천만한 촬영 현장 속에서 부상자가 속출한다. 부상을 당한 오른 다리에 깁스를 하고 특수 제작한 신발을 신은 채 카메라를 보고 환하게 웃어 보이는 성룡의 얼굴에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으로 불리는 액션스타의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강한 존재감 과시하며 등장했던 신인배우 엽방화
 
 <홍번구>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데뷔한 엽방화는 아쉽게도 <홍번구>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홍번구>에서 강렬한 이미지로 데뷔한 엽방화는 아쉽게도 <홍번구>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 골든 하베스트

 
성룡은 함께 출연하는 배우의 존재감을 죽이는 배우로 유명하다(홍금보나 원표, 양자경 같은 액션 배우들은 예외). 성룡 영화 대부분이 성룡의 원톱 주연인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로 <폴리스 스토리> 1편에서는 당시 한창 떠오르던 신예 여성 배우 장만옥과 임청하를 동시에 캐스팅하고도 이들을 한꺼번에 '병풍'으로 만들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임청하는 <폴리스 스토리> 이후 성룡과 같은 작품에 출연하지 않았다).

<홍번구>에서는 홍콩에서 가수와 배우를 겸하던 고 매염방과 함께 출연했다. 하지만 매염방 역시 코믹한 장면에만 여러 차례 등장했을 뿐 주인공으로서는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신 비중이 크지 않았던 폭주족 역할의 신인 여성 배우가 색다른 매력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바로 모델 출신의 중국계 캐나다 배우 엽방화가 그 주인공이다.

캐나다에서 모델로 활동하던 엽방화는 <홍번구>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홍번구>에서 폭주족 리더 토니의 애인이자 몸이 아픈 동생과 단 둘이 살고 있는 소녀가장 낸시를 연기한 엽방화는 뛰어난 외모와 당찬 연기로 성룡 혼자 폭주하는 <홍번구>에서 새로운 활기를 불어 넣었다. 특히 나이트 클럽에서 철장을 사이에 두고 호랑이 앞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많은 남성 관객들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홍번구>를 통해 홍콩 금장상 영화제 신인상과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엽방화는 이후 홍콩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지만 아쉽게도 <홍번구>에서 보여준 매력을 뛰어 넘진 못했다. 지난 2011년 TV 영화 <피제씽 파이퍼 로즈>에 조연으로 출연한 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 소식이 없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엽방화는 90년대 홍콩영화, 그 중에서도 성룡영화를 좋아했던 관객들에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 추억의 이름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홍번구 성룡 고 매염방 엽방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