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2월 23일, 포탄이 빗발치는 흥남부두에서 한 척의 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60인승 미국 화물선인 그 배에는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만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역사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람들, 이들을 추적해 한 편의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올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 방송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1년여에 걸쳐 방송 제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편집자말]
미국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길 기다린 지 8개월, 더 이상 미국 출장을 미룰 수 없었다. 그리고 2월 28일, 드디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걱정과 우려가 앞섰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로부터 들을 인생 이야기에 설렘과 기대를 품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LA 도심에서 30분 정도를 달리자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거의 45도는 될 법한 높은 경사에 롤러코스터라도 타는 양 비명까지 지르며 도착한 곳은 산꼭대기 동네로, 왼쪽에는 그리피스 전망대가, 오른쪽으로는 LA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산동네의 개념이 우리나라와 미국은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 자그마한 키에 은발 파마머리를 한, 허리 하나 굽지 않은 당당한 체구의 그녀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지금은 미국 LA에 살고 있는 나이 87세의 이지연 여사, 그녀는 메러디스 빅토리호 승선자다. 
 
"엄마 사진 한 장이 없어요. 워낙 갑자기 정신없이 헤어지다 보니... 그게 제일 안타깝죠."

그녀는 드라마 같은 인생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다.
 
 우여곡절 많았던 인생에 대해 인터뷰 중인 이지연 여사

우여곡절 많았던 인생에 대해 인터뷰 중인 이지연 여사 ⓒ 추미전


 
갑작스러운 엄마와의 이별

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이지연 여사는 1950년 12월 어느 날 중공군이 밀고 들어오기 전까지 비교적 평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16살 소녀 이지연은 여느 날처럼 피아노 레슨을 막 마치고 사촌과 함께 거리로 나왔다. 아버지 없이 홀로 그녀를 키우던 어머니는 자식 교육에 각별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피아노, 그림 등을 가르쳤는데, 교육도시 함흥에서 그렇게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일찍이 독일과 프랑스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와 있던 함흥에서는 여성들도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연했고 다양한 교육의 혜택을 누렸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녀와 사촌 둘이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 성천강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인 만세교를 미군들이 점령하고 통행을 막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이 막히자 그녀는 당황했다. 거리에는 이미 짐보따리를 이고 지고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중공군이 코 앞까지 밀어닥쳐 피난을 떠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그녀들 앞에 지프차가 한대 멈춰 섰다. 그리고는 빨리 차에 타라고 했다. 타고 보니 한국인 통역관 한 명과 미국 군인들이 앉아 있었다. 차는 피난민들로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거리를 지나 그녀들을 흥남부두까지 데려왔다. 그리고 그녀들을 큰 배에 태웠다.  
 
"아저씨, 우리 집 가야 해요."

당황한 나머지 이지연씨는 한국인 통역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가 만류했다.
 
"안 돼 못 가, 죽어. 이 배를 타고 꼼짝도 말고 있어야 돼. 전쟁이 나서 가면 죽어. "

한국인 통역관은 그 배 관계자에게 그녀와 사촌을 부탁하고 사라졌다. 그들은 피난민들이 배에 타기 전 제일 먼저 배에 올랐다. 그렇게 오른 배가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배 위에서 오들오들 떨며 두려워하던 그들은 우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갑판 위 굴뚝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엄청난 피난민들이 배에 올랐고 배는 흥남항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인생 항로는 그렇게 느닷없이 새로운 항구를 향해 출발해 버렸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있는 따스했던 고향과 그렇게 이별을 했다. 배는 그녀를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낯설 섬, 거제도에 내려주고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은 아예 끊겨 버렸다. 어머니라는 울타리가 사라진 세상에서 16살 소녀는 홀로 거친 세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 2막은 그렇게 한없이 당황스럽고 막막하게 시작됐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제각기 살 곳을 지정받았는데 그녀는 64 야전병원 건설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고현 천막촌에 배정을 받았다. 천막촌에 있는 피난민들 중 남자들은 야전병원 건설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여자들은 야전 병원 의사들이 기거하는 숙소의 청소일을 하며 일당을 받아 삶을 연명했다.

먹고 살길을 찾아야 했던 그녀도 할 수 없이 청소일을 하기 위해 의사들의 숙소로 간 첫날, 거실 한가운데 놓인 피아노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피아노로 다가가 '다뉴브강의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하는 동안은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을 수 있었다. 피아노 선율에 빠져 열정적인 연주를 마치자 뒤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외국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서서 연주를 관람하고 있었다.

피아노가 바꿔준 인생 행로
   
 16살, 거제도에서 피아노 연주중인 이지연 여사

16살, 거제도에서 피아노 연주중인 이지연 여사 ⓒ 추미전



남루한 피난민 소녀의 열정적인 연주를 인상 깊게 들은 병원 원장은 통역까지 대동해서 그녀에게 피아노를 어디에서 배웠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등을 자세하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홀로 피난왔다는 사실에 놀라며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저는 학교를 가고 싶어요, 공부를 하고 싶어요."

16살 이지연씨의 대답이었다. 그녀는 엄마의 가르침대로 공부를 계속해야 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원장은 거제도 성당의 신부와 함께 그녀가 갈 수 있는 학교를 알아봐 주었고 결국 그녀는 피난민촌을 떠나 마산 성지여고로 가게 됐다.
 
"어머니가 제게  인생 키(key)를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을 여는 열쇠, 어릴 때부터 엄격하게 교육을 시키고 가르친 것이 결국은 제가 홀로 세상을 살아가는 열쇠가 된 것이죠."

피난민촌을 떠나는 그녀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었던 간호원장이 흰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리고는 "이 봉투는 여고를 다니는 3년 동안은 절대 열지 말고 소중히 보관했다가 여고를 마치고 사회를 나갈 때, 진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열어보라"는 말을 남겼다. 이지연씨는 그녀의 말대로 봉투를 3년 동안 소중히 숨겨두고 열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가정교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악착같이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돈도 없을 뿐더러 호적도 없었다. 고향 친구의 도움으로 호적을 만들었지만 돈이 없어 고민을 하던 그녀는 3년 전 간호원장이 준 봉투가 생각났다. 봉투를 열자 그 안에는 20달러짜리 지폐가 5장이나 들어 있었다. 그 돈은 그녀가 또다시 낯선 땅 서울에서 새 출발을 하는 밑천이 돼 주었다.
 
"대학 생활 내내 가정교사 생활을 했어요. 피아노를 가르치고, 공부를 가르치고, 그러면서도 악착같이 공부를 했죠. 머리 좋은 건 둘째고, 성공의 첫째 비결은 성실이죠. 오직 성실한 자세로 세상에 맞서 나갔어요."

그는 어린 시절 엄마가 가르친 인생 교훈을 잊지 않고 하루하루 살았다.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에 장학생으로 들어간 그녀는 동향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건축 디자인을 하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 태국, 영국을 거쳐 1980년도에 미국에 정착했다. 지금은 아버지를 따라 건축가가 된 그의 아들은 LA에서 '한국 이민 100주년 기념관' 설계를 맡았다.
 
 아들이 지은 집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지연 여사,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들이 지은 집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지연 여사,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 추미전


 
이름도 알지 못하는 통역관 때문에 갑자기 배에 오르며 인생의 행로가 바뀌게 된 이지연 여사. 어머니와 헤어져 고향을 떠나와야 했지만 그는 그 통역관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에 남게 되었다고 해도 그 후의 삶이 어디로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함께 왔던 사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그야말로 혈혈단신으로 세상에 맞섰던 그녀는 비록 어머니와 몸은 헤어져 살았지만 단 한순간도 고향과 어머니를 잊지 않았다. 항상 어머니를 기억하고, 상상 속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며 인생의 항로를 결정해 왔다는 그녀의 유일한 소원은 단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가 보는 것.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걸 아는 그녀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 
    
"우리 고향은 반룡산이 참 웅장해요. 그리고 우리 집 앞에는 버드나무가 참 많았어요. 고향과 어머니 생각은 평생했어요. 나는 묘지도 안 샀습니다. 죽어서 수장을 하면 바다 물결 따라 고향 함흥에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게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헤쳐온 그녀의 슬픈 마지막 꿈, 그런데 그녀의 꿈이 더 슬픈 이유는 이런 꿈을 꾸는 이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 흥남부두를 떠났던 수많은 이들이 그녀와 같은 꿈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역사가 간직한 비극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및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배 거제 피난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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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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