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사이트에서 '이혜영'을 검색하면 가수(노래는 접은 지 꽤 오래 됐지만) 겸 배우, 그리고 지금은 화가로 활동영역을 넓힌 1971년생 이혜영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1993년 3인조 혼성 댄스그룹 1730으로 데뷔했던 이혜영은 1994년 잼의 윤현숙과 함께 코코라는 듀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연기자 변신 후에도 <첫사랑>, <왕초>, <내조의 여왕>같은 인기드라마에 준주연으로 출연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40~50대 이상의 중·장년들에게 이혜영이라는 이름은 <여왕벌>과 <겨울나그네> 등에 출연했던 중견배우가 더 익숙하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배우로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혜영은 1989년 <성공시대>로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최우수연기상을, 1995년에는 연극 <집>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중견배우 이혜영은 영화와 드라마, 연극을 넘나들며 다수의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다. 

20~30대의 대중들에게 중견배우 이혜영은 시종일관 "우리 윤이"(정경호 분)를 찾으며 미스터 촤(소지섭 분)를 멸시하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 속 오들희 캐릭터가 가장 익숙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혜영이 1995년 영화 <헤어드레서> 이후 7년 만에 패기 넘치는 어느 20대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류승완 감독의 액션 누아르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전도연과 이혜영 모두에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전도연과 이혜영 모두에게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 시네마서비스

 
천만 감독 류승완의 첫 번째 메이저 상업 영화

어린 시절부터 워낙 영화를 좋아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무려 2000편이 넘는 영화를 감상했던 류승완 감독은 충무로를 대표하는 '성공한 영화 덕후'다. 중학 시절부터 8mm 중고카메라로 영화를 찍기 시작한 그는 일찌감치 영화판에 뛰어들어 < 3인조 >, <여고괴담>, <닥터K> 등에서 연출부, 소품 담당으로 일했다. 그리고 1996년과 1998년 <패싸움>과 <현대인>을 통해 단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류승완 감독은 자신이 선보였던 두 편의 단편 영화에 새로 찍은 두 편을 붙인 옴니버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선보였다. 제작비 6500만 원에 단 4개관 개봉으로 초라하게 출발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폭발적인 반응 속에 전국 20개 관으로 상영관이 늘었고 서울에서만 6만 관객을 동원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같은 해 인터넷 영화 <다찌마와리>마저 히트시킨 류승완 감독은 충무로 전체가 주목하는 '액션키드'로 떠올랐다.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한 류승완 감독은 이혜영과 전도연이라는 80,90년대 톱배우를 캐스팅해 2002년 3월 <피도 눈물도 없이>라는 장편 데뷔작을 선보였다. 하지만 개봉 당시의 큰 기대와 달리 <피도 눈물도 없이>는 서울관객 22만을 동원하며 흥행에서는 기대만큼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국내에서는 2004년 전까지 공식적으로 전국관객을 집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에 대한 기대는 여전했고 류 감독은 <아라한 장풍대작전>과 <주먹이 운다>, <짝패>, <부당거래>처럼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한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었다. 그리고 2012년 <베를린>과 2015년 <베테랑>을 통해 충무로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으로 우뚝 섰다(물론 중간에 <다찌마와리 :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가 끼어 있지만 '다찌마와리 극장판'은 류승완 감독에겐 꼭 해야 할 '숙제' 같은 작품이었다).

류승완 감독은 지난 2017년 267억 원이라는 제작비에 황정민, 소지섭, 송중기 등 스타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한 <군함도>가 흥행은 물론 평단에서도 아쉬운 평가를 받으며 주춤했다. <군함도> 이후 영화 <엑시트>와 <시동>의 제작에 참여했던 류승완 감독은 작년 초 김윤석, 조인성, 허준호와 신작 <모가디슈>의 촬영을 마쳤다. 류승완 감독은 <모가디슈>가 코로나19로 개봉이 미뤄지면서 현재 또 하나의 차기작 <밀수>(가제)도 함께 준비하고 있다.

'액션장인' 류승완과 정두홍이 만난 첫 번째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전도연(왼쪽)은 라운드걸 출신의 가수 지망생, 이혜영은 왕년의 전문 금고털이였던 택시기사를 연기했다.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전도연(왼쪽)은 라운드걸 출신의 가수 지망생, 이혜영은 왕년의 전문 금고털이였던 택시기사를 연기했다. ⓒ 시네마 서비스

 
류승완 감독은 단편 영화를 만들던 시절부터 감각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액션 연출로 호평을 받으며 일찌감치 '액션키드'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한편 <장군의 아들>을 통해 액션배우로 데뷔한 정두홍 무술감독은 '대한민국 액션의 상징'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충무로를 대표하는 '액션 장인' 류승완 감독과 정두홍 무술 감독은 <피도 눈물도 없이>를 통해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류승완 감독과 정두홍 감독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액션에 한 맺힌 사람처럼 현란한 액션들을 끊임 없이 선보인다. 특히 정두홍 감독은 사채업자 K.G.B(신구 분)의 보디가드로 직접 출연해 그 동안 갈고 닦은 액션을 마음껏 뽐낸다. 류승완 감독의 배려(?)로 대사는 전혀 없다. 엔딩 크레디트에 소개되는 캐릭터 이름마저 '침묵맨'이다(같은 해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에도 출연한 정두홍 감독은 <네멋>에서는 반대로 수다쟁이 무술감독을 연기했다). 

특히 투견장에서 벌이는 독불(정재영 분)과 침묵맨의 일대일 대결은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최고의 볼거리다. 정면대결로는 독불이 침묵맨을 당해낼 수 없지만 극 중에서 독불은 건물에서 떨어지고 차에 치여도 죽지 않는 엄청난 생명력에다가 주인공 보정까지 받은 좀비 같은 캐릭터다. 결국 독불은 기지를 발휘해 극적으로 상황을 역전시키며 침묵맨에게 승리를 거둔다.

흥미로운 액션이 끊임없이 쏟아지는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가 서울 관객 22만에 그치며 흥행에 성공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정재영이 연기한 독불 캐릭터 때문일 것이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말을 내뱉으며 전도연과 이혜영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독불을 보며 매력 있다고 느낄 여성 관객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정재영은 <아는 여자>, <웰컴투동막골>, <나의 결혼 원정기> 등에서 순진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사실 '칸의 여왕' 전도연의 커리어에서는 크게 돋보이지 않지만 전도연에게도 <피도 눈물도 없이>는 <해피엔드> 만큼이나 파격적인 도전이었다. <접속>과 <약속>,<내 마음의 풍금>,<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 멜로 배우의 이미지가 강했던 전도연이 처음으로 액션 누아르 장르에 도전했던 작품이 <피도 눈물도 없이>였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의 영감님들이 친근하다고? 
 
 노배우 신구(오른쪽)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영화 제목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노배우 신구(오른쪽)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영화 제목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업자를 연기했다. ⓒ 시네마 서비스

 
< 1박2일 >의 나영석PD가 2013년 1월 CJ E&M으로 전격 이적했을 때 처음엔 기대보다 우려의 목소리가 더욱 컸다. 정년이 보장된 KBS라는 안정된 직장을 포기하고 고정 시청층이 별로 없는 케이블 채널에서는 천하의 나PD라도 고전할 것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하지만 나영석PD는 tvN에서 <꽃보다 할배>와 <꽃보다 누나>, <꽃보다 청춘>, <삼시세끼> 등 선보이는 프로그램마다 대박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나영석 성공신화'의 시작은 역시 노배우들의 여행기를 담은 <꽃보다 할배>였다. 특히 <꽃보다 할배>의 구야형 신구와 칠순이 넘은 나이에 귀요미 막내를 담당했던 백일섭은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에도 나란히 출연했다. 그렇다고 해서 <피도 눈물도 없이>의 신구와 백일섭이 <꽃보다 할배>처럼 친근하고 푸근한 캐릭터로 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신구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겉과 속이 다른 사채업자 K.G.B를 연기했다(본명은 친근하기 짝이 없는 '김금복'이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비열한 사채업자 역할이다. 고객(?) 앞에선 좀처럼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지만 뒤에서 침묵맨을 시켜 온갖 잔인한 일을 저지른다(물론 침묵맨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한다). 결국 K.G.B는 좀비처럼 살아 돌아온 독불에게 잔인하게 최후를 맞는다.

백일섭은 칠성파 보스로 나온다. '칠성파'라고 해서 뭔가 대단한 폭력 조직 같지만 조직원은 보스를 포함해 총 3명 뿐이고 조직원들도 보스와 비슷한 또래의 노인들이다(심지어 '백골'로 등장하는 김영인 배우는 1940년생으로 백일섭보다 네 살이나 많다). K.G.B에 비하면 그래도 인간적인 사채업자로 나오지만 이혜영의 뺨을 때리면서 거친 욕을 내뱉는 장면을 보면 그나마 생기던 정도 뚝 떨어진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류승완 감독 전도연 정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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