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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개의 두둑을 두둑하게 만들어 준 발자국이 말을 거네. "더 부지런해지라고"
▲ 두둑과 발자국 여섯개의 두둑을 두둑하게 만들어 준 발자국이 말을 거네. "더 부지런해지라고"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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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동안 일구었던 텃밭을 떠나 새 밭으로 이사하느라 분주했다. 오늘은 옛 밭을 깨끗이 청소하고, 남겨진 작물들을 옮겨심는 등 그동안 공덕을 베풀어준 옛 밭을 예쁘게 정리 정돈하자고 텃밭 가족들이 모였다.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는 일이라지만 지난겨울 밭 주인이 보내온 텃밭과의 이별 통보에 서운한 감정이 가득했었다. 그러나 봄이 되니 자연스럽게 새 터를 찾게 되었고, 그 결과 양지바른 황토밭을 얻어서 모두 흥분하며 즐거워했다.

3이란 숫자는 참으로 기묘하게 쓰이는 것 같다. '작심삼일', '삼위일체'부터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와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에 이르기까지, 사용되는 이야기도 부지기수다. 게다가 나는 일만 시간의 법칙을 인용하며, 하루에 세 시간씩 십 년이면 그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공부 잘하는 비법을 강조하기도 했다. 

3년간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된 것들 

농사도 마찬가지였다. 농사(農事)에 농 자도 모르던 내가 3년간 텃밭을 오며 가며 배운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중의 으뜸은 '만물 중에서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라는 진리를 깨달은 점이다.

또 농사를 지으며 자연을 만나고, 그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나서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 순간 내 존재 역시 저절로 그러하게, 선한 모습으로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이런 배움을 얻을 수 있겠는가. 억만금을 주고서라도 배워야 하는데, 공짜로 삶의 이치를 알게 하니 농사야말로 내가 배운 것 중에 최고의 선물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했던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이 농사에 있었음을 체험할 수 있었던 지난 3년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농사지을 땅이 줄어들고, 그 땅 위에 고층 빌딩들이 앞다투어 세워지고 있다. 좁은 지역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논밭에 메워지고, 별의별 건물들이 등장한다.

이번에 새로 얻은 땅의 바로 옆 자락에는 말도 많았던 종합 대형병원이 들어선다고, 땅값이 말도 못 하게 올랐다. 지금은 외길인 이곳도 머지않아 옆 논을 길로 만드는 공사를 할 것이다. 흙이 사라지고 시멘트가 가득한 곳에 살아야만 세련된 현대인인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의 세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밭에서 거둔 배추종으로 만든 김치,배추종김밥,그리고 매화향완자
▲ 아침 새참 3종세트 밭에서 거둔 배추종으로 만든 김치,배추종김밥,그리고 매화향완자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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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배추쫑 김밥이고, 이것은 매화 향이 묻어나는 고기완자예요. 이 땅 위에 있었던 배추 봄동에서 올라온 쫑으로 김치를 담갔는데 쫄깃쫄깃, 아삭아삭 정말 별미예요. 그래서 김밥에도 한 번 넣어봤어요. 그리고 이 속에 있는 모든 채소는 우리가 직접 기른 것들이예요."

"으흠, 쫑김치도 맛있고, 쫑 김밥은 처음 먹네요. 향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참 좋아요. 저절로 건강해지는 아침 밥상이네요. 행복이 이곳에 있습니다. 올해도 농사 잘되겠습니다."

작년 겨울초에 뿌렸던 청갓과 홍갓, 시금치, 당근들이 겨울살이가 힘들었는지, 훤칠하니 잘 자라지 못했다. 대신에 쫀쫀한 곤약처럼 탱글거리는 결만큼은 싱싱함 그 자체였다. 시금치와 갓은 서너 번 캐다가 반찬해 먹었고, 당근은 장아찌를 담갔다. 음식을 오래 보관하며 음미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발효 식품인 장아찌여서, 밭에 뒤처진 채소들을 가져다가 만들었다. 

며칠 전 경운기로 새 밭의 땅을 일구면서 전 주인이 못다 캔 배추가 웃자라서 쫑으로 나왔는데, 다행히도 꽃대가 솟지 않아서 배추쫑이 부드러웠다. 친정엄마 말씀에 따르면 예전에 보릿고개 넘을 때, 산하의 풀이란 풀은 모두 다 먹거리였는데, 그중에서 배추 쫑은 손으로 한 번에 톡 하고 꺾어지면 먹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질겨져서 먹기가 사나운 것이라고 했다. 그 쫑을 따다가 김치와 나물을 만들고 김밥재료로 쓰니 맛이 좋았다.

비록 풍성한 매실 수확은 못 했지만 밭마다 만나는 매화나무는 초보 농군들의 심성을 녹여주었다. 옛 밭에는 청매실이 달리는 청매화나무였는데, 새 밭에는 홍매화처럼 붉은기운이 맴도는 매화나무가 있었다. 그 향이 어찌나 진한지, 거름 냄새를 거두고도 천 리를 갈 만큼 향기로웠다.

이해인 시인의 <매화앞에서>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매화를 보면서 먼길을 걸어온 어여쁜 봄이 마침내 여기 앉아 있네.'

매화만큼이나 아름다운 텃밭 식구들의 마음
 
누구보다 먼저 봄을 데려와 앉힌다는 매화나무 꽃가지와 향기에 황홀하다
▲ 파란하늘 아래 피어난 매화나무 꽃가지 누구보다 먼저 봄을 데려와 앉힌다는 매화나무 꽃가지와 향기에 황홀하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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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지의 끝자락에 달린, 봄을 가져온 매화꽃잎을 따서 냉동고에 넣어두었다. 때가 되면 텃밭 지인들에게 매화차 한 잔씩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아침에 김밥과 고기쌈을 준비하면서 매화꽃잎을 함께 놓으니 매화 향기 가득한 완자전이 되었다. 더불어 매화차 한잔 우러내서 마시니 부산한 아침을 맑아졌다. 오늘 아침 참을 준비한 속내가 따로 있었다.

해마다 텃밭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똑같다. '내 땅을 더 좋은 땅으로'. 새 밭으로 이사 오면서 밭을 준비해준 지인은 많은 수고를 했다. 땅 알아보기부터 누가 참여할 것인지, 거름은 몇 개나 준비해야 되는지, 어떤 땅을 누구에게 나눠주어야 하는지 등등을 고민했다.

해마다 소외계층 돕기를 위한 기부금 마련을 위해서 텃밭을 경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인들은 언제나 나를 위해 먼저 좋은 땅을 양보한다. 그 마음을 잘 알면서도 주책없이 꼭 나서서 이 땅은 내 것이라고 말하면 얼마나 기가 막힐 것인가 싶었다.

이번에도 정남향에 위치한 밭 두둑을 가장 먼저 배분받았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들마다 이곳이 제일 좋은 땅인데, 아무거나 다 잘 커요. 복 받았네"라며 말을 건냈다. 토질을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황토가 빛이 날 정도로 좋은 땅이었다. 김밥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했다.

"올해도 제가 열심히 농사지어서 기부금 마련도 많이 하고 여러분들에게 먹거리 기부도 많이 할게요. 좋은 땅 양보해주셔서 고마워요. 종종 이렇게 아침 참도 가져오구요.

시인의 말대로 제일 먼저 매화 끝에 피어나는 나의 봄 속에서, 텃밭 가족들이 드디어 식구가 되어간다. 함께 밥을 먹고 눈길을 맞추고, 손짓 하나로 많은 것을 알 정도로 통하는 식구가 되어가는 아침이었다. 밥상을 거두고 나니, 예보된 주말 비가 한 방울씩 내렸다. 천수답은 아닐지라도 초봄 농사에 비처럼 귀한 양식이 있던가. 식구들 모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이제 초보자를 뗀 농군들의 텃밭이 다시 또 울렁거린다. 만물이 움트는 봄 마당에서 펼쳐지는 씨앗과 종자들의 불끈거리는 힘자랑을 기대한다. 자연이 사람과 상생하고 서로에게 유익한 결실이 되는 조화를 희망한다. 소외된 타인에 대한 애정이 올해도 피어나길 소망한다.

태그:#텃밭농사, #매화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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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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