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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기자말]
끝나지 않은 헤밍웨이 루트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라 보델기타 델 메디오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라 보델기타 델 메디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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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박물관을 나와 점심 먹으러 가는 길. 가이드는 우리를 다시 올드 아바나 중앙으로 안내했다. 스페인 식민시대의 건물들이 즐비한 좁은 골목이었는데, 많은 여행객들이 어느 가게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헤밍웨이가 모히토를 마시기 위해 단골로 들렀다던 라 보델기타 델 메디오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헤밍웨이가 구두를 닦으러 자주 들르던 구두잡화점인데 주인이 모히토를 한 잔씩 주기 시작하면서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이 되었다고 한다.

바텐더 뒤로 술집 중앙에는 헤밍웨이가 남겼다는 그 유명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쿠바 오기 전 섭렵했던 모든 여행 책자들이 무슨 주문처럼 읊었던 그 구절이었다.

"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따, 내 다이끼리는 엘 플로리디따)"


맛은? 잘 모르겠다. 그 뒤로 매일 마신 모히토들과 비교해서 그다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컵의 모양도, 들어가는 재료도, 심지어 재활용하는 빨대도 똑같았다. 다만 바텐더가 쉴 새 없이 모히토를 만드는 것과 좀 비싼 가격과 건물 곳곳에 남아있는 헤밍웨이와 관광객의 흔적만이 다를 뿐이었다.

이는 그날 저녁 들렀던 엘 플로리디따도 마찬가지였다. 헤밍웨이가 단골로서 다이끼리를 자주 마셨다던 그곳은 역시나 많은 여행객들로 붐볐고, 우리는 심지어 서서 다이끼리 맛을 봐야 했다. 오랜 시간 눈치를 보고 나서야 술집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헤밍웨이의 흉상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여유를 갖고 맛을 음미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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잽싸게 모히토 한 잔을 다 마시자 가이드는 우리를 올드 아바나의 중심가 오비스포 거리 중앙에 위치한 암보스 문도스 호텔로 안내했다. 그곳은 헤밍웨이가 7년 동안 묵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고 했다.

역시나 헤밍웨이의 흔적을 따라 북적이는 사람들. 오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제 그가 묵었던 511호에 가니 그가 있었던 당시를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었다. 방 한구석 진열장에는 전 세계에서 출간된 <노인과 바다>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당당히 한글본도 그 중 하나로 끼어 있었다.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루프탑으로 올라가자 더욱 기가 막힌 풍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스페인 총독 관저 너머로 아바나 항과 예수상이 서 있는 카사블랑카 언덕이 보였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과 바다.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헤밍웨이는 항상 이곳을 책을 집필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말했다던데,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방
 헤밍웨이가 머물렀던 호텔방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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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바라본 아바나 풍경
 암보스 문도스 호텔에서 바라본 아바나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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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비에 도착하니 여전히 호텔 앞은 여행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헤밍웨이의 흔적을 느끼려는 이들이었다. 이러니 쿠바 정부가 헤밍웨이 루트를 고민할 수밖에. 혁명의 아이콘 체 게바라가 자본주의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품이 되었듯이, 결국 쿠바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헤밍웨이가 가장 쿠바인다운 인물로 각광받고 있는 현실이었다.

쿠바인들이 사는 법

호텔을 나와 식당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서 마주친 분장행렬. 만면에 웃음을 띤 채 관광객들 한 명 한 명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네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아바나가 왜 관광의 도시로 유명한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보는 것만 해도 유쾌해지는 모습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일행 중 한 명이 그들을 카메라에 담고자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지나가던 분장행렬 중 키다리 피에로가 다가오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잉? 의아했으나 금세 뜻을 알아차렸다. 내가 꼬히마르 해변이나 럼 박물관에서 당했던 것처럼 자신의 사진을 찍었으니 돈을 달라는 것이었다. 당황한 일행이 아직 찍지 않았다며 핸드폰을 보여주기까지 하자 피에로는 그제야 아쉽다며 자리를 떴다. 허. 그놈의 인심 참. 그냥 지나가는 행렬을 찍어도 돈을 달라고 하다니.
 
쿠바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
 쿠바 식당에서 볼 수 있는 흔한 풍경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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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황당함은 점심 식사 때도 이어졌다. 가이드는 우리를 올드 아바나 중심의 꽤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으로 안내했는데,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밴드가 음악을 연주하고, 그에 맞춰 무용수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어지자 그들은 각 테이블 당 손님 한 명씩 이상을 불러내어 단체로 살사를 추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적도의 국가, 쿠바의 정열인가. 다행스럽게도 우리 일행 중에는 쿠바 여행을 위해(?) 살사를 배운 이가 있어, 굳이 몸치인 내가 나가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냥 보고 즐기면 될 뿐이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날 때쯤 되자 가이드가 팁으로 돈을 걷기 시작했다. 어젯밤 술을 마시며 보았던 길거리 공연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이 식당 소속이 아니며, 오로지 팁으로만 먹고 산다는 설명이었다.

쿠바까지 여행 와서 팁 몇 푼에 정색하느냐는 소리를 들을까 봐 아무렇지 않은 듯 돈을 꺼냈지만 기분은 썩 탐탁지 않았다. 누군가는 레스토랑에서 조용히 밥만 먹고 싶을 수도 있을 텐데 그런 기본 선택권까지 뺏겼다는 불쾌함 때문이었다. 단체 여행객을 너무 봉으로 취급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열정의 나라라지만 모두에게 그 열정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쿠바 관광산업의 또 다른 의미
 
관광객을 상대로 공연을 하는 쿠바 밴드
 관광객을 상대로 공연을 하는 쿠바 밴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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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불만도 잠시, 쿠바의 역사를 떠올리며 이 역시 역사의 필연적 산물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구소련 붕괴 후 쿠바는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관광업을 적극적으로 부흥시켰다. 본디 쿠바는 미국의 반식민지시절부터 카리브 해의 가장 유명한 휴양지였는데, 59년 혁명 이후 미국과 단절하면서 주춤했던 관광업을 외화벌이의 주요 수단으로 내세운 것이다.

쿠바 정부는 캐나다나 유럽 등 미국을 제외한 서구인들을 적극 유치했으며, 이렇게 벌어들인 외화는 군대를 비롯해 국가권력 유지에 유용하게 쓰였다. 문제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그 수익이 일반 국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인데, 쿠바인들은 이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여행객을 상대로 돈 벌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창안해냈다. 지금 내가 방금 겪었던 사진 모델이나 연주를 통한 팁이 바로 그중 하나일 것이다.

숙연해졌다. 흔히 북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동구권 붕괴 이후 1994~1998년 '고난의 행군' 시기를 여기 쿠바 사람들은 이렇게 해결했구나 싶었다. 북한은 남북분단이라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핵을 포기하지 못하고 결국 인민들이 굶어죽기까지 했는데, 쿠바 사람들은 관광산업을 통해서 그래도 각자 살 길을 찾아 나섰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다.

물론 북한도 그 이후 장마당이 열리고 배급 대신 자본주의 시스템을 운용하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지금의 쿠바만큼 변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분단의 조건은 핵이라는 고차 방정식을 만들어냈고, 아직도 우리는 그 속에서 뚜렷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쯤 평양에서 북한 사람들과 허물없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조용해진 아바나 거리에서 펄럭이는 캐리비언의 해적 깃발
 조용해진 아바나 거리에서 펄럭이는 캐리비언의 해적 깃발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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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식사를 마치고 나온 올드 아바나는 어째 조용했다. 점심 먹기 전 느꼈던 그 분주함과 생동감은 사라지고 나른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시에스타 때문인 듯했다. 쿠바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만큼 점심 후 낮잠을 자는 풍습이 이어진다고 했다. 거리에는 쿠바인 대신 나를 포함한 이방인들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함께 웃고 즐기던 주인들이 사라지고 객만 남은 상황. 이 역시 쿠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감정이었다.

자, 이제 우리는 혁명박물관으로 간다!

태그:#쿠바, #아바나, #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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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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