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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 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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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전쟁은 백성(민초)들의 권리의식을 일깨운다. 임진왜란도 다르지 않았다. 국난을 당하여 군주를 비롯 양반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기존의 지배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왕궁에 불을 지르거나 황소 한 마리에 왕자들의 거처를 일본군에 알려주었다. 많은 민초들은 스스로 의병이나 승병이 되어 왜군을 물리치는데 앞장섰다. 이런 과정을 통해 권리의식이 신장되었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이를 반포하면서 공문서에 훈민정음을 사용토록하였다. 정인지ㆍ권제 등이 『용비어천가』를 한글로 지었다.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시가였다. 또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아들인 수양대군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대중의 불교교화를 위해 『석보상절』을 지었다. 한글로 된 최초의 산문 작품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한글은 여성과 아이들이나 배우는 '언문' 또는 '암클'로 격하되고 조정과 신료ㆍ유생들은 한문을 전용하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언문'이 암암리에 통용되고 있었고 지배층은 허울좋은 권위의식에서 한문을 썼다. 임진년에 전쟁이 터졌다. 임금은 물론 관리나 수령 할 것 없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다급해지자 그때야 백성이 떠올랐다.

선조는 오직 믿을 것은 백성뿐이라고 여겨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전쟁에 참여토록 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같은 날 선조가 황해도에 내리는 교서를 모든 백성이 알 수 있게 작성하라고 전교한 이유도 백성들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석 11)

황해도에 내릴 교서는 이미 지어 왔는데 사인(士人)들은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이 교서는 사인이 있는 곳에 효유(曉諭)하도록 하라. 또 이두를 넣고 지리한 말은 빼어 버려 조정의 방문(榜文)처럼 만들고, 또한 의병장이나 감사 등에게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여 촌민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 (주석 12)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
 국보 제151호 조선왕조실록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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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국난을 당해 급하다보니 백성들이 쓰는 글을 통해 방문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당시 언문(한글)이 일반적으로 꽤 통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언문 관련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이이첨이 광해군 대에 실권을 장악하자 그의 권력에 빌붙으려는 사대부 무리들로 집 앞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이첨은 이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주면서 자신의 무리를 불려 나갔고 공론화하고픈 의견은 스스로 소장을 써서 자신의 무리에게 나누어 주어 상소를 올리도록 조작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은밀한 사안은 언문으로 자세하게 써서 김 상궁에게 보내 왕에게 완곡히 개진하도록 하여 반드시 허락을 얻어냈다.

이이첨과 김 상궁 사이에는 수없는 언문 편지가 오갔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국가의 중대사는 이이첨과 김 상궁 사이에 오간 언문 편지에 담겨 있었다. (주석 13)


허균이 한글로 『홍길동전』을 쓴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책의 불온성을, 그래서 간행을 멈추고 은밀히 숨겨두었다. 몇 해 뒤 참형 당할 때 사헌부의 '죄목' 중에 『홍길동전』은 끼지 않았다. 

  
주석
11> 정주리ㆍ서정곤, 『조선언문실록』, 48쪽, 고즈원, 2011.
12> 『조선왕조실록』 선조25년(1592) 8월 1일, 앞의 책. 
13> 정주리, 서정곤, 앞의 책, 9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허균, # 허균평전 , #자유인_허균, #한글,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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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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