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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사장·회장·명예회장을 지낸 전달출 신부의 2010년 선종 소식을 알린 <매일신문> 기사.
 <매일신문> 사장·회장·명예회장을 지낸 전달출 신부의 2010년 선종 소식을 알린 <매일신문> 기사.
ⓒ 매일신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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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도시인 대구를 지탱하는 신문이 <매일신문>이다.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천주교대구대교구가 그러한 (보수적) 성향을 갖고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의 아픔을 이용한 만평을 실은 <매일신문>이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그 불똥이 천주교로 튀고 있다. <매일신문>의 최대주주가 천주교대구대교구(대구교구)인 점과 과거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대구교구 신부이면서 <매일신문> 사장이었던 인물이 참여했던 점이 재차 거론되며 비판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상술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장은 24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1980년 국보위가 만들어질 때 천주교대구대교구 출신이 두 명 참여했다"라며 "특히 그중 한 명은 <매일신문> 사장이었던 전달출 신부였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신자 중엔 이효상이란 인물이 있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국회의장까지 하며 독재와 함께한 대표적 인물이다"라며 "그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 서병조와 적극 만나는데 이때 대구지역 천주교가 친일의 모습을 띤 것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이효상의 아들이 대구대교구에 있던 이문희 신부인데 그가 대구대교구장(1986~2007년)을 지내면서 (대구의 정치) 지형이 강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이상술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장.
 이상술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장.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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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가 신자 고소하기도

1980년 5월 31일 만들어진 국보위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 및 5.18민주화운동 이후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해 만든 기구로 1980년대 군부 독재를 상징하는 곳이다. 당시 이곳에 대구교구의 전달출·이종흥 신부가 참여했다. 당시 각각 <매일신문> 사장,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었다.

<매일신문>은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된 직후인 11월에 진행된 언론통폐합 조치에서 살아남았다. 당시 '1도 1사' 방침에 따라 <영남일보>가 <매일신문>에 흡수 통폐합됐다.

대구교구의 독재 부역과 관련해선 과거에도 여러 차례 거론된 바 있다. 특히 2018년엔 방송에서 이 문제를 지적한 신자를 대구교구가 고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9년 1월 대구지검 서부지청은 "고소인(천주교대구대교구유지재단)은 전달출·이종흥 신부의 국보위 참여 경위에 대해 전달출은 대구·경북 지역 언론사 대표로서, 이종흥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처장으로서 참여했지 재단의 소속 신부로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두 사람이 재단 소속의 신부였던 사실은 명백하다"며 사건을 재판에 넘기지 않았다(불기소).

이상술 지부장이 속한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 등은 지난 23일 매일신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장의 공식 사과와 만평 작가 교체 등을 요구했다. 이 지부장 등은 이날 <매일신문> 측과 면담을 갖기도 했다.

이 지부장은 "<매일신문>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이런 데보다 훨씬 심하다"며 "(면담에서)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만평으로) 광주에서 불편함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외엔 특별히 사죄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라고 떠올렸다.

아래 이 지부장과의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한편 5.18구속부상자회 대구경북지부는 1980년 5월 전후로 대구·경북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이들로 구성돼 있다. 1980년 당시 경북대 2학년이었던 이 지부장은 5.18민주화운동 직후 이 사실을 알리는 유인물 등을 배포하다 7월 체포돼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5.18민주화운동의 고통을 이용해 정부 비판 만평을 실었다가 비판에 직면한 <매일신문>.
 5.18민주화운동의 고통을 이용해 정부 비판 만평을 실었다가 비판에 직면한 <매일신문>.
ⓒ 5.18기념재단,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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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어도 할 말 없어... 다른 지역 함께 고민해달라"
  
- 우선 이번 <매일신문> 만평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나.
"새벽에 일어나 휴대폰을 보니 채팅방에 (만평과 관련된) 메시지가 여러 개가 와 있더라. 나도 다른 채팅방에 공유했다. 그냥 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해 기자회견도 준비하게 됐다."

- <매일신문>은 대구시민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큰 영향력을 가진 신문이다. 정치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도시인 대구를 지탱하는 신문이기도 하다. 특히 이를 뒷받침하는 천주교대구대교구가 그러한 (보수적) 성향을 갖고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 기자회견에서도 천주교대구대교구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이유는?
"1980년 국보위가 만들어질 때 천주교대구대교구 출신이 두 명 참여했다. 특히 그 중 한 명은 <매일신문> 사장이었던 전달출 신부였다(나머지 한 명은 대구대교구 사무총장을 지냈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 사무처장이었던 이종흥 신부). 신자 중엔 이효상이란 인물이 있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국회의장까지 하며 독재와 함께한 대표적 인물이다('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이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고 말해 최초로 지역감정을 조장한 인물로 꼽힘). 그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 서병조와 적극 만나는데 이때 대구지역 천주교가 친일의 모습을 띤 것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이효상의 아들이 대구대교구의 이문희 신부인데 그가 대구대교구장(1986~2007년)을 하면서 (대구의 정치) 지형이 강하게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일신문>에 그러한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 <매일신문>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조선일보> <동아일보> 이런 데보다 훨씬 심하다."

- 기자회견 후 <매일신문> 측을 만났다고 들었다. 어떤 반응이던가.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번 만평으로) 광주에서 불편함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 외엔 특별히 사죄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더라. 뿐만 아니라 '<매일신문>은 대구·경북의 70% 이상이 지지하는 신문이다. 신문 편집에 지나친 요구를 하지마라'는 취지의 발언도 있었다."

- 그런 반응이었다면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을 것 같다.
"대구·경북에서 천주교와 <매일신문>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무언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망감을 느꼈지만 앞으로 어떻게 변화를 요구할 것인지 고민도 하게 됐다."

- 이번 만평 사태를 놓고 대구·경북 지역을 싸잡아 비하하는 여론도 종종 보인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 같다.
"이번 사태가 워낙 큰 잘못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긴 하다. 대구·경북도 변화해야 한다. 다만 그러한 폄하가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으니 다른 지역 분들도 함께 고민을 해줬으면 한다."

<매일신문>은 문제가 된 만평과 관련해 21일 입장문을 내고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광주민주화운동과 그 정신을 폄훼할 의도는 추호도 갖고 있지 않다"라며 "(만평이) 광주시민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건 얼토당토않은 주장"이라고 항변했다. 또 "<매일신문>을 향해 그런 주장을 펴는 건 일관되게 현 정부에 대해 너무 뼈아픈 비판을 해왔기 때문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대구경북 1등 신문"을 자처하는 <매일신문>의 소개글. <매일신문>의 발행인(대표이사)은 199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이상택 신부이다.
 "대구경북 1등 신문"을 자처하는 <매일신문>의 소개글. <매일신문>의 발행인(대표이사)은 1990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이상택 신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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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매일신문, #천주교, #대구, #국보위,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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