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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 3주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날을 전후로 한 한반도의 '봄날'을 경이롭고도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다시금 냉각된 오늘의 남북 관계는 답답함을 넘어 절망감에 무력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남북 정상과 미 대통령, 주변국 정치 지도자들의 말과 행보에 걸었던 일말의 기대가 산산조각나면서 남북 화해와 평화 공존을 위해 보통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도무지 없다는 무력감 말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이 엮은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라는 책을 마주했다. 

놀라웠다. 한마디로 이 책은 무력한 내가, 또한 보통 시민인 우리가 한반도의 영구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즐거운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남녘 사람들의 편지를 입에 문 까치들이 휴전선을 가벼이 넘어 이른 아침 북녘 동포의 집집마다 명랑하게 내려앉는 상상부터 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겹고 애틋하고 눈물겹고 유쾌하고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 사람들 엮음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 사람들 엮음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
ⓒ 진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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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육로, 전기, 전화가 끊기고 편지의 왕래까지 할 수 없게 됐다. 70년이 훨씬 넘은 세월이다. 우리의 편지가 닿을 수 없는 세계 유일의 땅이 바로 우리의 분신과도 같은 북녘땅이라는 사실은 새삼 기이하기가 이를 데 없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로, 뜬금없이도 기약 없는 편지를 쓰게 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반짝반짝 중학생에서 칠순 노인, 애타는 이산가족에서 감동적인 금강산 관광을 갔다 온 사람에 이르기까지. 언젠가는 북녘 동포들이 읽게 되리라 믿으며 편지를 쓴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그리고 그 사연은 정겹고 애틋하고 눈물겹고 때론 더없이 유쾌하기도 하다.

25년 전 중국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닿았다는 전직 교장(이용학)은 천지를 향해 '부산에서 챙겨간 소주를 한 잔 올리며 눈물이 났다'고 고백하고 (53쪽), 언제던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 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는 25년 차 간호사(한미영)는 '평양 산원에서 통일 동이를 받아 보고 싶'은 마음을 뜨겁게 전한다(47쪽).

'원산포 60이 넘은 어느 어부 양반께' 보내는 편지에서 '당신이 명태 잡아 부산으로 싣고 오면 내가 다 팔아줄게' 호언을 하기도 한 이는 전직 시청 공무원(석태호)이고(30쪽), 2002년 한국을 방문하자마자 철조망이 쳐진 휴전선 앞으로 달려간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이렇게 살벌할 수 있나요? 같은 형제끼리 왜 이럽니까? 남북을 가로막은 철책에 비하면 베를린 장벽은 아무것도 아니네요"라며 놀라워하더라는 얘기(63쪽)를 북녘 동포에게 전해 주는 이는 부산의 한 대학의 독문학자(장희창)다.

그런가 하면 '해운대에 사는 평범한 아줌마'(이말옥)는 '원산에 있는 말순에게'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송아지 핥아주던 어미 소의 순한 눈'에 대한 이야기를(115쪽), '스물한 살에 부산을 떠나 서울, 미국살이를 거쳐 2016년 귀국해 제주도에 자리를 잡은' 50대 여인(홍서영)은 '한수풀 해녀학교'를 다닌 인연으로 해녀가 되었다는 이야기(286쪽)를 북녘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에게 가만가만 들려준다.

북녘으로 보내는 편지 모음집에 이산가족 사연이 없을 리 없지만 그것은 생략키로 하자. 이산가족이든 아니든 남과 북의 보통 사람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친구처럼 만나고 싶은 마음은 다음의 편지 구절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니까.
 
'나(1951년생 윤성하)는 정치, 사상 이런 건 잘 모릅니다. 그런 이념을 떠나 순수하게 남북 동포끼리라도 먼저 왕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임진강 강물은 유유히 흐르고 또 굽이돌아 흘러 한강에서 만나듯, 또 한강 물은 바다로 흘러가 해류를 타고 다시 올라가듯, 우리 민간인들만이라도 빠른 시일 안에 아주 자연스럽고 스스럼없이 서로 왕래할 수 있는, 아니 편지라도 자주 주고받을 수 있는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봅니다.' (292쪽)

1만 통의 편지가 모인다면 

"작년 6월 북한이 대북전단지 살포를 이유로 2018년 4.27 판문점 선언과 함께 개설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물을 폭파했을 때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좀 더 참고 기다릴 일이지 그런다고 건물을 폭파까지 하나...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생각해보니 북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일부 남녘 사람들이 북으로 날려 보낸 대북 전단지의 사진과 글은 우리가 봐도 낯 뜨거운 것이었지요. 그들은 오죽했을까요? 나부터 북녘 동포에게 정성을 담아 쓴 편지로 진정한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편지를 써 보면 상대를 알게 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고, 자연스레 존중하게 됩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야말로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바탕이고 거름인 거지요."


북녘동포에게 편지 쓰는 일을 처음 제안하고 부산 해운대에서 그 모임을 이끌고 있는 이상석 대표(69세, 전 한국글쓰기연구회 회장)의 말이다. 지난 21일 그와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한 통의 따뜻한 편지로 우리 마음 안의 38선 철조망부터 녹이자는 그의 뜻은 일찍이 그렇게만 된다면 '통일은 다 됐어'라고 말한 '통일 할아버지' 늦봄 문익환 목사의 뜻과 바로 통한다. 문 목사께서는 말했었다.

"어머니, 그렇군요. 분단의 장벽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군요. 불신, 반목, 질시, 적개심은 마음에 있는 거니까요."

이번 책에는 130여 통의 편지가 실려 있지만 다음의 모음집에는 더 많은 편지가 담기기를 '북녘 동포에게 편지쓰는 사람들'은 소망하고 있다.

"100통을 모으면 개인 일로 그치겠지만 1000통을 챙기면 사회가 주목하고 10000통을 쌓으면 세계가 응원할 것입니다."

이상석 대표의 바람이고 의지고 간절한 호소다.

덧붙이는 글 | 편지 보낼 곳 : 부산시 해운대구 좌동순환로 237 세실빌딩 301호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 사람들. 또는 전자메일 koreletters@gmail.com


꿈같은 편지를 씁니다 - 우리는 북녘동포에게 편지를 쓴다

북녘동포에게편지쓰는사람들 (엮은이), 예린원(2021)


태그:#4,27 판문점 선언, #북녘동포에게 편지 쓰는 사람들, #늦봄 문익환, #통일은 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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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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