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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라면 가여린 수양버들 가지나 연둣빛 새잎이나 가만가만 흔드는 바람이지만 더러 꽃샘바람, 잎샘바람 같은 개구쟁이 같은 바람도 있다. 이규보(1168~1241, 고려 문인)가 쓴 한시에 '투화풍'(妬花風)이 있다. '피어난 봄꽃을 시샘하는 바람'이니 말 그대로 '꽃샘바람'이다. 이 시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꽃 필 때 사납게 부는 바람도 잦아서 (화시다전풍·花時多顚風)
사람들은 꽃샘바람이라 하네 (인도시투화·人道是妬花)
(가운데 줄임)
바람이 맡은 일은 노래하는 춤추는 일 (고무풍소직·鼓舞風所職)
만물에 베푸는 손길에 사사로움 없어라 (피물무사아·被物無私阿)
떨어질 꽃 아껴서 바람 불지 않으면 (석화약정파·惜花若停簸)
그 꽃, 영원히 자라날 수나 있겠는가. (기내생장하(其奈生長何)
 
이규보는 노래하고 춤추는 일이야 본디 바람이 맡은 일이니 꽃샘바람은 잘못 된 말이라고 꼬집는다. 이규보 말처럼 꽃샘바람쯤이야 누구라도 나무랄 까닭이 없다. 그러나 봄바람 같지 않은 바람도 있다. 조선 중종 때에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정수강(1454 ~1527)은 <월헌집>에 이규보처럼 '투화풍'(妬花風)이라는 시를 남겼다. 일부만 옮겨본다.
 
밤새 바람 사납게 불어 모든 것 쓸어갔네 (일야광풍홀소거·一夜狂風忽掃去)
새벽엔 나무란 나무 다 뽑혀 텅 비었네 (효래수수진성공·曉來樹樹盡成空)
사람들 꽃샘바람이라고들 하지만 (인언차풍능투화·人言此風能妬花)
나는 꽃샘바람 아니라고 말하고 싶네 (아언투화비차풍·我言妬花非此風)
- 한국고전종합DB(https://db.itkc.or.kr) ≪월헌집≫ 4권 '칠언고시'
 
봄날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바람이라면 누가 봐도 태백산맥 동쪽 바닷가에 부는 바람이다. 어쩌면 정수강이 강원도관찰사(1507. 9.~1509. 7.)로서 양양 같은 지역을 다닌 경험을 '양양유객희음'(襄陽留客戲吟)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그때 겪은 바람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잘 알다시피 봄철 동해안에 부는 바람은 태풍 때 부는 바람 버금 간다. 간판을 와장창 날리고 나무를 우왁스럽게 뽑아 버린다. 겨우내 바싹 메마른 산천에 불씨라나 떨어질라치면 길길이 살아나 삽시간에 사람이고 집이고 나무고 집어삼킨다. 이 바람을 일컬어 흔히 '양간지풍', '양강지풍'이라고 한다.

말밑을 따라가 보면 <택리지>(이중환, 1751·영조 27년)에 나온다. "통천과 고성엔 눈이 많이 내리고 양양과 간성에 바람이 세서 (겪어보지 않으면)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려울 정도"(通高之雪 襄杆之風 一口之難說)라고 적었다.

오늘날 통천은 휴전선 북쪽 강원도에 든다. '양간지풍' 할 때 '양간'(襄杆)은 양양과 간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양강지풍' 할 때는 '양강'(襄江)은 양양과 강릉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은 사전 올림말이 아니라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으면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하고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보는 동해안 바람과 산불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에서 '산불'을 검색어로 찾아보면, 모두 예순두 건이 나온다. 이 가운데 동해안에서 일어난 산불을 다룬 기사가 열두 건이다. 산불이 일어난 때로 보면 대개 음력 2월~4월 사이다.

산불이 일어난 까닭을 중종 19년(1524)에는 '산불이 바람을 따라 일어나'(因風而起), 현종 7년(1666)에는 '큰바람이 불고'(大風), 숙종 23년(1697), 숙종 6년(1680)에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狂風大作), 숙종 23년(1697)년에는 '바람이 크게 불어'(大風), 순조 4년(1804)에는 '사나운 바람이 크게 일어나'(獰風大作) 같이 써놓았다. '대풍, 광풍, 영풍'이라고 했지 '양간지풍'이란 말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한 피해만으로 톺아보면 민가 7576채가 불탔고 235명이 불에 타죽었다. 그게 죄다 2~4월에 사납게 불어댄 바람과 산불 탓이다.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나. 저 높은 자리에서 에헴 하는 사람들이야 무슨 무슨 '풍'이라고 해도 그 바람을 견디며 모진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은 무슨 무슨 '바람'이라고 이름 짓지 않을까. 해마다 봄이면 바람 사납게 불어 불이 나고 집이 흔적 없이 타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목숨 잃는 일 허다했을 텐데 강원도 사람들은 저 멀리 한양에 앉은 양반들이 머리로 지어낸 말을 그대로 따라 썼을까.

우리 말로 만든 바람 이름

이익은 <성호사설>(제2권 천지문 '팔방풍', 한국고전종합DB 자료 참고)에서 다음과 같이 바람 이름을 적어놨다.
 
동풍을 사(沙)라 하는데 곧 명서풍(明庶風)으로 <이아(爾雅)>의 곡풍(谷風)이라는 것이요, 동북풍을 고사(高沙)라 하니 곧 조풍(條風)이요, 남풍을 마(麻)라 하니 곧 경풍(景風)으로 <이아>에 개풍(凱風)이라는 것이요, 동남풍을 긴마(緊麻)라 하니 곧 경명풍(景明風)이요, 서풍을 한의(寒意)라 하니 곧 창합풍(閶闔風)으로 <이아>에 태풍(泰風)이라는 것이요, 서남풍을 완한의(緩寒意) 혹은 완마(緩麻)라고도 하니 곧 양풍(凉風)이요, 서북풍을 긴한의(緊寒意)라 하니 곧 부주풍(不周風)이요, 북풍을 후명(後鳴)이라 하니 곧 광막풍(廣漠風)으로 <이아>의 양풍(凉風)이라는 것이다.

<이아>(爾雅)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자 사전과 같은 책으로, 천문, 지리, 음악, 초목, 조수 같은 분야에서 쓰는 문자 뜻을 살피고 풀이했다. 책이름에서 '이(爾)'는 '가깝다', '아(雅)'는 '바르다'는 뜻으로 '가까운 곳에서 바른 것을 고른다'는 말이다.

바람 이름을 한자로 적었는데 우리 말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동풍은 '사'(沙·샛바람), 북동풍은 '고사'(高沙·높새바람), 남풍은 '마'(麻·마파람), 남동풍은 '긴마'(緊麻·된마파람), 서풍은 '한의'(寒意·하늬바람), 남서풍은 '완한의'(緩寒意·늦하늬바람)나 '완마'(緩麻·늦마파람), 북서풍은 '긴한의'(緊寒意·된하늬바람), 북풍은 '고'(高·높바람), '후'(後·뒷바람), '후명'(後鳴·뒤울이)이다. 꾸미는 말로 쓴 '완'(緩)은 "느리다(늦다), 느슨하다, 부드럽다, 누그러지다"는 뜻이며, '긴'(緊)은 "굳게 얽다, 속이 차다, 오그라들다, 감다, 되다"는 뜻이다.
 
<성호사설>에 나온 바람 이름과 토박이말 바람 이름
 <성호사설>에 나온 바람 이름과 토박이말 바람 이름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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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어디서 불어오느냐에 따라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바람 부는 철에 따라, 바람의 느낌이나 세기에 따라, 부는 장소에 따라 이름이 또 다르다. 이를테면, 철 따라 부는 바람에는 봄바람, 소소리바람, 꽃샘바람, 잎샘바람, 꽃바람, 피죽바람, 강쇠바람, 색바람, 가을바람, 건들바람, 찬바람, 서릿바람, 찬서리바람, 손돌바람, 겨울바람 같은 이름을 붙였다.

실바람, 소슬바람, 칼바람, 갑작바람, 명주바람, 산들바람, 서늘바람, 돌개바람, 고추바람, 비바람은 바람의 느낌에 따라 붙인 이름이요,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 센바람, 큰바람, 큰센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싹쓸바람은 바람 세기로 나눈 바람이다. 또, 어디서 부느냐에 따라 윗바람, 아랫바람, 옆바람, 뒷바람, 짠바람, 솔바람, 벌바람, 강바람, 산바람, 갯바람, 골바람, 바닷바람, 재넘이(바람) 따위 이름으로 썼다.

양간지풍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없는가?
 
양간지풍(양강지풍)의 다른 말은 없을까
 양간지풍(양강지풍)의 다른 말은 없을까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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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새바람과 양간지풍은 불어가는 방향만 다르지 둘다 산골짜기를 따라 바다나 평지 쪽으로 내리치듯 불어가는 '재넘이(바람)'이다. 가만가만 불다가도 어느 순간 휘몰아쳐서 화들짝 놀라게도 한다. 봄철, 동해 북동쪽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서쪽으로 골짜기 따라 뜨겁게 불어가면 '높새바람'이고, 거꾸로 바람 방향이 바뀌어 남서쪽에서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 쪽으로 불어가면 '양간지풍'이다.

'양간지풍'은 바람 불어오는 방향으로 보면 '늦하늬바람'이나 '늦마파람'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더러 불을 몰고 다닌다 해서 '화풍'이라고는 한다. 사전에서는 '불을 몰고 다니는 바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불과 바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나 '화염이 따르는 바람'으로 풀어놔서 실제 쓰임과는 다르다.

또 바람이 가파른 산등성이를 타고 동쪽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뜨겁고 사나운 바람으로 바뀌어 풀이고 나무고 바싹 말리기 때문에 '녹새풍'(綠塞風), '살곡풍'(殺穀風)이라고도 했다. 이때 녹새풍은 한자로 적어서 그렇지 '높새바람'을 소리대로 적은 이름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면 대풍, 광풍, 영풍, 양간지풍, 양강지풍, 녹새풍, 살곡풍 같은 말이야 두말할 것도 없이 지체 높고 학식 높은 양반들 말 아닌가. 죄다 자기네들이 즐겨 쓰는 한자로 엮어 만든 바람 이름이다. 그렇지만 나처럼 '무지몽매한' 어리보기가 쓰던 말도 따로 있지 않았을까. 아는 분이 있으면 누구라도 좀 알려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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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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