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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엉덩이가 들썩인다. 누군가의 장점을 잘 발견하며 그걸 빨리 말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라는 말을 달고 살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사실은 슬플 일도, 기운 빠지는 일도 어퍼컷 날라오듯 난데없이 들이닥치지만, 동시에 또 시시한 일상에 헤헤거리기 일쑤다. 이런 하루도 저런 하루도 시시껄렁한 기록으로 남겨본다. 그러니까 어쨌든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므로.[기자말]
 
 교무실 자리에 꽂아 둔 그림책들
 교무실 자리에 꽂아 둔 그림책들
ⓒ 홍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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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쯤, 그러니까 3월 개학을 앞두고, 2021년 복지포인트(공무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매년 지급되는 포인트)가 나오자마자, 그림책을 40여 권 샀다. 그리고 방금 또 그림책을 한 아름 주문했다. 이로써 내 1년치 복지포인트는 콜라의 탄산 빠지듯 그렇게 날아갔다.

나는 2년 반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올해 3월 1일 자로 복직한 중학교 국어 교사다. 아이를 키우며 그림책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홀딱 반했다. '너희들도 같이 반해보지 않으련?' 작전으로 수십 권의 그림책을 교무실 책상에 쫘악 꽂아 두고 수업 시간에 한두 권씩 들고 가 읽어주고 있다.

코로나 시국이므로 우리 학교는 3분의 2 등교를 하고 있다. 내가 맡은 중3은 개학 첫 주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온라인이라지만 실시간 쌍방향으로 서로 얼굴 보고 이야기 주고받으며 수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래 괜찮다. 우리 이렇게라도 만나보자" 의지를 다졌다.
 
 책 <고구마구마> 표지
 책 <고구마구마> 표지
ⓒ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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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 시간, 학생들에게 <고구마구마>(저자 사이다)라는 그림책을 보여주었다. 저작권 문제를 설명하고 그림책의 표지와 안의 그림 딱 한 장만 제시하며 학생들의 반응을 이끌었다.

<고구마구마> 책의 특징은 모든 말이 '~구마'로 끝난다는 것, 모두 다른 모양의 고구마가 나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길쭉하구마, 배 불룩하구마, 굽었구마, 작구마, 털 났구마 등. 다 다르게 생긴 고구마들은 모두 속이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모두 원!래! 소중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아무 이유도 없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모두 채팅창에 본인의 이름을 넣어서 'OO아 넌 원래 소중해'라고 쓰라고 했다. 다다다다 채팅창이 도배되기 시작한다. 나는 거기에 올라오는 모든 글을 읽었다. 학생 한 명, 한 명 호명할 때마다 카메라를 보며 천천히 힘주어 이야기했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화면 너머 학생들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도 했고, 엄지 척 들어 보이기도 했고, 머리를 긁적이는 것으로 싫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듣고 있구나. 고맙다. 너희들.
 
 책 <엄마 자판기> 표지
 책 <엄마 자판기> 표지
ⓒ 노란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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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자판기>를 변형하여 만든 <교사 자판기>
 <엄마자판기>를 변형하여 만든 <교사 자판기>
ⓒ 홍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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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보여준 그림책은 <엄마 자판기>(저자 조경희)이다. 엄마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원하는 엄마를 만들어 내겠다는 엄마 자판기 책은 표지만 보여주며 간단히내용 설명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일 년간 선생님의 다짐을 보여주겠다는 의미로 '교사 자판기'로 바꾸어 화면으로 제시했다.

컴퓨터 그림판에서 한 땀 한 땀 그렸다. 앞으로 그림책 많이 읽어주겠다는 의미로 그림책 쌤, 여러분 이야기 많이 듣겠다는 의미로 끄덕 쌤, "선생님 업어 주세요"하면 번쩍 업어주겠다는 의미로 힘 쌤, 나머지 3개 버튼은 여러분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하겠다는 의미로 공란으로 두었다고 설명했다.
 
 책 <절대 보지 마세요! 절대 듣지 마세요!> 표지
 책 <절대 보지 마세요! 절대 듣지 마세요!> 표지
ⓒ 바람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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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수업에선 <절대 보지 마세요! 절대 듣지 마세요!>(저자 변선진)를 읽었다. 이 책은 고인이 된 변선진 작가가 청소년기에 만든 작품으로 어른들은 우리가 왜 우는지, 무엇이 무서운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초콜릿만 쥐어준다고 말한다.

이 책을 수업에서 읽어주고는 대뜸 학생들에게 사과했다. 어른이 미안하다고. 여러분 마음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대신 이런 책 열심히 찾아 읽고 여러분 마음에 다가가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화면 속에서 아이들은 뜨뜻미지근했다. 그저 어디 안 가고, 화면 켜고 앉아 있으니 되었다 생각했다.

그렇게 첫 시간, 첫 주를 보냈다. 드디어 둘째 주 등교 수업이 있는 월요일 아침, 마침 나는 등교 지도를 하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나를 알아보는 친구들이 나타났다.

"우와! 국어쌤이다."
"쌤! 저 쌤 이름 알아요. 홍정희 쌤!"
"야! 그림책 쌤이야."
"어머 선생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선생님 그림책 너무 좋았어요."


나는 교사가 되기 전 수년간 여러 회사를 다녔다. 사기업, 공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두루 거쳤다.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건대 아침에 출근하며 이렇게 마음이 가벼웠던 적이 있던가. 오늘은 어떻게 웃겨줄까 고민하며 두근두근했던 적이 있던가. '사랑'을 기저에 깔고 만나는 직장이 있었던가.

신나 미치겠는 마음으로 출근한다. 이 마음이 오랜 휴직 끝에 드디어 밥벌이를 하게 된 직장인의 마음일지언정, 끝도 없는 육아에서 잠시 놓여난 해방감일지언정, 적어도 가장 바쁜 3월을 보내고 있는 학교에서 바쁜 게 싫지 않은 감정 상태로 지금까지 출근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좋다.

덧붙이는 글 | 상고를 나왔다. 이십 대에 돈 벌고, 삼십 대엔 대학생이었으며, 사십에 교사와 엄마가 되었다. 매일 제자들과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준다. 육아휴직 중인 44세 남편과 가정 보육 중인 4세 아들의 성장기가 뭉클해 수시로 호들갑을 떤다. 가까운 미래에 내가 졸업한 상고에 부임하여 후배이자 제자들과 그림책으로 수업하는 꿈을 꾸는 시골 교사 홍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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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리움을 얘기하는 국어 교사로, 그림책 읽어주는 엄마로, 자연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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