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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이해연이 불렀던 '황해도 노래' 앨범 자켓
 이해연이 불렀던 "황해도 노래" 앨범 자켓
ⓒ 윤중강/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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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신탄 나무릿벌 풍년이 들면
장연 읍내 달구지에 금쌀이 넘치네
어서 가세 어서 가세 방아 찌러 어서 가세
우리 고을 풍년방아 연자방아 돌아간다,
해주 청풍 바람결엔 달빛도 좋아
연안 백천 모래틈엔 더운 물이 넘치네
어서 가세 어서 가세 머리 빨러 어서 가세
참 미나리 캤다고 섬섬옥수 못될 손가.
신계 곡산 명주 애기 분단장하고
봉산 탈춤 구경 가네 오월이라 단옷날
어서 가세 어서 가세 탈춤 구경 어서 가세
망질하는 평산의 길 황소 타고 찾아 가네.


이 노래의 제목은 '황해도 노래'(1943년)다. 가수는 이해연(1924년~2019년). 히트곡은 '단장의 미아리고개', 황해도 해주 태생이다. 인천을 대표하는 가요로 '연안부두'(1979년)가 있는데, 이 노래를 부른 김트리오의 어머니가 이해연이다. '연안부두'는 인천사람이라면 거의 다 안다. 도원동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야구경기 8회초가 끝나면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 나왔다.

내가 나이가 들어 '황해도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이 노래가 너무도 익숙했다. 일제강점기에 유행한 '신민요'이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런 건 아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들었던 노래였다. 경동한증막에서 들었던 노래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증막에 모인 사람들이 읊조리듯 흥얼거렸던 노래였다.

경동한증막에서 '황해도 노래' 부른 실향민들

1985년 배다리에서 싸리재로 올라가는 길 왼쪽으로 연안부두로 향하는 길(소방도로)이 크게 뚫렸다. 이때 한증막은 인천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차가 오가는 길이 되어버렸다. 지번으로 경동 40번지쯤에 해당한다. 경동한증막이 정식 명칭이지만, 율목동한증막 또는 밤나무골한증막이라고 불렀다.
 
인천을 대표하는 국악인 양소운이 공연한 봉산탈춤 중 '미얄할미'
 인천을 대표하는 국악인 양소운이 공연한 봉산탈춤 중 "미얄할미"
ⓒ 양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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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경동한증막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인천의 기억 속에 경동한증막과 '황해도 노래'는 살아있어야 한다. 인천에는 특히 북한에서 내려온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한국전쟁 후 인천은 실향민의 '제2의 고향'이다. 인천의 중구와 동구에 실향민이 많이 살았다.

'황해도 노래'에 등장하는 봉산탈춤(국가무형문화재 제17호)과 평산소놀음굿(국가무형문화재 제90호)이 올곧게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북에서 내려와 인천에 정착한 실향민들의 덕분이다. 한증막은 모진 세파 속에 시달리면서도 고향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푸는 장소였다.

이른 아침이면, 한증막 앞 리어카엔 나뭇가지가 수북했다. 그 나무들은 모두 한증막에서 사용했다. 하인천 어물전 주인, 싸리재 채미전(참외전)의 채소상인, 송림학교 건너편 연백상회에서 내걸고 쌀장사를 하던 그들이 때가 되면 한증막에 모였다. 굳이 날을 잡지도 않았다. 날씨 탓에 몸이 찌뿌드드해지고, 괜히 고향 생각이 더 나는 날이면 거기 모였다.

장산곶 마루에 북소리 나더니 / 금일도 상봉에 님 만나 보겠네

한증막에 모인 사람들이 '몽금포타령'을 부를 때면, 한쪽에서 놓여있던 커다란 장구가 어느새 누군가에 의해서 신명난 장단을 치고 있었다. 때론 수심가의 슬픈 곡조로, 때론 난봉가의 경쾌한 가락으로, 한증막에 모인 실향민은 그들 나름의 문화를 거기서 만들어갔다. 그 소리는 한증막을 타고 나와 꽤 멀리 퍼졌다.

경동한증막은 여성전용이었다. 남자아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을까? 우리집 대문을 열면 한증막이 바로 보였다. 외할머니는 한증막의 단골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1960년대에는 초등학교 남자아이가 한증막을 출입하고, 여자아이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금성목욕탕(경동 98번지) 남탕에 오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던 시절이었다.

할아버지가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우시조 '나비야 청산가자'를 부르실 때, 동네오빠들과 어울려 여자아이는 '나리나리 개나리'를 부르면서 즐겁게 놀았다. 우리 동네가 그랬다. 1960년대, 싸리재 주변이 그랬다.

양소운 명창의 배뱅이굿

한증막에서 노랫소리가 뜸해진 건 언제쯤일까? 1974년쯤이다. 그 해 5월, 인천에 제2도크가 준공됐다. 대통령이 오고, 인천에서 도로정비와 미화에 박차를 가했다. 인천시내의 많은 간판이 새로 달렸다. 기억컨대, 이때쯤 인천에서는 '황해도 노래'에 나오는 지명의 간판이 거의 사라졌다.

인천의 토지대장을 살피면, 더 정확하게 알게 되리라. '반공방첩'의 표어가 여기저기 걸려있던 시대에, 북한과 연관된 지명을 강조한다는 것이 때론 불안심리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양소운은 한국의 탈춤 명맥을 이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고 그 역시 실향민이었다.
 양소운은 한국의 탈춤 명맥을 이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재령이고 그 역시 실향민이었다.
ⓒ 양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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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 시대 인천의 국악은 오히려 번성했다. 중심인물이 황해도 재령출신의 양소운(1924년~2008년)이다. 영원한 국민오빠로 통하는 KBS 1TV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 송해(1927년생)의 고향도 재령이다. 두 사람은 '황해도 노래'에 등장하는 '나무릿벌'을 잘 알고 있다. 양소운은 황해도의 농경문화 속에 펼쳐진 신명난 민속놀이를 인천에 뿌리를 내리는 데 앞장섰다.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81년) 팜플랫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81년) 팜플랫
ⓒ 윤중강/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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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운을 중심으로 한 많은 분의 노력으로, 은율탈춤이 국가의 무형문화재(1978년 2년 24일)가 됐다. 1981년 10월 22일~24일, 인천직할시 승격 기념으로 인천공설운동장에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가 열렸다. 이때 타 지역의 민속예술과 당당히 겨룬 것은, 인천의 고유한 민속예술과 함께 북한의 민속예술이었다.

거기에 참가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천에 정착해 30여 년을 살아온 실향민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83년에는 인천수봉공원에 은율탈춤전수관이 생겼다.

인천 실향민들의 북한지역 민속예솔공연은 인천에서 끝나지 않았다. 양소운을 대표로 한 '황해도민속예술보존협회'는 서울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1972년 4월 16일). 거기서 가장 인기를 끈 게 무엇이었을까? 양소운의 배뱅이굿이다. 사람들은 배뱅이굿하면 이은관 명창만을 생각하지만, 양소운 명창의 배뱅이굿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1950년대에는 양소운과 이은관이 함께 서로 나눠서 합동으로 배뱅이굿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극장쇼가 유명했던 시절이었다. 극장쇼의 산증인 김뻑국(본명 김진환, 1937년생)은 인천과 인연이 깊다. 일본에 태어나서 한국에 오게 된 김진환은 매우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인천과 강화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약장수를 따라다녔던 시절을 숨기지 않는다. 1960년대 김진환은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서 일하기도 했다.

내동 5번지에서 배출한 인천 국악의 후예들

소리와 만담은 물론이요, 그 시절 극장쇼의 '쇼비지니스'를 알게 된 그는 자신의 단체를 조직해서 인천에서 많은 공연을 했다. 김뻑국은 1960~1970년대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국악과 만담, 웃음을 소시민들에게 선사하는 비타민과 같은 공연을 펼쳤다.

그는 만담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또 김영운, 배뱅이굿의 이은관, 1960~1970년대 큰 인기를 끈 경기민요 이은주, 김옥심과 단체를 조직해서 많은 공연을 했다. 그들은 특히 인천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단체를 이끌었던 김뻑국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극장쇼 포스터를 붙이러 인천시내는 물론 주안까지 갔다고 한다.

극장쇼는 하루에 한 극장에서 네 차례나 이어졌다. 이런 공연에는 인천출신의 국악인들이 함께 해서 빛을 더했다. 지금 전숙희 명창하면 자타 공히 인정하는 노래가 '창부타령'이다. 인천에서 성장한 전숙희 명창은 판소리와 고전무용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왼쪽은 양소운의 해주검무. 오른쪽은 단체공연.
 왼쪽은 양소운의 해주검무. 오른쪽은 단체공연.
ⓒ 양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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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의 대가인 전숙희의 노래는 아버지 전태용(율목동45번지)의 대물림이다. 전태용은 '뱃노래'와 '창부타령'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서울무대에서 화려하게 부르는 여성들의 노래와는 아주 다르게, 강화사람이나 옹진사람의 투박하고 진솔한 느낌이 강하게 살아있다. 이런 특징이 전숙희 명창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극장쇼에선 배뱅이굿이 최고였다. 인천에 살았던 사람이고, 경동한증막을 이용한 사람이라면, 양소운의 맛깔진 배뱅이굿을 들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황해도 고향사람들 앞에서, 실향민들 앞에서 들려준 배뱅이굿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양소운 명인은 이렇게 배뱅이굿의 대가였지만, 실제 무대에선 많이 부르지 않았다. 짐작컨대, 배뱅이굿으로 이름을 날린 이은관 선생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고도 생각된다.

오히려 자신은 인천을 중심으로 알려야 할 북한의 민속이 너무도 많이 있었을 거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의 요청에 의해서 양소운 명인은 1980년 3월 1일 '공간전통예술의 밤'으로 유명한 그곳, 공간사랑에서 배뱅이굿의 일부를 공연했다.
 
양소운의 애제자였던 박일흥(왼쪽). 양소운이 키운 제자들은 인천과 우리나라 국악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박일흥의 공연프로그램.
 양소운의 애제자였던 박일흥(왼쪽). 양소운이 키운 제자들은 인천과 우리나라 국악발전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박일흥의 공연프로그램.
ⓒ 윤중강/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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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탈춤(1958년 재현), 강령탈춤(1968년 재현), 은율탈춤(1973년 재현) 등 북한지역(해서지방)의 세 개의 탈춤을 재현하고, 해주검무(1983년 재현)를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확실히 알렸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양소운 선생도 배뱅이굿 완창 발표(1991년 5월 31일 신촌 라이브하우스 '난장')를 했다. 그리고 이 소리를 대물림하려 했다. 그 대표적인 제자가 박일흥. 그는 인천과 서울(2019년 1월 9일 서울돈화문국악당)에서 공연을 하면서 '양소운' 특유의 배뱅이굿을 알리려 했다. 현재 양소윤류 배뱅이굿은,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다.

1967년, 양소운 명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때의 주소가 인천시 중구 내동 5번지다. 인천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위치한 이곳에서, 양소운 선생은 정말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아들과 딸인 차재숙, 차재호, 차선숙, 차부회를 비롯해 친척과 손녀까지, 선생의 뜻을 받들어서, 명인의 자녀와 제자들이 현재 각자 인천과 한국의 예술계들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24년은 양소운 탄생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지난 세월 선생께서 인천의 국악발전을 위해서 애쓴 공로를 생각한다면, 이땐 인천시 차원에서 큰 판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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