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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시대 경기지역 중산층 건축양식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경기도 민속문화재 10호로 지정됐다.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시대 경기지역 중산층 건축양식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경기도 민속문화재 10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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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완연한 봄이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옷차림을 살펴보면 외투도 얇아지고 색상은 화사해졌다. 여전히 마스크로 얼굴 절반은 가리고 있어 봄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살피지 못하지만 말이다. 코로나19로 여전히 힘든 상황이지만 만물이 시작하는 봄이 됐으니 표정도 조금은 환해지지 않았을까.

이처럼 날씨가 따듯해지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인적 드믄 곳에서 유유자적 산책하며 봄을 만끽하기 제법 괜찮은 곳이 있다. 경기 용인시 기흥구 지곡동에 위치해 있는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0호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이다. 그리 넓지 않은 아담한 공간이여서 봄바람을 느끼면서 거닐 기에 안성맞춤이다. 

자동차로 기흥역에서 출발할 경우 20분 정도 소요된다. 대중교통의 경우 기흥역에서 마을버스 54번을 탑승한 후 성심교회정류장에서 하차해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까지 걸어가면 된다.

고층아파트가 즐비한 번잡한 도시에서 출발해 고택에 도착하기까지 급변하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도 묘한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10km도 채 안 되는 거리인데 마을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고택 주변은 마치 어렸을 때 할머니네 놀러 가면 볼 수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같았다. 멋들어진 기와집이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중기 음애 이자 선생과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 살던 곳이다. 고택에 들어가기 전 제법 큰 문학비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자탄(自歎)', '추월(秋月)', '즉사(卽事)'라는 시제가 쓰여 있었다. 읽어 봤지만 온전한 내용을 이해하기란 사실 어려웠다. 

그 가운데 '자탄' 일부를 보면 "뜬구름 같은 인생 오십년 황급히 지나가고/ 어질지 못함에 웃음 지으며 또 한 번 상처입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이자의 삶이 잘 표현된 대목이다. 이자의 삶이 궁금해졌다. 이곳을 통해 그의 삶과 철학을 잠시나마 들여 보기로 했다. 고택을 다 살펴보면 근처 지곡동 산11-17번지에 음애 이자 묘역이 위치해 있으니 여기도 함께 돌아보면 좋을 듯싶다.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시대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은 조선시대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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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사화 얽힌 이자 선생

고택의 주인공 이자는 조선 중종 때 인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연산군 7년(1501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자는 사헌부 감찰,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하지만 연산군 폭정이 시작될 무렵 이자는 관직을 그만두고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그런 그가 종적 중종 때 다시 조정에 나가 한성판윤, 형조판서, 우참판 등을 거치면서 서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입지를 쌓아가던 이자는 조광조와 함께 정치개혁을 도모하게 된다.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하며 조선을 성리학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이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사건 '기묘사화'에 휘말리게 되면서 비극으로 끝난다. 이로 인해 조광조를 비롯해 일부는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고 이자는 다행이 목숨만은 지킬 수 있게 됐다. 

이에 이자는 낙향을 선택해 남은 세월 동안 학문에 전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자는 이 기간 동안 3000여편이 넘는 글을 남겼으나 대부분이 없어진 상태다. 120여 편의 시문이 실린 음애집만이 남겨져 있다. 그 일부를 마당 문학비에 새겨놓은 것이다. 이후 중종은 이자를 관직에 복위시키고, 1577년 선조는 문의공(文懿公)이란 시호를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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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산층 가옥의 전형

이자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까지 살아온 이 고택은 조선시대 중산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상당하다고 알려졌다. 마당에 들어가자 우물이 보였다. 탁 트인 마당에 저토록 잘 보이게 우물을 만들어 놓다니, 심상치 않은 집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우물의 위치는 안채 부엌과 사랑채 부엌 사이로, 여성들의 동선이 편리하도록 우물 위치를 배치해놓은 것이었다. 이처럼 섬세한 손길이 이 고택에 대한 기대감을 더 불러일으켰다. 

이 집은 본래 'ㄷ'자 형태의 본채와 '一'자형 행랑채가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튼ㅁ'자형의 배치를 했었지만 지금은 행랑채가 없어지고 본채만 남아있다고 한다. 본채는 'ㄱ'자 형의 안채와 '一'자 형의 사랑채가 합쳐져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다. 눈여겨 볼 점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로 연결돼 있는데 내외가 사용하는 공간은 또 구분되는 다소 특이한 형태로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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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선시대 경기지역 중산층 주택의 특징으로 꼽힌다. 이어 또 다른 특징은 별도로 만든 사당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 양반집은 별도로 사당을 짓는데 이곳은 사당을 짓지 않고 북서쪽에 마루가 있는 방에 단청을 입혀놓았다. 이곳을 제사 공간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고택 안을 샅샅이 살펴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툇마루가 있다. 일반적인 툇마루가 아닌 통나무를 그대로 이용해 만들어서 두께도 꽤 두텁다. 투박한 통나무가 옛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기서 조금 앞으로 가면 보이는 낮은 굴뚝도 정겨운 풍경이다.

당장이라도 연기가 몽글몽글 올라올 것만 같았다. 어느 동화책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듯 이자의 고택은 운치 있고 고풍스러웠다. 의외인 점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 구경하는 즐거움에 발걸음이 가볍다. 너무 크지도 또 너무 작지도 않은 멋들어진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 따듯한 봄에 산책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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