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환은 사랑했던 그녀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언젠가 여행 중 들렀던 두 사람의 모교밖에 없었다. 그는 그곳에 찾아갔다가 경희가 병으로 죽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는다. 그것 때문에 안 그래도 아팠던 수인의 몸이 더 안 좋아졌다는 것도. 그는 수인이라도 꼭 만나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녀가 숨어 지내는 곳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경희를 만난다.

경희와 수인은 어릴 때 병원에서 만난 사이였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던 두 친구는 이름을 바꿔 지내기로 한다. 떨어져 있어도 같이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그렇게 경희는 수인이 되고 수인은 경희가 된다.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 팝콘필름

 
이 반전을 영화의 제목과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두 여자가 3인칭의 시점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다시피 3인칭 시점의 소설은 서술자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술자는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즉 자기 인생의 서술자가 되기를 자처한 경희와 수인 둘 중 누구도 지환과 이어지지 못한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지환이 첫눈에 반한 사람은 수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경희)이었다. 그는 그 날 바로 수인에게 고백하고 그녀는 거절한다. 하지만 셋은 계속 어울려 다니며 가까워진다. 특히 경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수인)는 지환을 향한 마음을 점점 키워간다. 동시에 수인 또한 경희 못지않게 지환을 사랑하게 된다. 한편 지환은 경희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져간다. 그렇게 삼각관계는 어느 방향이든 사랑이 존재하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적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순수의 결정체 같은 그러한 삼각관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순수함은 은연중에 풍기는 예정된 죽음에서 비롯된다.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 앞에 놓인 경희와 수인에게는 화를 내는 것조차 사치였다. 예를 들어, 지환의 아는 형으로부터 지환과 수인이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고서 경희는 수인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그래서 평소와 달리 수인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하는데, 수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슬픈 표정을 짓자 약한 척 하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자리를 떠버린다. 그러나 이내 후회하고 가던 길을 뛰어서 되돌아온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두 사람은 천진난만하게 어울려 놀던 어린 시절의 관계를 유지해나간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미움이 발붙일 수 없는 세계가 구축된다. 순수함으로 무장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세계. 그녀들은 그 속에 갇힌 순수함의 포로나 다름없었다. 

수인은 자꾸만 경희에게 자신의 옷을 선물하려고 한다. 그녀는 상대적으로 경희보다 자신이 더 죽음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예정된 죽음은 이렇듯 무언가를 남기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성장은 금지 당한다. 모든 에너지는 현재의 형태를 가장 완벽히 보존하기 위해 쓰여야 한다. 본래의 목적인 성장을 위해 탈피하는 게 아니라 가장 완벽한 허물을 벗기 위해 몸의 일부를 상실하는 것도 불사한다. 그녀들이 죽음이라는 운명 때문에 미성숙을 강요당한 사실은 바닷가에서 수인이 재환에게 건넨 말 속에서도 발견된다. "같이 와줘서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이런 거 생각도 못했을 거야. 우린 몸만 이렇게 컸지 제대로 된 여행 한 번 못 다녀봤거든."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 팝콘필름

 
그렇다면 지환이 지닌 순수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 사람이 두 번째 만남에서 나눈 대화 속에 그 답이 있다. 지환은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라면서 아버지가 열두 살 때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순간 정적이 흐르자 지환은 웃으면서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아버진 여기 계시거든."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 역시 죽음을 품고 사는 사람이었다. 죽음은 과거 지향적이라서 쉽게 순수함과 연결된다.

그가 변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또한 유심히 볼 만하다. 그는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사진을 본다고 말한다. 사진은 과거를 묶어두는 장치이다. 과거란 무엇인가. 현재가 죽어야만 생기는 시간이다. 지환에게 현재란 과거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입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환의 아는 형은 네가 찍은 사진도 좋지만 사진을 찍을 때의 네 모습이 좋았다고 말한다. 지환은 현재가 과거로 변하는 것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해했다. 그에게 과거는 언제까지나 지켜야 할 이상향이자 순정이었다.

'진짜' 수인이 지환을 떠나 숨어 있던 곳을 살펴보자. 순박한 시골 아이들이 무리지어 마음껏 뛰놀고 있다. 수인은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 후 그 위에 지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쓴다. 그야말로 동심과 순수가 꽃피는 시간 속에 수인은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곳에 지환이 찾아온다.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영화 <연애소설> 스틸 컷 ⓒ 팝콘필름

 
이 영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은 아니다. 수인과 지환의 재회도 잠시뿐이었다.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기 전 두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사진을 남긴다. 사진은 두 사람이 현재와 가장 아름답게 이별하는 방식이었다. 영화에서 나오진 않았지만 아마 지환은 두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도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이별의 아픔까지 추억으로 보듬는 법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연애하는 동안 1인칭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러다 연애가 끝나고 나서야 3인칭의 시점을 획득한다. 이별했기 때문에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고 비로소 소설을 써나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추억을 예쁘게 포장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이별이라는 마무리로 연애를 과거로 만들어버린 죄책감을 살포시 얹어서 말이다. 이 영화를 보며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끼는 건 그만큼 지나간 사랑이 지닌 순수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증거일 것이다.
연애소설 멜로 로맨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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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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