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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함경북도 단천군수는 폭압적으로 군민을 다스렸다. 군수의 폭정이 이어지자 시중들던 통인(通引)이 보다 못해 나섰다. 동헌에 뛰어든 통인은 군수에게 불화로를 냅다 집어 던졌다. 군수를 응징한 통인은 한양으로 피신했다. 열일곱 나이에 군수의 폭정에 맞선 이 통인은 누굴까? 바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다.

성재 이동휘는 1873년 6월 20일 함경남도 단천군 파도면 대성리에서 이승교(李承橋)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독립'(獨立)이다. '동휘'(東輝)라는 이름은 나라를 크게 빛내라는 의미로 그의 아버지가 지었다. 지방 아전을 지낸 아버지 이승교도 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쳤다. 성재 가문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동휘의 딸과 사위도 독립유공자다.

이동휘는 1880년 지방 사숙인 대성재에 들어가 한문을 익혔다. 어머니가 병으로 일찍 죽자, 아버지에게 배웠다. 1889년 성재는 열여덟 살 강정혜와 결혼했다. 그의 나이 열여섯이었다. 화로를 집어 던진 사건은 결혼 이듬해에 터졌다. 3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철수는 이동휘가 집어 던진 건 '화로'가 아닌 '요강'이라는 회고를 남겼다. 어린 시절부터 성재가 불의를 참지 못하는 무골(武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골이자 대한제국 무인이었던 이동휘
 
이광수는 성재 이동휘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그는 키가 크고 눈이 세모나고 검은 수염을 뻗치고 목소리가 웅장하고 손이 크고 악수를 할 때는 나의 손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얼른 보기에 그는 열정가였다. 성재는 금시에 칼을 빼 들고 삼군(三軍)을 호령할 장군이었다. 성재의 부릅뜬 눈에는 금시에 분노의 불길이 일어날 것 같았다.”
▲ 춘원이 본 이동휘 이광수는 성재 이동휘에 대해 이런 회고를 남겼다. “그는 키가 크고 눈이 세모나고 검은 수염을 뻗치고 목소리가 웅장하고 손이 크고 악수를 할 때는 나의 손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얼른 보기에 그는 열정가였다. 성재는 금시에 칼을 빼 들고 삼군(三軍)을 호령할 장군이었다. 성재의 부릅뜬 눈에는 금시에 분노의 불길이 일어날 것 같았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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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으로 피신한 이동휘는 1896년 이용익의 소개로 한성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897년 한성무관학교 졸업 후 이동휘는 참위(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후에는 궁전진위대 근위 장교로 일하기 시작했다. 1899년 7월 성재는 원수부 군무국권에 임명되었고, 1900년 12월 정위(대위)로 승진했다.

1901년 참령(소령)으로 승진한 이동휘는 삼남검사관이 되었다. 성재는 지방 진위대의 부패를 척결하면서 큰 명성을 얻었다. 부정을 저지른 14명의 군수를 파직시키고 비리로 축재한 50만 냥을 회수해서 고종에게 바쳤다. 군인의 길을 걷던 성재는 1902년 민영환, 이준, 이용익이 조직한 비밀결사 조직 '개혁당'에 가입했다. 개혁당에서 성재는 이상재, 박은식, 노백린, 남궁억, 양기탁, 장지연과 함께 활동했다.

1903년 5월 성재는 강화도 진위대장이 되었다. 강화에 부임한 후 그는 개신교 인사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동휘는 강화도에서 활동하던 전도사 김우제를 통해 감리교 신자가 되었다. '기독교를 통해 기울어가는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당시 강화도에는 미국인 선교사 벙커(D. A. Bunker)와 박능일이 운영하던 잠무의숙(岑茂義塾)이 있었다.

교육운동을 활발히 펼친 성재
 
이동휘의 본관은 하빈, 아호는 성재다. 부친 이승교는 연해주 대한인노인단 대표로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동휘, 인순, 이승교, 우석, 의순, 강정혜, 경순이다.
▲ 이동휘 가족 이동휘의 본관은 하빈, 아호는 성재다. 부친 이승교는 연해주 대한인노인단 대표로 항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진 왼쪽부터 이동휘, 인순, 이승교, 우석, 의순, 강정혜, 경순이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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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1월 이동휘는 잠무의숙을 바탕으로 강화도 최초의 근대 사립학교인 '합일학교'(合一學校)를 설립했다. 교육운동가로서 그의 첫 발자취다. 1904년에는 윤명삼, 유경근과 함께 강화에 학교를 세웠다. 1905년 성재는 학생들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보창학교'(普昌學校)라는 교명과 왕실 보조금을 하사받았다.

이동휘는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자고(1동 1학교) 역설했다. 강화에만 14개 보창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 공부한 학생만 800여 명에 달했다. 한때 강화도 학교 수는 72개에 이르기도 했다. 성재의 교육운동 덕분이었다. 보창학교는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한글 점자 '훈맹정음'을 만든 박두성도 보창학교 출신이다. 박두성의 호 송암(松岩)은 남이 하지 않는 일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성재가 지어줬다.

1905년 3월 3일 이동휘는 강화도 진위대장직을 그만두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성재는 유서 여덟 통을 써서 고종과 2천만 동포 형제, 하야시 주한공사, 하세가와 주한일본군사령관에게 보냈다. 망국을 앞두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려 했다.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다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동휘는 궁전진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903년 5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성재는 진위대장으로 대한제국의 요충지인 강화도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 앞줄 중앙이 이동휘다. 조상석, 홍우섭, 박제언, 유홍준, 최영순, 김정배가 함께 있다.
▲ 강화진위대 시절 이동휘  한성무관학교를 졸업한 이동휘는 궁전진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타고난 무인이었던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1903년 5월부터 1905년 3월까지 성재는 진위대장으로 대한제국의 요충지인 강화도 방위를 책임졌다. 사진 앞줄 중앙이 이동휘다. 조상석, 홍우섭, 박제언, 유홍준, 최영순, 김정배가 함께 있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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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버리는 대신 이동휘는 1906년부터 교육을 통한 구국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06년 4월에는 '대한자강회' 강화도지부를 만들었다. 같은 해 10월 성재는 이준, 안창호, 이원긍, 김정식, 유승겸과 함께 '국민교육회'에 참여했다. 1904년 연동교회 게일(J. S. Gale) 목사 집에서 창립한 국민교육회는 학교 설립과 교과서 편찬, 책과 잡지 출판, 강연 활동을 벌였다. 1907년 3월 성재는 '신민회'를 조직해서 참여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강화도에서도 진위대 출신 김동수, 연기우, 지홍윤이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동휘를 배후 조종자로 체포했다. 대무의도에 유배된 이동휘는 선교사 벙커의 노력으로 1907년 12월 풀려났다.

석방 후 이동휘는 안창호, 이갑, 유동열과 함께 '서북학회'를 만들었다. 항일 독립운동의 현장에는 늘 그가 있었다. 성재는 보창학교 소학교를 중학교로 개편하고 이를 모델 삼아 전국에 학교를 세웠다. 보창학교는 황해도 안악과 충청도 충주, 함경도 함흥을 비롯해 전국에 90여 개가 세워졌다.

이동휘의 보창학교는 이준의 보광학교, 이종호의 보성학교와 함께 근대 교육의 '삼보'(三寶)로 불렸다. 성재는 왜 교육운동에 매진했을까? '교육'과 '인재'만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재가 세운 보창학교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제는 강화도 보창학교를 접수하여 작전본부로 활용했고, 보창학교 출신 교사와 학생의 의병 활동을 진압했다. 일제는 의병 진압 후에도 보창학교를 돌려주지 않았다. 설립 12년 만에 보창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산천도 함께 울었던 그의 나라 사랑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해서 서북학회가 발족했다. 서우학회의 ‘서’, 한북흥학회의 ‘북’을 따서 ‘서북학회’라 이름 지었다. 서북학회 부설 학교로 서북협성학교가 설립되었다. 서북학회는 33명의 공동 소유로 낙원동 282번지에 회관 건물을 지었다. 일제는 서북학회를 ‘배일당의 소굴’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동휘는 박은식, 안창호, 이갑, 이종호, 정운복과 함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 서북학회 터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해서 서북학회가 발족했다. 서우학회의 ‘서’, 한북흥학회의 ‘북’을 따서 ‘서북학회’라 이름 지었다. 서북학회 부설 학교로 서북협성학교가 설립되었다. 서북학회는 33명의 공동 소유로 낙원동 282번지에 회관 건물을 지었다. 일제는 서북학회를 ‘배일당의 소굴’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동휘는 박은식, 안창호, 이갑, 이종호, 정운복과 함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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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8월부터 1909년 5월까지 이동휘는 전도사와 책을 파는 '매서인'(賣書人)으로 활동했다. 성재는 함경북도 지역을 돌며 선교와 강연을 했다. 성재는 선교 현장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삼천리 강산 1리마다 교회와 학교를 하나씩 세워 3천 개 교회와 학교를 세우는 날이 독립되는 날이다."

'권서'(勸書)로 알려진 매서인 덕분에 성경이 보급되고 한글이 널리 알려졌다. '권서'는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자 '서점' 역할을 했다. 함경도에서 활동하던 성재는 '해도간'(海島間)이라 불린 북간도와 연해주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성재가 '전도'를 한 것은 '조국 광복'을 위함이었다. 작가 김성동은 나라 안팎을 떠돌며 행한 이동휘의 전도를 이렇게 묘사했다.

"눈물을 철철 흘리며 부르짖는 그 뜨거운 나라 사랑에 산천도 함께 울었다."

1911년 이동휘는 북간도 전도총회를 개최하였다. 성재와 함께 활동한 김약연과 정재면은 명동촌에 '명동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이 명동학교를 다녔다. 성재는 북간도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항일 비밀결사체인 '광복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1911년 7월 국내에 잠입한 이동휘는 신민회 활동과 105인 사건으로 인천 앞바다 무의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1912년 성재는 유배에서 풀려났다. 일제 탄압으로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낀 성재는 1913년 2~3월 북간도 연길현 용정 명동촌으로 망명했다. 이동휘는 북간도를 기반으로 광성학교, 길성여학교, 배영학교, 종명학교를 세웠다. 독립투사 양성을 위한 동림무관학교와 밀산무관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새로운 활동 무대 연해주
 
독립운동가 황병길(사진 왼쪽)은 1885년 4월 15일(음력)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러일전쟁 이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최재형, 안중근이 조직한 의병대 소속으로 함경북도 국경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때 황병길은 경원 신아산에서 일본군 여럿을 사살하면서 ‘훈춘(琿春)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군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던 그는 병을 얻어 36세 나이로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인 김숙경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 이동휘와 황병길  독립운동가 황병길(사진 왼쪽)은 1885년 4월 15일(음력)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러일전쟁 이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최재형, 안중근이 조직한 의병대 소속으로 함경북도 국경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때 황병길은 경원 신아산에서 일본군 여럿을 사살하면서 ‘훈춘(琿春)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군에 쫓겨 도피 생활을 하던 그는 병을 얻어 36세 나이로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인 김숙경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다.
ⓒ 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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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일제 조선군사령부는 이동휘의 동향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동휘, 문창범 및 황병길은 현저한 군사지도자들이다. 니콜스크(지금의 우수리스크)에 있던 이동휘가 최근에 밀산(密山)의 만주 부락에 가서 한국군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동 사관학교 교장이 되어 구 한국군의 전 장교들을 모아 젊은 신병을 훈련하는 교관으로 채용하였다. 그는 또한 시베리아와 중국 전역에 있는 비귀화인 만 21세 된 모든 한국인에게 소집영장을 발부했다. (중략) 소문에 의하면 약 6천 명의 한국인들이 이미 독립군의 기치 아래 집결하였다."

1913년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긴 이동휘는 한인 사회 교육.경제.민족운동의 중심이었던 '권업회'를 이끌었다. 당시 권업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성재는 '단결'을 강조했다. 성재는 독립운동 단체 사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홍범도를 비롯한 주요 인물과 결맹을 했다. "조국 부흥을 위해 상호반목을 지양하고 합심 단결하자"라는 내용이었다. <대동공보>와 <권업신문>을 발행한 권업회는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러시아 사람이 '프리모르스키'(Primorskii)라고 부른 연해주는 '바다와 접한 땅'이라는 뜻이다. 연해주는 조국을 떠난 독립운동가의 활기찬 무대였다. 단재 신채호와 헤이그 정사 이상설, 언론인 장지연, 봉오동 전투 주역 홍범도 장군, 우국지사 최재형이 연해주에서 활동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이 거사를 위해 출발한 곳도 바로 이곳 연해주다. 

연해주를 기반으로 이동휘는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이 무렵 일제는 연해주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이동휘를 꼽았다. 그를 체포하는 것이 일제의 연해주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가 사회주의 혁명가가 된 이유

1914년 성재는 이상설, 이종호, 이동녕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했다. 이동휘는 이상설에 이어 2대 정도령(正都領)이 되어 광복전쟁을 준비했다. 이를 위해 동녕현 삼분구에 북빈의용단을 설립하고, 왕청현 나자구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길렀다. 활동이 여의치 않자 성재는 1915년 3월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과 '신한혁명당'을 만들었다.

1917년 1월 이동휘는 일제 공작에 의해 '독일 간첩'이라는 혐의로 붙잡혀 러시아 감옥에 갇혔다. 바로 이 해 '러시아 혁명'이 터졌고, 혁명 열기는 성재가 수감된 감옥까지 불어 닥쳤다. 러시아 감옥에서 성재는 함께 투옥된 볼셰비키를 통해 공산주의 사상을 접했다. 감옥에서 성재는 <공산당 선언>, <유물론>을 탐독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18년 4월 28일 성재는 하바롭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위원장으로 뽑혔다.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연세대 도서관장과 한국도서관협회장을 지낸 역사학자 민영규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 이렇게 썼다.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 1871-1917)이 죽은 바로 그 해 가을, 이동휘는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대회를 열고 그 의장에 추대된다. 36세의 맹렬녀 김알렉산드라가 과격파 서백리아(시베리아) 국민대회에서 극동 외교위원장 자리에 오른 것도 이때 이야기다."

- 2편 '일제시대에도 없던 건물...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이동휘, #독립운동, #연해주, #강화도,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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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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