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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산 자들>
 장강명 <산 자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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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살아남은 자들에게 버티라고 채찍질하는 뜻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살아남지 못한 자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끈기와 인내가 부족한 탓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건 누군데?'라는 가장 중요한 의문점을 가려버리는 의도가 불편할 때쯤 <산 자들>이라는 소설이 어느 정도 나에게 답을 내려주었다.

10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연작소설 속 주인공은 각각 파트타이머, 대기발령자, 파업 노조원, 영세업자, 철거민, 아나운서 지망생, 취준생, 친절을 강요받는 사람들, 음악노동자, 학교 비리에 맞서는 학생으로, 작가가 밝힌 것처럼 '2010년대 한국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 누구나 이 열 개의 범주에 속했거나, 속하고 있거나, 속할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질병이 어떻게 개개인의 삶을 비틀고 갉아먹는지 작가는 성실한 조사와 구체적인 묘사를 바탕으로 독자를 공감시킨다.

1부의 세 작품은 '자르기'라는 부제 아래 묶여 있다. 그 중 세 번째 작품인 <공장 밖에서>는 자동차 회사가 회생 계획에서 진행한 집단 해고에 맞서는 노조원들의 투쟁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상부의 잘못까지 하부 사람들이 책임을 떠맡는 전형적인 경우를 보여준다.

고용주가 지시한 업무를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 근로자의 의무라면, 고용 상태를 안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이 고용주의 의무다. 경영에 문제가 있었다면 경영자가 해결할 일이지 왜 근로자가 벌을 받아야 하는가? 더 잔인한 사실은 해고 명단에 올랐느냐, 아니냐를 근거로 노동자들이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뉘어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2부 '싸우기'에 실린 <현수동 빵집 삼국지>에서는 약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복잡해진다. 프랜차이즈 본사 직원들은 갖가지 행사를 진행하며 점주 사이의 경쟁을 가열차게 몰아붙인다.

하지만 할인 행사라는 것이 결국 '비싼 물건을 싸게 사는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 점원들의 노동이 동원되는' 눈속임이었고 복잡한 할인제도, 혼란스러운 본사 지침, 불충분한 설명 등으로 만족스러운 구매를 하지 못한 소비자들은 점원들에게 화를 내었다.

조직의 말단에 위치한 사람들이 윗사람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총알받이가 되는 건 슬프게도 너무 흔한 일이다. 몇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지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실상을 자세히 묘사한 내용은  3부 '버티기'에서 이어진다.

3부 첫 번째 작품 <모두, 친절하다>에서는 주인공 부부의 하루 속에 무조건적인 친절이 기본 업무인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나'의 회사는 사무실을 옮기는 중이다. 나는 이삿짐센터 직원 분들께 뭔가 보답을 드리려고 하지만 '나'의 동료 상은씨는 이사 비용도 다 냈고 우리가 진상을 부린 것도 아니니 이사업체 직원들이 오히려 고마워할 거라고 주장한다.

'난 너에게 진상을 부릴 힘도 기회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는 것에 무슨 보상이 필요한 걸까? 진상을 무방비로 상대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에게 우리는 미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이어서 '나'는 아내와 만나 컨버터블 PC 애프터서비스 센터에 간다. 아내의 반박에 기사는 쩔쩔매다가 부부가 나갈 때 후다닥 출구로 달려 나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배웅한다.

꼼수를 부리는 회사의 방침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는 곧장 눈앞의 직원에게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직원은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낮추며 최대한 손님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 그 또한 회사의 정책이니까. 소비자에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회사의 야비함에 인격이 훼손되는 건 최전방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다.

부부가 만난 모든 노동자들은 극한의 피로도 속에서 굽실거리는 태도로 손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렇게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추락하면서 버티었을 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게 뭘까? 1부 '자르기'의 과정이 진행될 뿐이다.

난 원래 현실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소설을 즐기지 않았다. 내가 현실에서 속속들이 느끼는 답답함과 무기력함을 굳이 소설을 읽으며 또 느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며 때때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고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크고 작은 불의를 반복해서 겪다 보면 어느 순간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체념하고 일상 속에 파묻혀 살아가다 보면 제법 아무 문제도 없는 세상으로 보인다. 그럴 때 이 소설처럼 직설적으로 사회 문제를 끄집어내는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로 정돈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보며 이것이 분명 문제임을, 무덤덤하게 지내기엔 정도가 심각하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작품은 여러 번 정독할 가치가 있다.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은이), 민음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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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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