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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2월 19일부터 3월 1일까지 다녀온 쿠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행 직후 전세계적인 코로나19 확산으로 싣지 못했던 여행기를 1년을 맞아 공유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헤밍웨이와 쿠바

우리 일행이 가이드와 함께 처음 방문한 곳은 아바나로부터 남쪽으로 12km 떨어져 있는 헤밍웨이 박물관이었다. 그곳은 헤밍웨이가 생전에 살았던 집으로 그가 미국으로 떠나자 쿠바 정부가 인수하여 박물관으로 만든 곳이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미국 작가지만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를 사랑했던 인물로서 기억된다. 그는 1939년부터 20년 동안 쿠바 아바나에서 살면서 대표작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집필했다. 특히 <노인과 바다>는 쿠바의 바다를 배경으로 했고 그에게 노벨상을 안기기까지 하였다.

때문에 쿠바 아바나에는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가 묵었던 호텔과 살았던 집은 현재 박물관으로 남아 있으며, 그가 모히토와 다이끼리를 자주 마셨던 술집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와 엘 플로리디타는 지금도 관광객들이 꼭 한 번은 들러야 되는 성지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쿠바 정부도 헤밍웨이를 이용하여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데 적극적이다. 오죽하면 그와 관련하여 '헤밍웨이 루트'가 따로 있을까. 
 
헤밍웨이의 서재
 헤밍웨이의 서재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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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쿠바 정부의 헤밍웨이 사랑과 달리 정작 헤밍웨이 자신은 쿠바 혁명 이후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한때 혁명에 성공한 카스트로와 낚시 대회도 할 만큼 혁명정부에 우호적이었지만, 결국 반미를 국시로 외치는 공산주의 국가 쿠바에서는 살 수 없었다.

아무리 쿠바를 사랑하고 반전을 외치던 소설가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스페인으로부터의 해방 이후 내내 미국의 반(半)식민지였던 쿠바에서 미국인의 삶 아니던가. 혁명 이후 그의 위치는 본질적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스스로도 한계를 느꼈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미국으로 돌아가 1년 뒤 엽총으로 자살하는데 어쩌면 그 모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가이드는 이와 관련하여 헤밍웨이를 일제강점기의 일본 지한파와 비교했다. 만약 그 당시 어떤 일본인이 조선을 사랑했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본국의 일등 국민이 식민지를 사랑했던 것으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쿠바를 사랑했던 헤밍웨이가 비슷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헤밍웨이 박물관에 견학온 쿠바 학생들
  헤밍웨이 박물관에 견학온 쿠바 학생들
ⓒ 박종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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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루트

이와 같은 설명을 들었기 때문일까? 헤밍웨이 박물관은 그 느낌이 달랐다. 아바나 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이 고급주택이 조금 불편했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쿠바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겠지.

박물관은 헤밍웨이가 살았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과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고, 외부에는 그가 수영을 즐겼던 수영장과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배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가 키웠던 네 마리의 고양이 무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많은 동물들의 박제였다. 헤밍웨이는 사냥을 즐겨 했다고 하는데 그곳에 있는 박제들은 모두 헤밍웨이가 잡은 것들이라고 했다. 묘지를 만들어줄 만큼 반려동물을 사랑하고 반전과 평화를 주장했던 소설가의 사냥이라. 모순적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지금의 관점에서였다.

박물관을 노니는데 아침에 봤던 복장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현장 탐방인 듯했다. 쿠바인들은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까? 쿠바 관광은 많은 부분 헤밍웨이에 기대고 있는데 정작 쿠바인들은 헤밍웨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과연 그는 쿠바에서 사랑받는 소설가일까? 아니면 매정한 미국인?

쿠바에서는 모히토를
 
모히토는 쿠바다!
 모히토는 쿠바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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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본 뒤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 사이 매점에서 쿠바에서의 첫 모히토를 시켰다. 그 뒤로 거의 매 끼니마다 모히토를 마실 줄 알았으면 굳이 시키지 않았을 테지만 그때만 해도 쿠바 여행 내내 술을 마실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했던 유명한 대사 "모히토에서 몰디브 한 잔 해야지"의 바로 그 모히토는 어떤 맛일까? 여행을 가서야 알았지만 모히토는 쿠바의 술이라고 했고, 헤밍웨이 역시 모히토를 즐겼다고 하던데 과연 그 맛은?

그러나 모히토를 시켜 마시는데 있어 맛보다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모히토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직원은 빈 잔에 시럽을 따르고 설탕을 넣은 뒤, 애플민트를 잔 안에 가득 넣고 나무막대로 으깨었다. 거기에다 쿠바의 럼주 아바나 클럽을 따른 뒤 얼음까지 넣으면 끝. 그 익숙한 손놀림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드디어 모히토 한 모금. 상큼하고 맛있었다. 달짝지근한 맛을 럼주가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럼주 맛이 세진 않았지만, 계속 홀짝거리고 마시다가는 '뿅' 하고 가버릴 만큼의 도수였다. 그런데 이걸 쿠바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마신다고? 그건 적도 가까이 위치한 쿠바의 숙명인 것도 같았다. 이렇게 더우니 술이 들어갈 수밖에.

모히토에 집중해서 열심히 마시고 있는데 문득 내가 빨고 있던 빨대에 눈이 갔다. 어째 이미 쓴 것 같은 빨대. 설마? 그랬다. 쿠바에서는 빨대를 재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든 물자가 부족한 쿠바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여긴 쿠바니까.

실제로 여행을 하면서 나는 빨대를 씻는 사람을 여럿 볼 수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쿠바 식당에 가면 직원이 손님에게 음식 다 먹었냐며 무안할 정도로 접시를 빨리 치우는데 이 역시 접시가 부족해서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쿠바는 모든 물자가 부족했다.
 
 모히토를 만드는 바텐더의 손길
  모히토를 만드는 바텐더의 손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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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의 꼬히마르 해변

모히토를 다 마신 후 우리가 향한 곳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배경이 되었던 꼬히마르 해변이었다. 가는 도중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 겸 식당이라는 '라 테라사'에 들르고자 했으나 그곳은 공사 중이었다. 아마도 더 많은 관광객을 받기 위함일 것 같았는데, 헤밍웨이의 흔적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이런 확장이 기꺼울지는 미지수였다. 물론 사람들이 원래의 모습을 모르니 상관없겠지만.

<노인과 바다>의 실제 배경이자, <노인과 바다> 영화의 첫 장면에도 나왔다는 꼬히마르 해변은 꽤 볼 만했다. 눈이 시리게 펼쳐져 있는 파란 바다와 아주 오래된 꼬히마르 성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앞에는 헤밍웨이의 흉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헤밍웨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꼬히마르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고기잡이배에서 쓰던 프로펠러를 녹여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헤밍웨이는 매우 소중한 사람이었던 듯했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 꼬히마르 해변
 <노인과 바다>의 배경 꼬히마르 해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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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히마르 성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던 일행 중 몇 명이 성 앞에 앉아 있는 쿠바인들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다. 순간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이런 실례를 해도 되는 것인가. 만약 어느 외국인이 한국에 와서 내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면 나는 괜찮다고 할 것인가. 어쩌면 이는 우리가 쿠바를 타자화해서 소비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우월의식에 기반을 둔.

그러나 저러나 쿠바인들은 흔쾌히 승낙했고, 사진을 찍은 뒤에는 당당하게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몇몇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그것은 정당한 행위였다. 엄연히 초상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물론 많은 쿠바인들이 여행객의 이런 행동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이 비극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라도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면 어쩌면 윈윈일지도 모른다.

가이드의 재촉에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랐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헤밍웨이의 흉상
 헤밍웨이의 흉상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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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쿠바, #헤밍웨이, #모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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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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