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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비법’이 있어서가 아니다. 특별한 ‘한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만이 무조건 맞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엄마의 레시피는 나에게 오로지 하나뿐인 레시피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일흔 살 밥상을 차려드린다는 마음으로 엄마의 음식과 음식 이야기를 기록한다.[기자말]
엄마의 음식들은 유독 손이 많이 간다. 그중에서도 들깻가루를 넣어 만든 음식들은 더욱 그랬다. 들깻가루 음식을 만드는 날이면 부엌은 늘 뭔가 부산스러웠다. 믹서기가 나오고, 광목 천, 채반이 나오며 싱크대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찼다.

어린 시절, 나는 들깨류의 음식을 싫어했다. 들깻가루를 넣어 만든 토란국, 호박고지나물, 버섯나물 등에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한 입 먹어보라는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한 입 먹고 나면 오만상을 찌푸렸다. 들깻가루의 그 어중간한 맛이 싫었고, 노인을 연상시키는 그 색깔도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깻가루 음식의 최절정은 정월대보름날 아침상에서 펼쳐졌다. 엄마는 한 해도 빼놓지 않고 정월대보름날이면 들깨나물류 음식들과 김, 오곡밥, 그 외 나물들로 아침상을 차리고 계신다. 대보름날에는 매운 것을 먹는 게 아니라며 김치도 꺼내지 않으셨다. 나는 엄마가 새벽부터 만든 그 나물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투덜거리며 김에 밥만 싸서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엄마도 들깨 음식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그 음식들을 만드신 이유는 아빠 때문이었다. 아빠는 얼큰하고 칼칼한 음식을 좋아하셨는데, 엄마가 만든 들깨류 음식도 무척 좋아하셨다.

들깻가루, 쌀과 물을 넣고 믹서기에 간 뒤, 그것을 광목천을 깐 채반에 부어 곱게 걸러낸 결정물. 그것은 가루라기보다는 차라리 되직한 들깨 물에 더 가까웠다. 진흙처럼 부드럽고 파우더만큼이나 입자가 고왔다. 마치 사금파리를 건져내듯 곱게 걸러낸 그 들깨 물을 만들기 위해 엄마는 새벽부터 복닥거렸다.
  
엄마는 이제 나물을 맨 손으로 무치지 않는다. 손바닥 피부가 아프시다고 한다. 50년 간의 음식노동에 이제 손바닥도 두 발(?) 든 것일까. 그런 엄마에게 어떻게 맨손의 '손맛'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는 '(사진 찍으려면) 비닐장갑 벗을까?'라고 했지만 그건 위선이다. 사랑은 1회용 '비니루'를 뚫고 나오는법이니까.
 엄마는 이제 나물을 맨 손으로 무치지 않는다. 손바닥 피부가 아프시다고 한다. 50년 간의 음식노동에 이제 손바닥도 두 발(?) 든 것일까. 그런 엄마에게 어떻게 맨손의 "손맛"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는 "(사진 찍으려면) 비닐장갑 벗을까?"라고 했지만 그건 위선이다. 사랑은 1회용 "비니루"를 뚫고 나오는법이니까.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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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엄마의 주방에서 믹서기 소리가 사라졌다. 믹서기는 곱게 포장되어 엄마의 주방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었다. 엄마한테 물어보니, 믹서기를 꺼내고 사용하고, 다시 씻어서 말려서 넣어놓는 일들이 귀찮다 하셨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인지, 엄마의 믹서기 소리가 사라질 시기를 기점으로 나는 엄마의 들깨 음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뒷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듯 확 당기는 MSG 류의 자극은 아니었다. 그냥 문득문득 떠오르는 첫사랑의 안부 같은 뜬금없는 그리움이었다.

어중간해서 싫었던 그 슴슴한 맛은 내 속을 포근하게 만들어주었고, 마음에 들지 않던 그 그레이빛 컬러도 고풍스럽고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머리칼 희끗해질 나이에 사랑에 빠진다는 그 '로맨스 그레이'인가.

엄마는 이제 믹서기 들깨 파우더(?)를 만드는 대신, 들깻가루를 사용하신다. 들깻가루라고 공이 안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근처에 사는 엄마의 친오빠, 즉 나의 외삼촌이 직접 농사지은 들깨와 멥쌀로 직접 방앗간에 가서 빻아다 준 들깻가루다.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직접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근 30년간 제공해주셨으니 아찔할 정도로 감사한 일이다.

호박고지는 작년 여름에 엄마가 직접 썰어서 말린 것이다.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는 기다란 마디호박이 아닌 토종호박(갓난아이 머리만 한 둥근 호박)을 사용한다. 볕 짱짱한 햇볕에 초록색 호박을 썰어, 이틀가량 말리면 급 노화 현상(?)이 일어나며 호박은 쭈글쭈글해진다.

쭈글쭈글해진 호박고지를 냉동실에 잘 보관한다. 수분이 날아가서 본래의 형체를 잃어버린 그것은 더 이상 '호박'이라 부르지 않는다. '호박'이 아닌 '호박고지'라 부르는데 정확한 어원은 모른다. 마침내 어떤 고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일까, 라고 혼자 갸우뚱해본다.

마흔여섯 되어야 알게 된 맛
 
어렸을 때, 내가 싫어했던 음식. 어정쩡한 맛과 컬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야 이 거무튀튀한 음식과 사랑에 빠졌다.
▲ 엄마의 호박고지 나물  어렸을 때, 내가 싫어했던 음식. 어정쩡한 맛과 컬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야 이 거무튀튀한 음식과 사랑에 빠졌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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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고지를 한 번 씻어서 미지근한 물에 불린다. 너무 풀어질 때까지 불릴 필요 없이 약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동안 육수를 준비한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린 물이다. 들깻가루에 물을 넣고 섞어 들깻가루 베이스를 만든다. 물에 불린 호박고지는 한번 씻어서 물기를 꼭 짜서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자른다.

엄마는 호박고지 나물을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엄마가 어린 시절, 엄마를 키워주신 이모가 만들어줘서 먹은 기억은 있었지만 어린 나이라서 본격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결혼 후, 제사상에 오른 들깨 음식을 아빠가 무척 잘 드시는 걸 보고, 연구해 보았단다. 꼭 정월대보름이 아니더라도 우리 밥상에 들깨 음식이 자주 올라왔던 이유는 바로 아빠 때문이었다. 엄마의 들깨 음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엄마의 친구들이었다.

"옥잠화(엄마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 이름)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내가 이 호박고지 나물을 만들어갔거든. 그때 다들 어찌나 그 나물을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만나면 애들이 나한테 그 얘길 꼭 한다. '네가 만들어준 호박고지 나물 너무 먹고 싶다', '너무 맛있었다'라면서."
"그때가 언제였는데?"
"한 30년 됐나... 그때 내 나이가 마흔여섯이었으니까."


헉. 지금 딱 내 나이다. 역시 들깨음식은 마흔여섯은 되어야 그 진가를 알게 되는 음식인가보다. 어른의 맛이다.

호박고지에 다진 마늘과 집간장, 참기름, 통깨를 넣고 주물주물 무친다. 그 뒤에 팬에 기름을 두르고 호박고지를 볶는다. 물을 섞은 들깻가루물 중 윗물을 넣어서 함께 볶아준다. 나물을 볶을 때 기름만 넣고 볶으면 나물이 딱딱해진다. 적당한 물과 함께 볶아주는 게 팁이다. 이때 육수를 넣어서 자박자박 끓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밑에 가라앉은 들깻가루를 넣는다. 들깻가루를 한꺼번에 쏟아 붓지 않고, 본인의 식성에 맞게, 점성과 농도를 봐가면서 넣는 게 중요하다. 대파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통깨를 뿌려낸다.

꼬들꼬들해서 더 맛있는 연륜의 맛

겉보기엔 쭈글쭈글 별 매력 없어 보이지만 한 입 씹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라? 쫄깃한 게 딱 고기 식감이다. 이 꼬들꼬들함. 어리고 여린 것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꼬장꼬장한 맛. 여리고 부들부들해서 꿀꺽 삼켜버리는 게 아니라, 꼬들꼬들해서 더 오래 씹고 음미하고 싶은 이 연륜의 맛. 부드럽고 고소한 들깨의 풍미가 어우러지며 아무리 먹어도 탈이 안 날처럼 순한 느낌이다. 주름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미소를 보는 맛이랄까.

호박고지 나물. 나는 왜 너의 진가를 왜 이제야 알아보았던가. 때가 되어야 아는 것들이 있다더니, 음식도 그 나름의 때라는 것이 있나 보다. 평생 들깨 음식을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마흔여섯에야 나는 들깨 음식과 사랑에 빠졌다. 이른 아침부터 믹서기 소리로 나를 흔들어 깨웠던 엄마의 들깨 음식들이 30년이 지나 내 마음에 '수신 완료'된 것일까.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믹서기를 사용하지 않고, 광목천이니 나무채반이니 하는 번잡한 것들을 꺼내어 사용하지 않으신다. 근 50년 동안,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챙겨 오신, 지금도 챙기고 있는 나이 드신 엄마의 그 귀차니즘(?)을 나는 백번 천번 이해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쭈글쭈글하지만 지난여름의 태양을 품고 있는 호박고지 나물. 그 안에 엄마가 보인다. 한 입 넣으면 푸른 여름 싱싱한 호박 맛도 떠오른다. 맛있다. 그런데 눈물이 난다. 맵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희한한 맛이다.
 
▲ 엄마의 호박고지 나물 엄마가 해주시던 호박고지 나물. 정월대보름 무렵에 더욱 생각나는 엄마의 음식.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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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환 여사의 호박고지 나물 레시피            

1. 호박고지는 가볍게 씻어서 미지근한 물에 불린다. (너무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2.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만든다.

3. 호박고지가 물에 불 동안, 들깻가루를 물과 섞어서 가라앉힌다. (비율은 들깨가루 4스푼에 물은 1컵)

4. 물에 불린 호박고지를 씻어서 물기를 꼭 짜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5. 다진마늘과 집간장, 참기름, 통깨를 넣어 호박고지를 조물조물 무친다.

6. 팬에 식용유를 두른 뒤, 양념한 호박고지를 볶는다. 이때 3의 맑은 물을 넣으면서 볶는다. (기름으로만 볶으면 나물이 딱딱해진다.)

7. 물을 넣고 끓이다가 가라앉힌 들깻가루를 넣으면서 농도를 맞춘다.

8. 마지막으로 어슷어슷 썬 파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상에 낸다.
 

태그:#엄마요리탐구생활, #호박고지나물, #들꺠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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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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