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빛> 포스터

<밤빛> 포스터 ⓒ 씨네소파

 
배호의 노래 '비내리는 밤길'로 시작하는 <밤빛>의 오프닝은 그 처연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희태는 산속에서 혼자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그의 누나는 헤어진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전하는데, 이 편지에는 그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예기치 못한 만남을 준비하는 희태. 어쩌면 가장 빛나는 햇살과도 같은 순간이 될 아들과의 만남을 다룬 이 영화의 제목은 '밤빛'이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희태의 모습 이후 작품은 전반부를 묵언수행으로 보낸다. 산속에서 약초와 버섯을 채집하고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희태는 침묵이 익숙하다. 때문에 그의 공간인 산속의 집은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하다. 산 정상에 오를 때도, 약초를 캘 때도 사소한 사건 하나 벌어지지 않는다. 고요함에 익숙한 그는 인생 마지막 순간의 쓸쓸함을 덤덤하게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밤빛> 스틸컷

<밤빛> 스틸컷 ⓒ 씨네소파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 혼자 아궁이에 뗀 불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마음은 '비내리는 밤길'의 주인공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밤에 나 혼자서 걸어가는데 / 아프도록 괴로운 나의 가슴을 / 소리없이 적셔주는 싸늘한 밤비 / 그칠 줄은 왜 모르나 이눈물처럼'이라는 가사처럼 혼자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을 함께 하는 건 소리 없이 적셔주는 밤비와 같은 차갑고도 싸늘한 밤공기다.
 
영화의 오랜 침묵은 희태의 아들, 민상의 등장과 함께 목소리를 찾게 된다. 2박 3일 동안 아버지와 함께 지내기 위해 아들은 산골에 위치한 집을 향한다. 두 사람의 거리감은 첫 만남인 음식점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음식이 나온 후에도 말 한 마디 없는 건 물론,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부자(父子)는 어색함을 숨기지 않는다. 이 침묵은 희태의 발자국을 민상이 따라가면서 점점 사라진다.
 
스마트폰 신호를 잡기 위해 희태를 따라 산 정상에 오르는 장면을 시작으로 민상은 희태 옆에 붙어 산 속 생활을 함께 경험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와 가까워지고 친근함을 느낀다. 두 사람이 가까워짐을 잘 보여주는 소재가 표고버섯이다. 희태는 표고버섯을 찾는 고객한테 버섯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표고버섯은 민상의 저녁밥상에 삼겹살과 함께 올라가며 아들에게 애정이 생긴 희태의 모습을 보여준다.
 
 <밤빛> 스틸컷

<밤빛> 스틸컷 ⓒ 씨네소파

 
산, 하늘, 폭포 등 거대한 자연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들은 대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운명적인 한계나 덧없는 인간사를 표현한다. 테렌스 멜릭 감독의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전쟁영화 <씬 레드 라인>은 대자연 속에서 인간성을 파괴해 가는 전쟁이 얼마나 부질없는 다툼인지를 보여준다.
 
<밤빛>은 함백산, 방백산, 인제, 정선 등의 지역이 지닌 자연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며 시한부 인생이란 운명적인 한계 속에 피어나는 작지만 소중한 추억들을 담아낸다. 그 어떤 거대한 이야기도 자연의 위대함 속에서는 덧없어 보이기에, 두 사람이 쌓아가는 추억 하나하나는 더 소중하고 따뜻하게 다가온다.
  
 <밤빛> 스틸컷

<밤빛> 스틸컷 ⓒ 씨네소파

 
민상은 희태에게 '햇빛'이 되어주진 못한다. 그 어둠을 완전히 걷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두운 밤을 함께 보내며 쓸쓸함을 위로해준다. 때문에 작품의 제목은 '밤빛'이 된다. 희태가 홀로 걸어가야만 하는 깊은 어둠 속, 잠시 곁에 머물렀지만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준 민상은 그의 어둠에 자리 잡을 하나의 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와 나는 남과 남인데 / 다시는 부질없는 생각말자고 / 타이르며 혼자서 걷는 밤길에 / 하염없이 쏟아지는 차가운 밤비"라는 '비내리는 밤길'의 가사는 앞으로 희태가 얼마나 오래 혼자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또 밤비와 같은 눈물을 흘러야 하는지를 암시한다. 허나 이런 고통 속에서도 민상이란 '밤빛'이 있기에 어둠을 이겨낼 수 있다는 암시를 주며 가슴 따뜻한 드라마를 완성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씨네리와인드 기자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밤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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