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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굴다리에서 총탄 흔적을 살펴보는 모습
 쌍굴다리에서 총탄 흔적을 살펴보는 모습
ⓒ 양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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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노근리를 방문한 건 지금부터 13년 전이었다. 청운의 꿈을 품고 대학에 입학했던 그해 여름, 대학 선배들과 함께 노근리를 찾았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수백 명의 민간인이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 그곳의 참상을 직접 보고 느끼기 위함이었다. 오래전이라 그때 어떤 얘기들이 오고 갔는지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쌍굴다리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기억은 지금도 뇌리에 강렬히 남아 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13년이 지난 지금 노근리는 어떤 모습일까. 나는 교사들의 연구·실천 단체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이하 참세상)의 회원이다. 참세상은 미군의 학살 현장을 직접 경험하기 위해 지난 2월 2일 노근리 답사를 다녀왔다. 이번 노근리 답사를 기획하면서 떠올린 것은 지난 추억에 대한 호기심과 이번에 함께 하는 참세상 회원들이 학살의 현장인 쌍굴다리를 직접 보고 과거의 나처럼 영감을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자연스레 이번 노근리 답사에선 내가 자료 조사를 하여 일행에게 설명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고 사건 개요부터 경과, 현재 모습까지 자료 조사를 해나갔다. 오랜만에 노근리 학살을 다룬 만화책도 보고, 인터넷으로 그때 있었던 일도 찾아보고 했었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참상이 머릿속으로 잘 그려지진 않았다.

내 머릿속 참상의 기록을 생생히 만들어준 마지막 퍼즐은 바로 쌍굴다리였다. 쌍굴다리에서 다시 눈으로 마주한 무수한 총탄 흔적은 나를 1950년 여름으로 돌려보내 주는 듯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1950년 전쟁 발발 후에 한 달이 지난 7월 말, 북한군의 공세 속에 후퇴를 거듭하던 미군은 충북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주민들은 미군 제1기병사단이 시키는 대로 대구를 향해 피란길에 올랐다. 그리고 7월 26일 정오, 미군의 유도로 경부선 철도 위에 모여있던 피란민들을 향해 미군 전투기가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폭격 속에 당시 600~700명의 피란민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피란민들은 폭격을 피하고자 쌍굴다리 밑으로 피신하였다. 폭격으로 삽시간에 부모‧형제‧자녀를 잃은 피란민들에게 굴다리가 은신처가 되어주던 것도 잠시, 미군은 이내 굴다리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29일 미군이 후퇴할 때까지, 무차별 사격은 장장 4일간 계속되었다. 그 4일간 굴다리는 지옥이 되었다.

지금은 작고하신 전 노근리사건희생자 유족회 회장 정은용씨의 증언을 보자. 두 살 난 딸 구희가 몹시 울자 정은용 전 회장의 어머니가 구희를 달래기 위해 업고 터널 밖으로 잠시 바람 쐬러 나갔다가 미군이 쏜 총에 구희가 맞아 숨졌다. 정은용 전 회장의 아내 박선용씨는 다섯 살짜리 아들 구필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구필을 데리고 굴다리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산길을 헤매던 박선용씨는 미군 초병이 쏜 총에 옆구리를 맞고 중상을 입었고, 그 총알은 등에 업고 있던 아들 구필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시체가 되어버린 자신의 형제자매 아래 숨을 죽여야 했고, 누군가는 무섭다 울어대는 갓난아기를 제 손으로 도랑에 던져 죽이고 그 대가로 실성했다.

이러한 학살은 노근리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추후 노근리 학살을 보도한 AP통신에 따르면 1950년 7월부로 노근리뿐 아니라 '전선을 넘어오는 모든 피난민을 향해 발포하라'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한다. 곳곳에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눈을 떠 다시 쌍굴다리를 마주했다. 전쟁 이후에 태어난 내가 봐도 한눈에 그날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지는데 학살 후 살아남은 주민들은 그간 이 다리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전쟁 후 한국 사회는 미국을 나라를 구해준 은인으로 신성시했기에 그런 미군에게 전쟁 범죄를 묻는 것은 금기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학살 희생자와 유가족의 억울함을 풀고자 정은용 전 회장이 1960년, 미국 정부에 노근리 학살에 대한 미군의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냈다. 미국은 청원을 뭉갰지만, 정은용 전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노근리 사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1977년에는 노근리 사건을 주제로 중편 소설을, 1994년에는 장편 소설 <그대, 우리 아픔을 아는가?>를 출간했다. 

정은용 전 회장의 아들, 정구도 박사 또한 아버지를 도와 노근리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발을 벗고 나섰다. 미군의 피란민 학살이 실제로 있었음을 입증하는 객관적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곳을 뒤졌고, 마침내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서 한국전쟁 당시 노획된 폭격과 기총소사의 대상으로 평화주민 4백 명을 학살'이라는 제목의 <조선인민보> 기사를 발견했다.

이렇게 자료를 찾고, 언론에 꾸준히 제보하기를 몇 년, 우리나라 언론이 노근리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1999년 미국의 AP통신 보도였다. AP통신이 미국 전역에 노근리 학살 사건을 전면 보도함으로써 미국은 더는 노근리 사건으로부터 발을 뺄 수 없게 되었다.

1999년 AP통신이 보도하고 나서야 미국 정부는 부랴부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1월, 미 국방장관은 노근리 학살이 있었음을 인정하나 동시에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주 이상한 성명을 발표한다.
  
'이러한 사건을 회상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미국인도 한국인도 역사를 묻어서는 안 된다. 전쟁의 결과로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이 숨진 것은 우리 양국에 강요된 것으로 우리는 자유 수호를 위해 싸운 용감한 병사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듯 그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전쟁 노력이 한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궁극적으로 이를 보존, 우리의 오랜 협력관계와 오늘날 한국이 누리고 있는 번영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위 성명에서 '전쟁의 결과로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이 숨진 것'이나 '우리의 전쟁 노력이 한국민의 자유를 보호하고, 번영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부분을 보라. 실제 피난민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학살의 주체가 미군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은 채, 한미동맹이 이 땅의 자유를 지켰다며 학살의 책임으로부터 슬그머니 빠져나가려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극에 대한 우리의 깊은 유감의 상징으로 미국은 노근리 부근에 기념비를 세워 자기 나라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투쟁하다 목숨을 잃은 무고한 한국 민간인들에게 바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은 한.미 기념장학금이라고 명명키로 양국이 합의한 장학기금을 설립할 것이다. 이 기금은 전쟁 중 숨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것이다. 

이 기금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한국과 미국에서 자신들의 교육을 증진시켜 양국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성명 끝엔 당시 미국이 제시한 보상안이 적혀 있다. 기념비를 세우고, 장학기금을 설립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 노근리에는 미국 정부가 세운 기념비가 있을까? 결국, 미국은 기념비를 세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시 미국이 유가족 측에 제시한 보상안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 정부는 노근리 사건 책임 인정이 한반도 전역 양민 학살 피해 규명으로 이어지는 걸 꺼렸다. 그래서 유가족 측에 "이후 한국전쟁과 관련한 어떠한 학살 책임도 묻지 않겠다"라는 요구를 받아들여야만 보상을 할 수 있다고 회유하였으나 노근리 유가족들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노근리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진상규명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직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양민 학살의 진실 또한 밝혀져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 의식 때문이었다.

장학기금 또한 지난 2006년에 미국 국고로 다시 환수되어 결과적으로 미국이 노근리 학살의 책임을 지겠다고 실제 행동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미국은 진상 조사 내내 피란민들이 미군에 의해 죽은 것은 맞지만, '고의'는 아니었다며 책임을 회피했고,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과를 정확히 가려낼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클린턴은 끝내 노근리 유가족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알량한 '유감 표명'만 했다.

이번 노근리 답사를 통해 제일 크게 느낀 것은 노근리 학살 진상규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유가족들은 미국이 노근리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책임지도록 싸우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7월 말이면 노근리에서 추도식을 여는 것도 억울한 죽음이 잊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리라.

이런 유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노근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에 대해 여전히 무관심하다. 2020년 6월 25일, 한국전쟁 70주기를 맞아 서울공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나라로 송환된 국군 유해 앞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동안 유가족들은 잊힌 죽음 때문에 또 한 번 눈물을 훔쳐야 했다. 정부는 노근리를 비롯해 미국이 저지른 수많은 학살의 책임을 명확히 묻는 것을 무시한 채 그저 앵무새처럼 한‧미동맹만 외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진정한 동맹이라면, 그리고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대통령의 약력처럼 '인권'의 가치를 중시한다면 노근리를 비롯한 학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부터 명확히 밝혀야 하지 않는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그 책임을 묻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노근리 희생자들은 굴종적인 대미(對美) 관계 속에서 여전히 쌍굴다리 안에 갇혀 있다.

※ 노근리 답사를 체험학습 활동으로 활용하기!
찾아가는 길 : 영등포역에서 무궁화호 탑승→황간역에서 내려서 642번 버스 탑승→목화 정류장 하차 (소요시간 약 3시간, 비용 약 1만5000원)
관련 자료 : 영화 <작은 연못>. 당시 피란민들이 겪은 상황을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영화.

답사 방법 : 영화 '작은 연못'과 노근리 관련 기사들을 먼저 접하신 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쌍굴다리 현장에 도착하면 먼저 노근리 평화공원을 둘러보면 좋습니다.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전시관 관람은 불가하지만, 공원 외부에도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후 쌍굴다리로 이동하면 참혹했던 그 날의 참상이 남아있는 총탄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굴다리 반대편으로 가도 총탄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로 보아 굴다리를 둘러싸고 사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곳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위령비가 있지만,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은 점으로 미뤄봐 노근리가 소외당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굴다리는 현재 차량 통행로로 쓰이기 때문에, 관람할 때 차량을 조심해야 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참교육으로 여는 세상>은 역사의 진실과 정의,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을 미래 세대에 가르치기 위해 함께 배우고, 함께 실천하는 교사, 예비 교사, 시민들의 모임입니다.
유튜브 : https://www.youtube.com/channel/UCn8i2e5nRtmlVlIUdskVLmQ
블로그 : https://blog.naver.com/4cham_edu


태그:#노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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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교사로 근무 중입니다. 학생들과 단순히 지식을 공유하기보다 함께 가치를 고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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