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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는 물론 음식이다. 하지만 깍두기라는 말은 먹는 것 외에 사람을 가리킬 때에도 이따금 쓰인다. 아이들이 편 갈라 노는데 양쪽 머릿수를 정확히 맞출 수 없는 경우, 추가로 허용되는 멤버가 깍두기다. 이른바 '주먹'이나 '어깨', 또는 단역 배우를 달리 이르는 속어 가운데 하나도 깍두기다. 그리고, 80여 년 전 서울에는 시민과 언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깍두기라 불린 남자도 있었다.

1937년 여름에 발표된 '재즈송' <명물 남녀> 가사에는 그 실존 인물 깍두기가 이렇게 등장한다. '이 몸은 서울 명물 깍두기/ 모던보이 대표하는 장난꾼/ 새빨간 넥타이 날 좀 보세요/ 서울서 나 모르면 실수지'. 모르면 실수라고까지 묘사된 깍두기는 실제 1935년부터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한 당대 서울의 명물이었다.

노래 가사에도, 영화판에도 '깍두기'가 있었다 
 
깍두기가 등장하는 대중가요 <명물 남녀> 가사지
 깍두기가 등장하는 대중가요 <명물 남녀> 가사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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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사해공론>에서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깍두기에 대한 '특종 기사'를 1935년에 내기까지 했다. 본명은 고흥택, 나이는 스물아홉(한두 살 더 많은 것으로 소개한 다른 기사도 있다), 고향은 논산, 현재 거주지는 서울 다옥정(현재 다동). 어릴 적 이름이 갑득 또는 갑택이어서 발음에 따라 깍두기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고, 노래 가사에도 나오듯 항상 매는 넥타이가 새빨간 깍두기 빛이라 깍두기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깍두기 고흥택이 세상 사람들 눈길을 끌었던 이유는 우선 그 독특한 겉모습에 있었다. 기름을 잔뜩 발라서 붙여 넘긴 머리카락,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던한 양복, 배우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지팡이, 그리고 별명의 유래라고도 하는 깍두기의 상징 새빨간 넥타이와 손수건. 거기에 더해 그 붉은 빛과 대조를 이루는 검게 탄 얼굴(머릿기름을 너무 발라 모자를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1935년 일간지에 실린 고흥택의 사진
 1935년 일간지에 실린 고흥택의 사진
ⓒ 조선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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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깍두기는 그렇게 눈길 끌 수밖에 없는 모습에 더해 강박이 아닐까 싶을 만큼 독특한 행동으로도 유명했다. 계절이나 날씨에 상관없이 매일 비슷한 시간에 정해진 장소를 순회하며 서울 시내를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유명 백화점, 다방, 극장 등이 날마다 그가 빠짐없이 들르는 곳이었다. '걸어 다니는 시계'로 불렸다는 칸트 같은 존재가 1930년대 중반 서울 장안의 깍두기였다.

배우나 가수 같은 직업 연예인은 아니었고, 사실 뚜렷한 경제 활동을 하지도 않는 깍두기였지만 그는 어느덧 서울 시민이라면 정말 모를 수가 없는, 요즘 말로 '셀럽'이 되어 있었다. 때문에 앞서 본 바와 같이 대중가요 가사에도 등장을 했고, 심지어 연극이나 영화 쪽에서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잡지 기사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본 영화사에서 깍두기 소재 영화를 기획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조선중앙일보> 1935년 11월 2일자). 기획은 아마 불발에 그쳤던 것으로 보이나, 실제 고흥택에게 제안이 갔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 깍두기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무렵 새로 개관한 동양극장에서는 극단 신무대가 <깍두기>라는 단막 희극을 상연하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실제 깍두기가 깜짝 출연을 했다. 연기자가 아니다 보니 대사도 없이 그냥 무대를 한 번 휘돌다 나갈 뿐이었지만, 길거리에서나 보던 깍두기를 극장 무대에서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되기에는 충분했다(동아일보 1935년 12월 3일자).

길지 않았던 관심, 잊힌 '깍두기'
 
깍두기 고흥택이 실제 출연했던 연극 광고
 깍두기 고흥택이 실제 출연했던 연극 광고
ⓒ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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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의 차림과 행동이 자연스러운 개인 취향의 산물이었는지, 아니면 혹 '관종' 욕구에서 비롯된 연출이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여하튼 당대 대중문화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그가 나름 의미 있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다만, 깍두기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과 소비가 그렇게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던 것도 역시 분명하다. 1930년대가 저물면서 깍두기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작가 홍성유가 김두한을 소재로 쓴 1980년대 인기 연재소설 <인생극장>에도 깍두기가 등장하기는 한다. 경성 부민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일본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 독창회에서 깍두기가 일부러 공연에 훼방을 놓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작가가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고흥택이 1940년대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등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지만, 깍두기의 인기는 길게 잡아도 '관(심)불오년'이었다. 일견 단순하게 넘어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나, 사실 가차 없고 잔인하기까지 한 대중의 호기심. 그 속에서 한때 각광을 받았던 깍두기는, '명물'로서 삶에 과연 얼마나 만족했던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도 대중의 관심 받기를 원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요즘, 깍두기가 후세에 남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태그:#깍두기, #고흥택, #명물 남녀, #동양극장, #신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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