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테이프로 영상 문화를 즐기던 'VHS 세대'에게 오맹달(우멍다)이라는 배우는, 이름은 모르더라도 얼굴을 보면 누구나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친숙한 인물이다. VHS 시대의 전성기는 곧 홍콩영화의 전성기이기도 했고, 특히 주윤발이나 주성치, 유덕화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은 항상 비디오대여점의 인기 리스트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이 쟁쟁한 홍콩 스타들의 옆자리에서 수많은 작품마다 출석체크하듯이 자주 등장하여 자연스럽게 눈도장을 찍게 된 단골 조연들도 있었다. 성규안, 증지위, 임세관, 장요양 등 배우층이 그리 두텁지 않았던 홍콩영화계에서 조연급 배우들의 다작은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탁월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스틸러는 정해져있기 마련이다.

'어, 이 콧수염 아저씨 여기서도 또 나와?'라고 할 만큼 마치 대문만 열면 만날 수 있는 동네 이웃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면서도, 훗날 영화 속 가장 인상깊은 명장면을 회상할 때마다 기억의 한구석에서 다시 존재감을 곱씹게 만드는 개성파 배우, 그게 바로 오맹달이었다.

오맹달이 지난 27일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영화팬들이 애도하고 있다. 특유의 사람 좋아보이는 웃음과 코믹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연기력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배우였기에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홍콩 영화 애호가들이 그와의 때이른 이별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중국 광동 푸젠성 샤먼 시에서 태어난 오맹달은 7살 때 부모님을 따라 홍콩으로 이주했고, 1973년 당시 홍콩 연예인들의 스타 등용문이던 TVB 연예인 훈련반에 입사하며 연기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모두 전설적인 스타들이 된 주윤발, 임달화, 임영동 등이 동기였다. 오맹달은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데뷔 초기부터 고생을 함께하며 두터운 친분을 쌓아왔다.

오맹달은 연기 인생 내내 주로 주인공의 옆에서 활약하는 동료, 친구, 심복, 스승같이 '믿을 수 있는 조력자' 역할이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처음 주목을 받게 된 것도 1979년 TVB 드라마 <초류향전기>의 호철화 역할이었다.

무협작가 고룡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초류향 시리즈는 중국에서도 오늘날까지 수많은 영상매체로 끊임없이 제작될 만큼 인기있는 작품이다. 초류향이 중국판 셜록 홈즈같은 캐릭터라면, 호철화는 왓슨으로 이해하면 쉽다. 중국의 원로 드라마 스타인 정소추가 지금도 '영원한 초류향'으로 불릴 만큼 캐릭터의 정체성을 정립했다면, 호철화의 캐릭터는 오맹달이 구축한 이미지가 '원조'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만큼 그 영향력이 컸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부와 명성을 거머쥔 오맹달은 1980년대 초기 방탕한 사생활에 젖어 큰 슬럼프를 맞이한다. 술과 여자, 도박에 빠져 막대한 재산을 탕진했고, 당시 홍콩 연예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삼합회에게 거액의 빚까지 지며 협박에 시달리는 등 곤경에 처했다. 연예계에서도 평판이 나빠지며 섭외가 끊겼다. 오맹달이 당시 절친이던 주윤발에게 거액의 돈을 빌리려고 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절치부심한 오맹달은 이후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1985년 드라마 <신찰사형>에 출연하면서 재기했다. 당시는 홍콩영화의 최전성기였고 오맹달은 수많은 작품에 비중을 가리지않고 조연으로 출연하여 엄청난 다작배우로 활동했다. 오맹달이 훗날 중국의 한 토크쇼에서 밝힌바에 따르면 연기자로서 재기할 수 있었던데는 친구인 주윤발의 도움이 컸다.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이 거절당한 이후 오맹달은 한동안 주윤발을 원망하며 소원한 사이가 되었고 시상식 등에서 마주쳐도 외면해왔다. 그런데 알고보니 오맹달이 일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주윤발이 영화 관계자들에게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평판이 나쁘던 오맹달의 캐스팅을 망설이던 이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는 것. 감동한 오맹달은 친구의 진심을 이해하고 "만일 그때 주윤발이 나에게 돈을 빌려줬다면 내 인생은 더 크게 망가졌을 것"이라며 회고했다.

또한 '영혼의 콤비'로 알려진 주성치와 함께한 1990년대는 오맹달의 연기 인생에 두 번째 전성기를 열어줬다. 국내에서도 <소림축구>,<도학위룡>,<도성>,<정고전가>,<서유기>,<녹정기> 등 오맹달하면 주성치과 함께한 코믹 영화의 이미지로서 기억하는 팬들이 가장 많다. 보통 대중들이 홍콩영화의 조연급 배우의 이름까지 아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당시 홍콩영화나 주성치의 작품을 좋아했던 팬들 사이에서는 자연히 오맹달의 이름까지 모를수가 없었을 만큼 존재감이 특별했다.

오맹달은 주인공의 옆에서 티격태격하면서도 온갖 고락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료이자, 때로는 주인공보다 더 심하게 망가지는 샌드백 역할을 자처하는 웃음제조기였고, 어설픈 행동으로 사고를 치면서도 끝내 미워할 수 없는 연민을 자아내게 만드는 아저씨이기도 했다.

실제 인생에서도 오맹달은 주성치에게 좋은 선배이자 멘토였다. 주성치가 아직 홍콩 드라마의 단역을 전전하던 시절에 이미 오맹달은 주목받는 스타였고,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됐다. 오맹달은 일찌감치 주성치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고, 성격과 연기관도 잘 통했다.

주성치가 어느덧 직접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거물급 스타이자 감독으로 성장해가가면서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오맹달을 영화속 또다른 페르소나로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작품에서도 오맹달은 마치 주성치의 또다른 자아나 분신을 연상시키는 듯한 캐릭터로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오맹달과 주성치는 <소림축구> 이후로는 더 이상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추는 일이 없었다. 일설에 의하면 주성치가 <쿵푸허슬>을 준비할 때 오맹달을 섭외하지 않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로 인하여 한동안 두 사람간의 불화설이 나오기도 했다. 2017년에는 주성치가 제작한 <미인어>에 오맹달을 캐스팅하려고 했으나 이때는 오맹달이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아 연기활동을 중단하고 투병중인 상태가 섭외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맹달은 2019년 인터뷰에서 주성치와의 불화설을 부정하며 특별한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지며 자연스럽게 멀어진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주성치는 오맹달 외에도 한때 친분이 깊던 다른 동료 배우들과 연락이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맹달은 주성치와 작품에서의 재결합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오맹달이 최근 별세하면서 결국 주성치와의 빛났던 콤비플레이는 영영 다시 볼수 없게 되었다. 주성치는 "병세를 지켜보며 다소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여전히 너무 슬프고 비통하다"며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웃기는 감초 연기자 이미지가 강하지만 오맹달은 결코 코믹연기에만 능하거나 주성치의 작품에서만 빛을 발했던 배우는 아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100편이 넘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특경도룡>, <천장지구 >1편 등에서 의외로 진지하거나 비장미 넘치는 배역도 상당히 잘 소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전성기의 오맹달과 비슷한 유형을 꼽으라면 성동일 혹은 유해진과 가깝지않을까.

오맹달은 2002년 한 영화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한 한국 팬으로부터 팬레터를 받았던 일화를 공개하며 자신의 연기관을 밝힌 바 있다.

"한국의 소녀팬이 TVB를 통하여 나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연기하는 내 모습이 좋다고 하더라. 사실 연기를 시작하고 처음엔 멋있게 보이고 싶다는 허영심이 더 강했다. 정말 연기를 좋아하게 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이제 지금은 망가지는 것은 상관없어졌다. 30년넘게 연기를 했더니 이제 어떤 시나리오나 배역도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누군가는 감독을 해보라고 권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게는 어떤 인물이든 될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이 더 매력적이다."

오맹달은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활발한 연기활동을 이어왔으나 2014년부터 지병인 심부전이 악화되며 연기공백이 길어졌다. 최근에는 간암 진단까지 받으며 힘겨운 투병생활을 이어 온 끝에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다. 52년생으로 향년 70세. 현대에서는 그리 고령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나이다. 외모나 액션 등으로 승부하는 스타급 배우가 아니었음에도 특유의 연기력 하나로 관객들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오맹달은 홍콩영화와 VHS 시대의 전성기를 사랑했던 영화팬들의 가슴속에서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오맹달 주성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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