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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2020년 1월 5일~10일(5박 6일) 중국 쓰촨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기자말]
"산은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고, 물은 깊다고 좋은 게 아니라 용이 살아야 신령하다(山不在高有仙則名, 水不在深有龍則靈)"고 한다.

쓰촨의 산수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신선과 용이 없으면 명산도, 신령한 물도 될 수 없다. 쓰촨의 자연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건 신선처럼, 용처럼 살다간 걸출한 인물들의 흔적일 것이다.

쓰촨에는 물을 다스린 우임금과 이빙부자,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러브스토리, 시인 이백과 두보, 미인 양귀비, 유일한 여황제 측천무후, 북송의 문인 소순, 소식, 소철, 현대문학의 거두인 궈모뤄(郭莫若)와 파진(巴金), 개혁개방의 총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건 <삼국지> 촉한의 유적인데 바로 그 주인공 유비와 제갈량을 함께 모신, 중국 유일의 군신 합동 사당 무후사(武侯祠)다.

어메이산(峨眉山)에서 청두 무후사(武侯祠)까지 168km, 최대한 빨리 달려 무후사의 폐장 시간인 5시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버스가 왔던 길을 되짚어 북쪽으로 거슬러 오른다. 러산(樂山)을 거쳐 메이산(眉山)을 지난다. 메이산은 소동파의 고향이다. 그의 아버지 소순과 그의 동생 소철도 모두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올렸다.

청두에 거의 다다를 무렵 고속도로 곁으로 궈모뤄 고거(故居) 이정표도 보인다. 청두 시내에 들어서며 차가 막혀 애를 태웠지만 다행히 폐장 20분 전에 도착해서 무후사에 들어선다. 못 볼 수도 있던 곳을 아슬아슬 입장해 관람하는 쾌감이 함께 한다.
 
무후사 입구 한소열묘(漢昭烈廟) 현판이 걸려 있다. 촉한의 황제 유비의 시호가 한소열이니 유비를 모신 사당임을 알린다.
▲ 무후사 입구 한소열묘(漢昭烈廟) 현판이 걸려 있다. 촉한의 황제 유비의 시호가 한소열이니 유비를 모신 사당임을 알린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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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 배도(裵度), 유공작(柳公綽), 제갈량 세 절세가인이 합쳐졌다 하여 삼절비(三絶碑)라 불린다.
▲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 배도(裵度), 유공작(柳公綽), 제갈량 세 절세가인이 합쳐졌다 하여 삼절비(三絶碑)라 불린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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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는 한소열묘(漢昭烈廟) 현판이 걸려 있다. 촉한의 황제 유비의 시호가 한소열이니 유비를 모신 사당임을 알린다. 사람들에게 무후사로 불리지만 군신의 예가 있으니 황제의 사당이 앞에 자리했다.

대문을 들어서자 비석을 둘러싼 작은 누각이 좌우로 있는데 오른쪽이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다. 당나라 때 재상 배도(裵度)가 글을 짓고 서예가 유공작(柳公綽)이 글을 쓴 것으로 제갈량의 공덕까지 합쳐져 세 절세가인이 합쳐졌다 하여 삼절비(三絶碑)라 불린다.
 
명량천고 현판 “임금은 밝고 신하는 어지니 천고의 모범이다(君明臣良,千古垂范)”는 말에서 따왔다.
▲ 명량천고 현판 “임금은 밝고 신하는 어지니 천고의 모범이다(君明臣良,千古垂范)”는 말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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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의 <출사표>, 악비의 글씨  후반부로 갈수록 초서체로 글씨가 요동친다.
▲ 제갈량의 <출사표>, 악비의 글씨  후반부로 갈수록 초서체로 글씨가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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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대문에는 '명랑천고(明良千古)' 현판이 걸려 있다. 이곳은 청나라 강희 11년(1672)에 재건되었는데 청나라와 패권을 겨뤘던 명(明)의 한자를 그대로 쓸 수 없었던지 날 일(日)에 한 획이 더 그어져 눈 목(目)으로 쓰여 있다. 원래 "임금은 밝고 신하는 어지니 천고의 모범이다(君明臣良,千古垂范)"는 말에서 따왔다. 유비와 제갈량을 두고 한 말이리라.

문을 들어서자 뒷벽에 중국 4대 명문으로 불리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가 남송의 명장 악비의 서체로 적혀 있다. 악비가 글을 쓰며 명문에 감정이 북받쳐 후반부로 갈수록 초서체로 글씨가 요동친다. <출사표> 전편은 227년, 후편은 228년에 쓰이는데 온 몸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그치겠다는 '국궁진췌사이후이(鞠躬盡瘁死而後已)'의 글귀가 눈물겹다. 예부터 이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
 
유비의 사당 ‘업소고광(業紹高光)’ 편액은 유비가 한 고조 유방의 제업(帝業)을 이었다는 의미다.
▲ 유비의 사당 ‘업소고광(業紹高光)’ 편액은 유비가 한 고조 유방의 제업(帝業)을 이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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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나아가자 중앙에 유비상이 모셔져 있고, 편액에는 '업소고광(業紹高光)'이라 적혔다. 유비가 한 고조 유방의 제업(帝業)을 이었다는 의미다. 유비상 왼편에 손자 유심의 소상이 있다. 손자 유심은 있는데 2대 황제인 아들 유선은 없다. 원래는 있었는데 송대의 한 지방관이 없애버렸다고 한다.

유선이 없는 이유를 알려주는 성어가 바로 '낙불사촉(樂不思蜀)'이다. 263년 위나라가 공격해오자 유선은 싸우지도 않고 투항을 결정한다. 유선은 자신의 아들 유심은 자결함에도 포로가 되어 뤄양(洛陽)으로 잡혀간다. 뤄양에서 사마소가 고국이 생각나지 않느냐고 묻자 유선은 이곳이 안락하여 고향을 잊었다며 '낙불사촉'이라 대답한다. 유선은 그렇게 무능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영원히 촉나라 사람들의 마음에서 지워졌다.

유비 동편에는 '의박운천(義薄雲天, 의로움이 하늘에 닿았다)' 편액 아래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관흥이, 서편에는 '성관금석(誠貫金石, 충성스러움이 금석을 뚫었다)' 편액 아래 장비와 아들 장포, 손자 3대가 모셔졌다. 도원결의의 삼형제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조운, 마초, 황충, 방통, 위연 등 28개 소상이 촉한의 영웅들을 기린다.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 입구 유비전의 계단을 내려가자 무후사가 나온다. 유비는 높고 제갈량은 낮은, 어쩔 수 없는 위계(位階)가 느껴진다.
▲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 입구 유비전의 계단을 내려가자 무후사가 나온다. 유비는 높고 제갈량은 낮은, 어쩔 수 없는 위계(位階)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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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을 모신 공명전 향로, 제갈량 소상, '명수우주' 현판, 지붕 위의 미륵불을 볼 수 있다.
▲ 제갈량을 모신 공명전 향로, 제갈량 소상, "명수우주" 현판, 지붕 위의 미륵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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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전의 계단을 내려가자 무후사가 나온다. 유비는 높고 제갈량은 낮은, 어쩔 수 없는 위계(位階)가 느껴지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무후사가 아닌가. 무후는 바로 제갈량의 시호다. 정원당(靜遠堂), 공명전(孔明殿)으로도 불리는 무후사는 서진(西晉) 말기인 4세기 초에 세워졌다가 명나라 때 유비의 한소열묘와 병합되었고, 강희 11년 증수되었다. 무후사는 두보의 시 <촉상(蜀相)>에도 "승상의 사당을 어디서 찾을까, 금관성 밖 편백나무 무성한 곳이라네(丞相祠堂何處尋, 錦官城外栢森森)" 하고 등장한다.

제갈량 소상 위의 편액도 두보의 시에 나오는, 그 이름 온 천하에 영원히 남으리라는 뜻의 '명수우주(名垂宇宙)'다. 강희제의 열일곱 번째 아들인 과친왕이 쓴 글씨로 여기서 우주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천체의 공간이 아니라 우(宇)는 사방의 모든 공간의 총체를, 주(宙)는 고금을 아우르는 시간의 총체를 이른다.

이밖에도 제갈량의 업적이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과 연나라의 명장 악의를 능가한다는 '훈고관악(勳高管樂)', 제갈량의 경세제민이 주공과 같다는 '이주경제(伊周經濟)' 등의 편액이 걸려 있다. 학우선을 든 제갈량 좌우로 아들 제갈첨(諸葛瞻)과 손자 제갈상(諸葛尙)상이 자리했다.
 
학우선을 든 제갈량의 모습 제갈량은 중국인들에게 총명함의 대명사이자 마음속 스승이다.
▲ 학우선을 든 제갈량의 모습 제갈량은 중국인들에게 총명함의 대명사이자 마음속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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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은 중국인들에게 총명함의 대명사이자 마음 속 스승이다. 공명전 앞에는 발톱이 넷인 용이 떠받드는 향로에 두 동자승이 시중을 들고, 지붕에는 미래의 부처 미륵불이 앉아 제갈량을 호위한다. 제갈량의 후손들은 미륵불처럼 제갈량이 우주의 시공간을 떠돌다 어느 순간 자신들의 미래를 구원해줄 거라 믿는 듯하다.

무후사 뒤쪽으로 종각과 고루가 서 있고 연못과 정원이 펼쳐진다. 왼쪽으로 대나무가 우거진 붉은 회랑이 운치 있게 이어지는데 바로 유비의 묘 혜릉(惠陵)으로 통한다.
 
붉은 회랑 대나무가 우거진 붉은 회랑이 운치 있게 이어지는데 바로 유비의 묘 혜릉(惠陵)으로 통한다.
▲ 붉은 회랑 대나무가 우거진 붉은 회랑이 운치 있게 이어지는데 바로 유비의 묘 혜릉(惠陵)으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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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의 무덤 혜릉 높이 12미터, 둘레 180미터의 혜릉에는 유비뿐 아니라 감부인과 오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 유비의 무덤 혜릉 높이 12미터, 둘레 180미터의 혜릉에는 유비뿐 아니라 감부인과 오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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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년 유비가 백제성에서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한다는 탁고(託孤)를 남기고 죽자 이곳에 한소열황제지릉, 혜릉이 조성되었다. 높이 12미터, 둘레 180미터의 혜릉에는 유비뿐 아니라 감부인과 오부인이 합장되어 있다. 혜릉을 한 바퀴 돌며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얻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如魚得水) 기뻐하고 적벽대전에서 승리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이뤄냈던 유현덕이 정말 이곳에 묻혀 있단 말인가 생각해본다.

<삼국지> 마니아는 아니지만 고1 때 시험을 망쳐가며 열독했던 독자로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삼국지> 유적을 둘러보았다는 뿌듯함과 함께 여유를 갖고 차분히 둘러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혜릉에서 나와 <삼국지> 관련 자료전시관을 둘러보고 무후사를 빠져나오니 청두 도심은 여기저기 조명을 밝히고 있다.

이제 쓰촨의 훠궈를 맛보고 변검(變臉) 공연을 관람하면 쓰촨과도 작별이다. 짧은 일정에 미처 보지 못한 두보초당, 팬더서식지, 삼성퇴박물관, 검문촉도가 눈에 밟힌다. 미래는 오래 지속되니 후회유기(後會有期), 언젠가 재회할 날 있으리라. 약간의 여지를 남김으로 다시 찾을 날을 기약한다. 바이러스가 언제까지 하늘길을 막지 못할지니.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2020년 1월 5일~10일(5박 6일) 중국 쓰촨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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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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