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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 홍합을 일컫는 바닷가 말 '섭'

강원도 바닷가 사람들이 '섭'이라고 하는 조개가 있다. 까만 조가비에 수염 같은 끈으로 갯바위에 단단히 붙어 자라는 조개다. 바닷가 사는 사람한테는 섭이 입에 익은 말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그게 무슨 조갠가 하고 고개 갸우뚱거릴 말이다.
'섭'이라고 하면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니까 '섭조개'라고도 한다. 표준어로는 '홍합'이다. 하지만 홍합이라고 하면 이 종류 조개를 뭉뚱그려 일컫는 말이 되는 까닭에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섭'이란 이름이 어떻게 붙었는지 말밑은 또렷하지 않다. 몇 가지 의견이 있는데 우선 '섭새김'에서 왔다는 의견이 있다. 섭새김은 '섭+새김' 꼴이다. 섭새김은 조각할 때, 글자나 그림이 도드라져 보이게 둘레를 파내거나 아예 뚫어버리는 기법을 말한다. '새김'은 파내거나 뚫는 일을 말하니까 '도도록한 모양'을 섭이라고 할 것도 같다. 조개들을 열어 보면 대개 조갯살이 납작하지만 섭은 다르다. 조갯살이 유달리 통통해서 도드라져 보이지 않나. 다른 의견은 섭의 생김새가 여성 성기를 닮은 까닭에 '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는데, 이도 분명하지 않다. 또 눈섭(눈썹의 옛말)에 온 말로 짐작하기도 한다.
 
'홍합'이다가 '담치'이다가

'섭'의 한자 이름인 홍합은 조갯살이 '붉은'(紅) '조개'(蛤)라는 뜻이다.달리 '담치'라고도 한다. 담치라는 말은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서 유래한 말로 본다. 정약전은 섭을 크게 담채(淡菜), 소담채(小淡菜), 적담채(赤淡菜), 기합(箕蛤)으로 나눴다.(여기서 '기합'은 키조개이니 섭이 아니다.) 담채를 풀이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앞은 둥글고 뒤는 날카로우며 큰놈은 한 자나 되고 폭은 그 반쯤 된다. 뾰족한 끝(銳峯)에 털이 나 수백 마리가 무리지어 암초에 달라붙어 있다가 파도가 밀려오면 입을 열고 밀려가면 입을 다문다. 조가비가 검고 안쪽은 검보랏빛이 나며 살은 붉은 것과 흰 것이 있다. 맛이 감미로워 국에도 좋고 젓을 담가도 좋으나 말린 것이 사람에게 가장 좋다.
정약전이 쓰지 않았지만 섭은 조갯살 빛깔로 암수를 알 수 있다. 붉은빛을 띠는 건 암컷이고 우윳빛이 나는 건 수컷이다.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에는 "홍합은 동해에서 난다. 해조류가 자라는 위쪽에 분포하며 맛이 채소처럼 달고 담박하므로 조개류이면서도 채소와 같은 채(菜)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어릴 적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하고 바닷가에 가서 담방구질을 하면서 놀았다. 담방구질은 물낯 아래위로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모양을 가리키는 지역말이다. 우리 동네 아이들은 주로 동해 하평(해평) 바닷가에서 놀았다. 놀래미가 잘 잡히던 갯바위(해다리바위)에서 30~40미터쯤 떨어진 곳에 보였다 말았다 하는 큰바위가 하나 있는데, 제법 머리가 굵은 아이들은 거기까지 헤엄쳐 갔다 왔다 했다. 또래에서는 그쯤은 튜브 없이 혼자 헤엄쳐 갔다 와야 바닷가 아이로 인정했다. 갔다가 올 때 힘이 들면 개헤엄도 치다가 송장헤엄도 치고 그랬다. 그 바위 아래로 제법 굵은 섭이 있어서 그걸 캐다가 아이들끼리 삶아 먹곤 했다. 섭끼리 서로 비비거나 갯바위 편평한 데다 문질러 덕지덕지 붙은 것을 떼내고 설렁설렁 바닷물에 헹군 뒤 삶기만 해도 짜지 않고 맛이 좋았다.
 
엉터리 돌림 풀이만 일삼는 표준국어대사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섭'을 찾으면 다음과 같이 풀어놨다.
『동물』홍합과의 조개. 껍데기의 길이는 10cm 정도이고 얇으며, 실 모양의 분비물로 다른 물체에 붙는다. 식용하고 열대 이외의 전 세계에 분포한다. = 털격판담치.
다른 이름으로 '털격판담치'라고 한다는데 이런 말을 사전을 펼쳐보고 처음 본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담치'를 찾으면 '진주담치, 털격판담치, 참담치' 이렇게 세 가지가 나온다. 밑금 그은 데를 눈여겨 보시라.
진주담치 『동물』 홍합과의 조개. 껍데기의 길이는 10cm 정도이고 얇으며, 실 모양의 분비물로 다른 물체에 붙는다. 식용하고 열대 이외의 전 세계에 분포한다. = 털격판담치.
털격판담치 『동물』 홍합과의 조개. 껍데기의 길이는 10cm 정도이고 얇으며, 실 모양의 분비물로 다른 물체에 붙는다. 식용하고 열대 이외의 전 세계에 분포한다. (Mytilus edulis) ≒ 담채, 담치, 섭, 섭조개, 진주담치
'섭'도 '진주담치'도 '털격판담치'라 해놓고는 정작 '털격판담치'를 찾으면 "≒ 담채, 담치, 섭, 섭조개, 진주담치"라고 해서 싸잡는 말로 풀어놨다. '담채, 담치, 섭, 섭조개, 진주담치' 모두를 털격판담치라고 해도 된다는 풀이가 되고 만다. 그러면 '섭'과 '담치'는 홍합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홍합동물』홍합과의 조개. 껍데기의 길이는 13cm, 높이는 6cm 정도이고 쐐기 모양이며, 겉은 검은 갈색, 안쪽은 진주색이고 살은 붉은빛을 띤다. 암초에 족사로 붙어 사는데 한국, 일본, 중국 북부 등지에 분포한다. ≒ 담채, 담치, 이패, 참담치, 해폐.(Mytilus coruscus)
참담치동물』홍합과의 조개. 껍데기의 길이는 13cm, 높이는 6cm 정도이고 쐐기 모양이며, 겉은 검은 갈색, 안쪽은 진주색이고 살은 붉은빛을 띤다. 암초에 족사로 붙어 사는데 한국, 일본, 중국 북부 등지에 분포한다. = 홍합.
의미 관계로 보면, 홍합은 "담채, 담치, 이패, 참담치, 해폐"를 아우르는 올림말이다. 그런데 앞서 털격판담치를 "담채, 담치, 섭, 섭조개, 진주담치"라고 했으니 결국 담채, 담치, 이패, 참담치, 해폐, 섭, 섭조개, 진주담치, 털격판담치, 홍합, 이 모두가 한 가지 조개라는 소리다.

그렇지만 풀이를 보면 다르지 않나. 껍데기가 '10센티미터'이고 두께가 얇다는 점으로만 보면 '섭'과 '진주담치'와 '털격판담치'가 한 가지 조개고, '홍합'과 '참담치'(13센티미터)는 아주 다른 조개처럼 읽힌다. 정말 그런가.  
 섭(홍합, 참담치)와 지중해담치, 뉴질랜드초록담치 비교(크기도 크기지만 섭은 각정 부위가 살짝 휘었다.)
 섭(홍합, 참담치)와 지중해담치, 뉴질랜드초록담치 비교(크기도 크기지만 섭은 각정 부위가 살짝 휘었다.)
ⓒ 이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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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담치'와 '섭'과 '뉴질랜드초록담치'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담치는 격판담치, 비단담치, 지중해담치, 진주담치, 동해담치, 털담치 뿐만 아니라 민물담치까지 다 헤아리면 스무 종이 훌쩍 넘는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중해담치와 진주담치는 학자들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비슷하다. 우리 밥상에 자주 오르는 종은 '지중해담치'와 '섭', '초록입홍합' 이렇게 세 가지다.
'지중해담치'부터 보면, 우리 나라 바닷가 갯바위에 다닥다닥 붙은 까만 조개는 거의 지중해담치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지중해담치는 이름에서 보듯 본디 지중해와 서대서양 쪽에 살던 놈들이다. 화물을 실어나르던 배나 평형수에 지중해담치 유생이 섞여 우리 바다에 들어온 것으로 짐작한다. 일본에서는 1935년에 처음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우리 바다에도 그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것으로 본다. 아무 데서나 잘 붙어 자라는 까닭에 지금은 우리 나라 앞바다 갯바위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남해 마산만과 가막만에서 양식으로 키우기도 한다. 우리가 홍합으로 알고 먹는 조개 대부분이 바로 '지중해담치'다. 양식 하는 까닭에 '섭'에 대면 껍데기가 매끄러우면서 얇아서 조금만 힘줘도 부서진다. 또, 섭은 껍데기 끝이 살짝 휘었지만 지중해담치는 곧은 편이다. (위 사진 참고) 지중해담치를 진주담치라고도 하는데 이는 종 분류를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진주담치가 아니라고 해도 너나없이 한번 입에 굳어진 말을 바로잡긴 어렵다. 심지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조차도 '진주담치'만 표제어로 올려놓고 '지중해담치'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음은 '섭'이다. 흔히 '홍합'(섭)이라 하면 자연산이면서 어른 손바닥만한 놈으로 알고 담치는 자잘한 양식 무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섭은 껍데기에서 보랏빛이 감도는 검은 빛이 난다. 조가비가 두껍고 단단해서 어른이 밟아도 깨지지 않을 정도다. 지중해담치한테 밀려 앞바다 갯바위를 버리고 수심 깊은 곳에서 자라는 까닭에 따개비나 바닷풀 같은 게 조가비에 덕지덕지 붙어서 껍데기가 우툴두툴하다. 거의 어른 손바닥만하게 자라기 때문에 지중해담치에 대면 서너 배는 크다. 양식이 안 되기 때문에 해녀나 머구리들이 바다 밑에 들어가 캔다. 자연산 홍합인 '섭'을 달리 '참담치'라고도 한다. 지중해담치와 구별할 요량으로 생겨난 말이다. 이때 앞가지로 붙은 '참'은 '진짜, 토종'이라는 뜻이다. 바닷가 사람들은 섭으로 국을 끓인다. 섭국을 맑고 칼칼하게 끓이기도 하고 고추장과 된장을 섞은 국물에 섭, 부추, 양파 따위를 넣어 얼근하게 끓이기도 한다. 미역국을 끓이기도 하는데 섭을 쫑쫑 다져서 참기름을 두르고 덖다가 거기에 미역을 넣어 조금 더 덖은 뒤 물을 부으면 보얗게 국물이 우러난다.

우리 말 사전에는 없지만, 뷔페 같은 데서 삶아서 내놓은 홍합이 있다. 조가비가 푸른 빛을 띤다. 이 홍합은 뉴질랜드에서 양식으로 키운 조개다. 영문으로는 'Green Lipped Mussel'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그대로 뒤쳐 '초록입(술)홍합', '그린홍합', '초록홍합' 따위로 일컫는다. '머슬'(mussel) 말밑을 캐보면 그리스말 '쥐'에서 왔다고 한다. 조가비가 마치 웅크린 쥐와 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겠다. 이 조개 이름은 아직 정해진 게 없어서 사람마다 달리 쓴다. 내 생각이지만 '뉴질랜드홍합'이나 '뉴질랜드초록홍합'이라고 쓰는 게 어떨까 싶다.

곁가지 같은 말이지만, '섭'을 보면 수염 같은 실이 붙어 있는데 이를 '족사'(足絲)라고 한다. 이것으로 갯바위뿐만 아니라 엉덩이 들이밀 자리만 있으면 배 밑바닥이고 나무고 가리지 않고 딱 달라붙는다. 한때 폐타이어에 붙여 지중해담치를 양식한다고 해서 들끓었던 적이 있다. 족사는 억세고 질겨서 도구를 쓰지 않고는 뜯어내기 어렵다. 재미난 것은 한번 붙은 곳에 평생을 살 것 같지만 살 만한 곳이 아니다 싶으면 족사를 녹여 훌훌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고. 천하무적 같은 욘석들한테도 천적은 있는데 바로 불가사리다. 불가사리가 팔로 이리저리 섭을 힘을 주어 뒤적이면 조가비 사이 틈이 생기는데 이 틈으로 넣어 조갯살을 먹어치운다. 껍데기가 벌어진 채로 널부러진 담치들은 불가사리가 먹어치운 것이다. 
 
우리 말 사전의 주권을 물어야할 때다

처음 생각으로 돌아가 묻고 싶다. '털격판담치'는 과연 누구의 말인가. 곧잘 소비자 주권을 말한다. 말도 마찬가지 아닐까. 말을 만들고 그 말을 오래도록 써온 사람은 '섭'이라고 하는데 생뚱맞게 '털격판담치'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말인지 궁금하다. 말에도 맛이 담기고 냄새가 배이고 풍경이 스며 있다. 삶이 있다. 그런데 그 삶을 깡그리 지운 말만 알뜰히 모은 사전이라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물어야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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