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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롄커의 글은 중국음식처럼 진하고 무겁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일본 스시처럼 가볍고 상큼하다.
 옌롄커의 글은 중국음식처럼 진하고 무겁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일본 스시처럼 가볍고 상큼하다.
ⓒ 자음과모음,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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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아시아 작가 중에 중국의 옌롄커(閻連科, 1958~ )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1949~ )가 있다. 두 작가는 모두 언젠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가족에 대한 글쓰기 부담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힘겹게 책을 내놓았노라고 공통된 소회를 밝힌다. 바로 2011년 출간된 옌롄커의 <나와 아버지(我與父輩)>, 2020년 출판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서다.

지난 2월 15일 영면한 우리시대의 큰 아버지였던 백기완을 통해 굵직한 현대사와 한국사회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듯이, 한 인간을 깊게 이해하는 것은 그 사회 전반을 통찰하는 통로다. 중국과 일본사회의 면모가 두 작가와 두 아버지의 사적 경험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버지를 떠난 죄책감과 그 속죄로서의 글쓰기
 
"효라는 것이 오늘날 사회에서는 너무나 진부하고 미미한 가치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생명에 대한 최대의 위안이자 존중으로 작용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 321쪽
 
중국 허난(河南)성 편벽한 시골에서 태어난 옌롄커의 어릴 적 꿈은 어떻게든 빈곤과 고난의 굴레인 농촌을 떠나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학업의 길이 막히자 옌롄커는 군인이 되는 방식으로 그 꿈을 이뤄낸다.

그렇게 병든 큰누나와 늙어가는 부모를 두고 홀로 고향을 떠난 죄책감과 부채의식은 평생 옌롄커를 따라다닌다. 그가 중국에서도 이미 공감하는 사람이 없는 철 지난 시절의 농촌과 농민들의 삶에 대한 작품을 끊임없이 쓰는 것은 어쩌면 이런 부채의식과 죄책감을 씻기 위한 속죄와 참회의 과정이 아닐까.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되는 중국에서 여전히 빈곤 속에 살아가는 7억 농민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자신이 아니면 누가 쓰겠냐는 듯이 옌롄커는 극도의 기아와 빈곤을 헤치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농민들의 치열한 삶과 존엄을 끊임없이 파헤친다.

또한 28년 동안 몸담은 군인으로서 체험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하며 중국정부와 불화를 겪는다. <여름 해가 지다(夏日落)>를 시작으로 <인민을 위해 복무하다(爲人民服務)>, <사서(四書)> 등 그의 작품은 줄줄이 중국에서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진다.

옌롄커는 아버지와 큰아버지, 넷째삼촌의 삶을 통해 농민과 농민공의 삶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효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의 가족공동체 문화를 잘 반영하며 힘겨운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경의를 표한다. 과감하게 현실을 마주하여 모든 사회적, 정치적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현실을 죽도록 슬프고 아름답게 그려낸다.

아버지의 트라우마에 대한 작고 가느다란 계승
 
"나와 아버지는 성장한 시대도 환경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세계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중략) 복잡하고 거추장스러운 혈연의 굴레보다는 그쪽이 내게는 한층 중요한 사항이었다. <고양이를 버리다> 85쪽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은 없다. "사람은 각자 개성이 있으니까 뭐"하고 아버지와 다른 삶을 당당히 살아간다. 대단히 서구화된 가치관이다. <고양이를 버리다>는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바닷가에 버렸던 고양이가 어느새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다는 에피소드로 시작된다. 하루키에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버리려했지만 어느새 집에 돌아온 고양이 같은 것이다.

중일전쟁에 참전해 칼로 포로를 내리쳤던 아버지의 경험이 의사 체험으로 하루키에게 희미하게 전해질 뿐이다. 아버지의 트라우마가 아들인 하루키에게 부분적으로 계승된다. 그것으로 아버지와 자신에게 옮겨오는 역사를 가느다랗게 느낄 뿐이다. 그리고 높은 나무에 올라간 고양이가 내려오지 못해 우는 모습으로 자신을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옌롄커의 글은 중국음식처럼 진하고 무겁다. 읽으면 마음이 힘들 정도다. 늘 극한의 상황까지 내몰린 인간이 결국 자신의 생존과 존엄을 지키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은 일본 스시처럼 가볍고 상큼한다. 상징적으로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며, 자칫 지나치기 쉬운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두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무겁기도 하고 가볍기도 하지만, 결국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하지만 백기완 선생의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기도 하지만 뜻과 뜻은 갈라지는 게 아니요, 역사와 함께 나아가리니" 말처럼 아버지의 뜻은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들의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핏속에 계승된다.

문학적 성취와 상관없이 두 작가가 보여주는 중일 양국의 역사와 문화, 가족공동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같은 동아시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극명하게 결을 달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가장 낮은 곳의 중국을 철저히 사실적으로 그리는 작가와 서구화된 초현실적인 감각으로 대중과 호흡하는 작가, 노벨문학상은 누구의 손을 먼저 들어줄까.

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은이),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긴이), 비채(2020)


나와 아버지

옌롄커 (지은이), 김태성 (옮긴이), 자음과모음(이룸)(2011)


태그:#나와 아버지, #옌롄커,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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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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