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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는보리>의 한 장면.
 영화 <나는보리>의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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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영화와 듣는 영화

#1. 지난해 개봉한 김진유 감독의 <나는보리>.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가 있는 가족과 함께 사는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 소녀 '보리'는 가족 중 유일하게 듣고 말 할 수 있다. 보리의 소원은 하나, 소리 잃고 싶다는 거다. 그게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서다. 자신만 그런 게 오히려 이상하고, 소외감마저 든다.

그래서 보리는 일부러 물에 빠지고 안 들리는 척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되새긴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따뜻한 시선으로 녹여내는 감동적인 수작이었다. 영화 속의 수어는 물론 비장애인들의 대사도 모두 자막으로 처리했다. 영화를 볼 농인들을 위한 배려였지만 그 덕에 이해력 딸리는 나도 참 편하게 잘 봤다.

#2. <싱어게인>(JTBC) 몰아보기. 1월 4일 방송됐던 "라이벌 전"이 한창이다. 당시 화제를 모으던 10호와 29호가 맞붙었다. '정통 메탈가수' 29호는 들국화의 <제발>을 골랐다. 노래를 듣다 화들짝 놀랐다. 수 없이 들었던 노래였는데 가사가 그런지는 처음 알아서였다.

생각 없이 들었을 땐 한 여인에게 '제발' 사랑을 갈구하는 노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랑'을 빙자해 '인형'이 되길 바라는 그녀를 향한 애절한 '하소연'이자 절절한 '당부'였다. '제발 숨 막혀 인형이 되긴/제발 목말라/마음 열어 사랑을 해봐'. 뒤늦게나마 그 진실을 알게 된 건 자막 덕분이었다. 그 비슷한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옛사랑이 떠올라 잠시 울컥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노래를 듣는 것도 사람과 사람 간 소통의 행위다. 보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보다 명확해야 한다. 서로 간의 오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특히 영화의 대사는 중요하다. 그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영화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관객과 영화는 따로 놀기 마련이다.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는 의도했던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아 답답하고 보는 관객들은 저게 뭔 영환가 싶어 짜증 난다. 흥행이 될 리 없다.

전문가가 아니라 감히 이야기하기 두렵지만 원인은 크게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다. 첫 번째는 기술상의 문제다. 사람의 말소리보다 주위의 효과음이 너무 크게 녹음돼 대사가 묻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동차 많은 대로변 장면이나 전투 장면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배우들의 문제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안으로 말리는 소리를 내는 배우들의 대사는 알아듣기 어렵다. 천성적으로 목소리가 작아도, 혀가 너무 길거나 짧아도 그렇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외화 보는 게 더 편하다. 자막이 있어서다. 외국어 대사를 친절하게 우리말로 번역해 자막으로 띄워 주면 관객들은 자연스레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시력이나 독해력에 따라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체적으로 대사를 읽으면 더 정확하게 영화를 이해하게 된다. 최근 자막 서비스의 질도 크게 좋아졌다. 우리의 정서에 맞는 단어나 유머 코드를 사용하는 식의 보다 유연한 번역은 관객을 즐겁게 해 주는 숨은 공신이 되고 있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멜로디도 중요하지만 가사도 그에 못지않다. 정확한 가사 전달은 감동을 배가시킨다. 외국 노래의 가사를 미리 알고 들으면 그렇다는 것을 확연히 느낀다. 옛날 가수들 중엔 우리말을 일부러 외국어처럼 꼬거나 말아서 발음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런 분들의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요즘은 가사 전달력도 가수들의 능력 중 하나로 꼽히는지라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가사가 한결 정확하게 잘 들린다. 그래도 모든 가사를 한 자 한 자 새겨듣긴 어렵다.

빠른 박자의 랩이나 댄스음악이 특히 그렇다. 몇 글자가 한음에 뭉개져 발음될 때도 많다 보니 그냥 휙 넘어갈 때가 많다. 그런 구멍이 생기면 전체적으로 가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우리 가요의 가사 알아맞히는 방송 프로그램까지 있을까. 언제부턴가 대중가요 프로그램에서 자막을 올려줘 예전엔 미처 몰랐던 가사의 진면목을 깨닫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들국화의 <제발>처럼 말이다.

팔순 노모의 꿀잠을 위하여

노모는 거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8~9시면 안방으로 '퇴근'하신다.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다. 그제야 나는 TV를 볼 수 있다. 길어야 한두 시간이지만 그나마 소리는 0에 맞추고 화면만 본다. 행여 어머니 잠에 방해될까 봐서다.

자연히 외화나 예능프로그램을 주로 보게 된다. 자막이 있어서다. 케이블 방송사에서 제공하는 자막 서비스가 있긴 하지만 가시성이 떨어지고 오탈자도 많아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 그나마 모든 프로그램에 적용되지도 않는다.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좋은 한국영화를 보지 못하는 건 아쉬운 노릇이다. 지난해 최대의 화제작 <기생충>이 이미 케이블 상영을 시작했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소리를 '볼' 수 없어서다.

TV말고도 여러 방법이 있지만 대게가 유료고 꼭 그렇게 하면서까지 봐야 할 만큼 간절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보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볼륨을 꺼놓고도 그냥 보면 됐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모든 감동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자막의 힘이었다.

<나는보리>를 보고난 후 문득 국내영화나 드라마도 제작단계부터 자막을 넣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애가 있는 분들은 물론 나처럼 저간의 사정으로 볼륨을 높이고 TV를 볼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서비스가 될 것 같았다.

음향기술의 한계나 배우들의 부정확한 발음에 상관없이 영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나는보리>를 유심히 다시 보면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찾아보니 그 비슷한 노력은 꽤 있었다. 자막이나 수어통역을 의무화하는 법이 몇 차례 추진됐었는데, 지난 2019년 4월 정의당의 추혜선 전 의원이 대표발의 한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과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의 개정안이 가장 최근의 시도였다. 허나 아직 국회를 통과하진 못한 모양이다. 의안검색 시스템에서도 어디쯤 와 있는지 찾기도 힘들다. 지금으로선 영화법 제38조 '전용상영관' 의무 상영조항이 전부다.

하지만 이런 것에 법까지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이 정도쯤은 당연히 갖췄어야 하는 기본적인 배려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이유로 듣는 영화에 익숙하지 못한 분들까지 영화관으로 오게 하면 흥행에도 도움이 될 터다.

그 덕에 감독이나 제작사는 좋은 평판까지도 덤으로 얻게 될지도 모른다. 순전히 자발적인 '한국영화 자막 달기' 캠페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두 어우러져 사는 선한 사회를 위해, 우리 어머니의 꿀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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