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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누리집에서 '첨성대'나 '미륵사지', '석굴암' 등과 같은 오래된 유물·유적 이름이나, '반가사유상'이나 '삼층석탑'처럼 여러 유물을 아우르는 용어를 넣고 검색하면 흥미로운 흑백 사진들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우리의 문화재들을 조사해 사진으로 기록했다는 유리건판(유리판에 액체 상태의 사진 유제를 펴 바른 후 건조한 것) 사진들이다. 사진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십여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 궁궐 사진전(관련 기사: bit.ly/9QKfMZ)을 관람한 적 있다. 3만8천여 점의 건판 사진 중 일부만을 공개한 전시회였다. 사진 존재부터 흥미로웠다. 더욱 많은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다행히 2019년 12월부터 이처럼 공개되고 있어 틈틈이 들여다보곤 한다.
 
 2021년 2월 현재 '석굴암' 검색 결과 일부. 유리건판사진이다. 사진 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사용 목적을 밝힌 후 다운로드 사용할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 무릎에 올라서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책 145쪽에 실려 있다.
 2021년 2월 현재 "석굴암" 검색 결과 일부. 유리건판사진이다. 사진 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사용 목적을 밝힌 후 다운로드 사용할 수 있다. "석굴암 본존불 무릎에 올라서 기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책 145쪽에 실려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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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건판 사진은 우리의 유물 약탈과 문화 식민지화를 목적으로 조사 기록한 결과물로 알고 있다. 좋지 않은 의도로 만들어진 자료라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사진들을 볼 때면 한국전쟁을 무사히 넘기고 만날 수 있음이 천만다행이다. 고맙다와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유물을 정리하느라 김재원 국립박물관장과 최순우, 진홍섭 등 대부분의 박물관 직원이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 서울 중앙청에 인공기가 내걸렸고 박물관도 인민군에 접수됐다. 간송 전형필이 세운 보화각(현 간송미술관)에도 공산당이 들이닥쳤다. 보화각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신윤복 풍속도 화첩 등 국보가 즐비했다. 북한은 월북 화가 이석호를 앞세워 보화각 소장품을 훔쳐 가려고 했다. 박물관 직원 최순우와 서예가 손재형을 차출해 소장품 분류와 포장일을 시켰는데 둘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끌었다.

북한은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유물도 가져가기 위해 포장했지만, 낙동강 전선에서 밀리고 전황이 불리해 지면서 유물 수송을 위한 차량을 조달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연합군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로 들어오자 박물관과 보화각의 공산당들도 다급하게 도주했으며 국보도 무사할 수 있었다. - 148쪽

희망은 잠시,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압록강까지 갔던 국군과 미군이 후퇴한다. 서울이 다시 북한군에 점령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김재원 박물관장은 백낙준 문교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 유물들을 피난시키기 시작한다. 앞서,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한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진열장의 모든 유물을 포장해 유물창고에 보관하라고 지시했고, 그로 유물들을 미리 정리해뒀었다고 한다.

김재원 관장과 박물관 직원들은 중요한 순서대로 8300점의 유물들을 190개 상자에 포장해 서울역으로 옮긴다. 당시 덕수궁미술관 창고의 주요 유물 8800점이 담긴 155개의 상자까지 서울역으로 함께 옮기느라 꼬박 3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런 후 미군에게 할당받은 1량의 열차에 중요한 순서대로 83개만 우선 싣고 나머지는 다음 열차로 출발하는 등의 방법으로 부산으로 피난시키게 된다. 4일이 걸렸다고 한다.

상상해본다. 전쟁이라는 누구의 안전도 보장되지 못한 위급한 상황에 자신이나 가족을 먼저 생각했다면 유물들을 언제든 옮길 수 있는 상태로 미리 정리해 두는 것이 가능했을까.

북한군이 서울 점령에 이어 박물관을 접수한 것은 유물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총부리를 겨누며 포장을 재촉했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가정해 본다. 그와 같은 상황에 몇 시간만이라도 끌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부가 북으로 실려 갔거나, 혹은 도중에 파손되거나, 영영 사라지는 운명까지 겪지 않았을까.

오늘 우리가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여러 박물관에서 국보 혹은 여러 유물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전쟁이라는 위험한 상황에 자신보다 유물의 안위를 우선한 사람들의 사명감과 희생과 헌신을 기본으로 한 합심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1963년 5월 1일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와 준학예관 정양모에게 문교부 직원의 수출품 감정의뢰가 들어왔다. 국내 공예품 회사가 미국의 연구소에 보내는 수출품이라는데 156점의 구입가가 2000달러나 된다는 점을 수상히 여긴 것이다. 인천세관에 도착한 최순우와 정양모는 나무상자를 열어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상자엔 국보급 조선백자가 빽빽이 담겨 있었다. 최순우는 세관원에게 "세계 어디에도 자기 민족의 문화재를 수출하는 나라는 없다"며 반출을 불허했다. 최순우와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에게 문교부, 상공부의 연락이 빗발쳤다. "달러를 버는 일을 방해하면 예산을 깎아 버리겠다"고 했다. 결국 16점을 제외한 나머지 140점의 수출을 허가한다는 서류에 도장이 찍히고 말았다. 믿을 곳은 언론밖에 없었고 11일자 신문에 '달러에 팔려가는 문화재 140점'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여론이 들끓었다.

최순우는 15일 지프에 실려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취조관은 "북한에서 남조선이 국보를 팔아먹는다고 떠들고 있다. 당신이 한 짓은 이적행위"라고 했다. 다행히 겁만 주고 풀려났다. 사건은 백자 수출 허가를 취소한다는 문교부 장관의 특별담화가 발표되면서 마무리됐다. 앙심을 품은 문교부 장관은 최순우를 인사 조처하려고 했지만, 김재원 관장이 끝까지 막아냈다. - 81~82쪽

우리 문화재 수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의 만행과 연결 짓는 경우가 많다. 어느 정도의 유물이 일본에 있는지 파악조차 못 할 정도로 많은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었으며,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유물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울러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스스로 지키지 못하거나 팔아넘긴 것들도 많다는 것이다.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책표지.
 <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책표지.
ⓒ 매일경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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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매일경제신문사 펴냄)의 배한철 저자는 오랫동안, 그리고 끊임없이 박물관과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며 얻은 것들을 바탕으로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는 문화재 전문기자다.

▲도굴범 쫓다 발견한 세계 최고의 인쇄물 ▲석굴암 본존불은 왜 일본을 바라볼까? ▲도쿄 요리점에 팔려간 다보탑 수호신(돌사자상) ▲첨성대 위에 진짜 정자가 있었을까? ▲서역풍 불상의 얼굴은 한국인?▲실록은 승자의 기록일까 ▲경주 김씨는 흉노왕의 후손일까 ▲선화공주는 허구의 인물이었나 ▲2000년 전 한반도로 집단이주한 중국인의 자취 ▲선덕여왕이 황제의 절을 지은 이유 ▲저잣거리 전전했던 조선 최고의 풍속화가 등과 같은 제목으로 발굴에 얽힌 사연, 국보 제작 비하인드, 희비애환 인간사가 깃든 국보, 수수께끼 같은 사연을 품고 있는 국보, 이국적인 국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문화재 47점에 얽혀있는 극적인 사연들을 들려준다.

8장으로 묶었다. 각 장마다 '국보 토막상식'이란 별도 페이지를 배치, 숭례문은 왜 국보 1호인가를 시작으로 국보 신고와 보상금, 국보의 가격, 국보 지정의 문제점 등,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궁금해했을 국보 관련 상식을 풍성하게 들려준다.

'두고두고 펼쳐볼 만한 그런 가치가 읽는 내내 느껴지던 책'이라고 표현하면 이 책에 대한 가치가 어느 정도라도 전달될까?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의 유물·유적 모습, 생활상 등을 짐작할 수 있는 수십 장의 유리건판 사진들과 귀한 유물 사진들을 접할 수 있어 더욱 흥미롭게 와 닿은 책이다.
 
 무악재로 추측되는 고갯길. 1906년 무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이 길을 따라 피란을 갔다. 선조 일행이 무악재에 올랐을 때 이미 경복궁은 불길에 휩싸였다. 이틀 뒤인 5월 2일에야 왜군이 도성에 들어왔으니,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책 125쪽 수록 사진과 설명.
 무악재로 추측되는 고갯길. 1906년 무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이 길을 따라 피란을 갔다. 선조 일행이 무악재에 올랐을 때 이미 경복궁은 불길에 휩싸였다. 이틀 뒤인 5월 2일에야 왜군이 도성에 들어왔으니, 경복궁을 불태운 것은 적이 아니라 우리 백성들이었던 것이다. 책 125쪽 수록 사진과 설명.
ⓒ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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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1906년 무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책 128쪽에서/ 경복궁 향원정의 열상진원 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을 찍은 흑백 원판 필름. 1906~7년 한국 등을 방문한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1868~1945)가 일본인 사진작가 나가노를 고용하여 촬영한 필름 자료임(국립민속박물관 해당 사진 설명)
 경복궁 향원정 연못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들. 1906년 무렵.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책 128쪽에서/ 경복궁 향원정의 열상진원 샘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의 모습을 찍은 흑백 원판 필름. 1906~7년 한국 등을 방문한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1868~1945)가 일본인 사진작가 나가노를 고용하여 촬영한 필름 자료임(국립민속박물관 해당 사진 설명)
ⓒ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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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역사의 명장면을 담다

배한철 (지은이), 매일경제신문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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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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