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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는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에 살았으면 좋겠다.

유안진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너무 좋아하는 에세이이다. 학창 시절에 유행이었고 암송도 했었다. '저녁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나는 이 대목을 제일 좋아한다. 옆 동에 사는 엄마한테 가서 저녁 얻어먹고 왔다는 친구가 제일로 부러운 이유이다. 나는 부모님이 멀리에 사시기 때문이다.
 
벌써 대략 20년 전의 유명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는 가까이 지내면서 여차하면 뭉쳐 위로와 축하와 응원을 해주는 잘나가는 뉴욕의 네 여자 친구들의 이야기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친구관계의 한 모습이라 굉장히 재밌게 보았었다. 국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멜로가 체질>, <디어 마이 프렌즈> 역시 가족보다 더 끈끈한 우정의 이야기를 다룬 나의 인생 드라마들이다.
 
나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다. 대략 16개월 전이다. 두세 달을 누워만 지냈다. 누워만 있는 상태로 지내는 일상은 만족도가 높지 않았다. 삶의 질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다. 누워서 책 한 장 넘기기 힘든 무기력도 그런대로 버틸만했지만, 제일 힘든 것은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다. 건강하지 않고 보니 나의 정체성이기도 한 이 싱글 비혼주의의 쓸모를 심히 고민해봐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멀리서 엄마가 다녀가곤 했으나 대부분 혼자 지냈다. 근처 친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 한 번씩은 벌써 다녀갔다. 여기 내 집안까지 찾아와 수다 떨어줄 친구가 그렇게 절실할 수가 없었다. 나이가 반백 년이 다 돼가면서 어린애같이 무슨 친구 투정이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땐 그랬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만나게 되던 아파트 이웃들에게 지극히 무심했던 것마저 저절로 반성이 되었다. 여하튼 나만 필름이 16배속으로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영화처럼 사는 것 같았다.
 
 나는 허리디스크 수술을?했다.?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두세 달을?누워만 지냈다.?
 나는 허리디스크 수술을 했다. 밖에 잘 나가지 못하고 두세 달을 누워만 지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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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나한테는 없을 우울증이란 걸 처음 느꼈다. 19층 베란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그 날, 그 무서운 느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창 밖에 설치돼 있는 에어컨 실외기를 세어보니 대여섯 개가 훌쩍 넘었다. '저기에 머리통이 먼저 부딪히면 얼마나 아플까' 하면서 문을 부리나케 닫은 기억이 난다. 그 후로 베란다 창은 열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어, 나한테는 아무도 없구나, 내가 여태 뭐 하고 살았나 하며 한없이 침잠해지는 와중에도 내 허리는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복대를 착용하고 아파트 근처 걸음걸이가 가능해졌다. 공기도 좋았지만 사람 구경이 너무 좋았다. "얼마예요?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아파트 상가에서 우유 하나를 사고도 사람 만나서 좋다고 속으로 감격했다. 

외출이 조금 수월해지니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왔다. 한반도 전 국민의 집콕 생활이 시작되었고 사상 초유의 답답함에 멀리 전화선 너머로 친구의 곡소리가 들려왔다. "친구야. 너 겨우 일주일 못 나가는데도 그 정도지? 난 벌써 네 달 전부터 자가격리였어. 내가 얼마나 죽겠었는지 알겠지 않냐?" 답답함 배틀에서 내가 이겨 버렸다.

어느 날, '3호'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떡을 가지고 갔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3호에 이사 왔어요." 
"진짜요? 언제요? 나 노상 집에 있었는데, 암튼 다시 주시면 안 돼요? 저도 떡 주세요~."

 
바깥 운동하기 좋은 봄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새댁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내 대답은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벌써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고 얼른 서로 가야 될 길을 가야 했기 때문이다. 

문이 닫힐 때인가 나는 손까지 덥석 잡고 말았다. 이런 무례할 데가 있나. 진짜 나를 떡 못 먹어 환장한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내심 또 기대도 했다. 요즘엔 눈 씻고 찾아도 힘든 이사떡을 돌리는 사람이라면 분명 좋은 사람일 테니까.
 
이틀 후 아파트 문고리에 작은 가방이 걸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3호예요'로 시작하는 예쁜 메모에 떡을 맛있게 먹는 방법도 써주었다.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보답이 될 만한 게 뭐 있나 집을 둘러보니 마침 저만치 와인 한 병이 자신이 선택될 걸 아는 것처럼 나와 눈이 마주쳤다. 
 
"떡 고마워요. 이거 드세요. 저는 혼자니까 언제든 커피 한 잔 하시러 오세요."
"네, 이삿짐 때문에 집이 엉망이라 들어오시란 말도 못 하네요. 짐 정리 다 끝나면 차 한 잔 해요."


그렇게 짧은 두 번째 만남이었다. 시작이 좋다. 어디서 이사 왔는지? 가족은 어떻게 되는지? 강아지 짖는 소리가 나던데, 어떤 강아지인지? 현관문에 서서 그 질문을 다 해댈 수는 없는 일이고 초면이나 다름없는데 "제가 아파트 친구가 필요해요. 저랑 친구 하실래요?" 할 수는 없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다. 이젠 어쩐다? 어떻게든 천천히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싶었다. 식빵을 샀다.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고 보편적인 먹거리라 부담 없이 딱이다 싶었다. '안녕하세요. 3호님. 식빵이 많이 있어서요. 커피랑 맛나게 드세요.' 일부러 샀다는 티를 안 내도록 쓴 메모도 넣었다. 복도를 지나 3호 문고리에 걸어놓고 왔다.

얼마 후 또 내 문에 작은 가방이 걸렸다. 내가 혼자 산다고 해서인지 밑반찬이 들어있었다. 생선 다음에는 나물무침. 족족 먹어 치우는 음식만큼 내 벽에 붙은 그의 메모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길어졌다. '손글씨 쓰는 감성도 어쩜 이렇게 나랑 비슷하지' 하며 혼자 설레발을 쳐본다.

우린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아파트 친구와 펜팔 내 벽에 붙은 메모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길어졌다.
▲ 아파트 친구와 펜팔 내 벽에 붙은 메모가 줄줄이 비엔나처럼 길어졌다.
ⓒ 황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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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번을 더 오작교 건너듯 아파트 복도를 넘나들며 문고리 펜팔을 했다. 서로 연락처를 아직 모르니 이게 최선이었고 나름 즐거웠다. 복도에 정리 안 된 이삿짐들이 지난번보다는 많이 줄어 보였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수줍은 노크 소리에 문을 여니 과일을 들고 3호님이 배시시 웃으며 서 있었다. 우린 드디어 제대로 만났다. 이삿짐 정리가 오래 걸릴 만한 사연,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로 온 가족이 유례없이 집에 있다 보니 끼니를 해대느라 이래저래 짬이 안 났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3호님이 새댁 같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워낙에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인 걸로 하고, 우린 두 살 차이라 그냥 '친구'를 하기로 했다.
 
친구는 처음에 엘리베이터에서 내가 손 잡은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린 친해지는 데 하루면 되었다. 친구의 강아지와 나의 고양이도 상견례를 마쳤다. 그는 몸이 아플 때는 영양제를 사주었고, 반찬은 여전히 맛있었다. 나는 부엌 살림을 잘 안 하니 농산물이 생기면 살림하는 친구에게 줄 수 있어서 좋다.
 
벌써 내가 첫 떡 가방을 받은 지도 일 년이 되어간다. 요 며칠 설 명절 기름 음식을 장만하느라 내내 느끼했을 친구를 생각하니 얼큰한 게 떠올랐다. "짬뽕 먹자"는 한마디에 친구는 한걸음에 건너왔다. 유안진의 글처럼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는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또한 그 사이 내 허리가 회복되는 걸 다 지켜봐 준 친구다.
 
펜팔도 흥미로운 경험이었고 옆 동에 엄마 산다는 친구가 이젠 부럽지 않다. 내가 꿈꾸던 지란지교를 이룬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현대인들은 사생활 때문에라도 일부러 옆집 누가 사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이 관계가 정답게 유지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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