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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선물 받았다. 그것도 1800ml 큰 병이다. 슬프게도 나는 애주가가 아니다. 더욱이 혼자 살아서 같이 먹을 식구도 없다. 대체 이걸 어찌 처리하면 좋을까. 가만히 앉아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막걸리 병을 바라보았다.

막걸리는 희한하다. 즐겨 마시지 않는 사람한테도 추억이 있는 옛 친구처럼 군다. 비가 오면 절로 파전과 함께 생각이 나고, 구수한 냄새를 맡다 보면 귀경길 고속도로의 술빵이 생각난다. 술빵? 그래! 이걸로 술빵을 만들어야겠다. 갑자기 눈이 번뜩인 나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찜기에 넣을 면보를 사 왔다. 자취생은 말리는 이가 없기에 오늘도 엉뚱한 시도를 해본다.

추억처럼 뭉게뭉게 부풀어 오른, 노오란 술빵 
 
 술빵
 술빵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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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피자보다 술빵을 좋아했다. 동그란 빵이라는 점은 똑같은데, 술빵은 피자보다 넉넉하고 푸근한 이미지가 있다. 베개로 베고 한숨 자도 될 정도로 폭신하고 커다란 술빵을 큰 칼로 두툼하게 잘라 한입 넣으면, 밥이 따로 필요 없다. 갈수록 길거리에서 보기가 힘들어져 그대로 추억 속에 묻히나 했는데, 집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니.

방법은 간단했다. 생막걸리를 밀가루, 설탕과 함께 반죽한 뒤 따스한 곳에서 발효하고, 쪄내면 끝이다. 술빵 레시피의 유일한 단점은 3~4시간 동안 발효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었다. 엉성하게 주무른 반죽이 담긴 그릇을 전기장판 위에 올려놓고 이불을 덮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길 기다리듯,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두 팔을 턱에 괴고 반죽을 감싼 이불을 두근거린 채 바라보았다.

3시간가량 지나고 나니, 신기하게도 반죽이 부풀어 올라 있다. 자고 일어난 내 얼굴 붓듯이 반죽도 한숨 자고 일어난 것일까. 면보에 조심조심 반죽을 붓고, 할머니가 보내주신 찜기에 넣어 30분을 쪄냈더니, 거짓말처럼 우리가 아는 그 술빵이 탄생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뿌연 김과 함께 등장하는 그 노릇한 모습이 반갑다.

다음날 부모님과 함께 빵을 나눠 먹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술빵 하나면 부러울 것이 없었다며 추억에 잠겨 마구마구 드신다. 술빵은 다른 빵과 달라서 목이 막히지도 않는다. 알코올에 약한 아버지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런, 술을 너무 많이 넣었나 보다. 어릴 적 먹을 것이 없어 술지게미를 퍼먹다 해롱거리던 아이들을 눈에 그리며 아빠는 추억에 잠긴다.

한 입만, 하다가 한 통 다 비우게 되는 막걸리 소르베 
 
 막걸리 귤 소르베
 막걸리 귤 소르베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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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빵을 만들고 나니 막걸리가 반 정도 남았다. 무엇을 할까 인터넷을 검색하다 '막걸리 소르베'(Sorbet)라는 것을 찾았다. 가수 손호영의 한식 코스 요리 최종 우승 레시피라는데, 한국의 전통주와 서양 디저트의 만남이라니. 잘 어울릴까 의문이 들었다. 궁금할 땐 역시 만들어 봐야지.

원 레시피는 냉동 딸기를 넣은 딸기 셔벗이었으나 생일 때 받은 제주도 귤 반 박스가 아직 남아 있어 귤 셔벗을 만들기로 했다. 막걸리를 삼 분의 일 정도 붓고, 귤을 한 열 개, 그리고 꿀을 듬뿍 넣어 믹서기에 윙윙 갈았더니 영롱한 주홍빛 음료가 탄생했다. 와! 한 입 마셨더니 소화제를 먹은 듯 속이 뻥 뚫린다.

다 마시면 디저트로 얼릴 것이 없으니 참기로 하고 냉동실에 6시간 동안 얼린다. 한숨 자고 일어나 출근 전에 부랴부랴 디저트를 꺼내 숟가락으로 박박 섞었다. 알코올 때문인지, 꿀 때문인지 꽝꽝 얼지 않고 셔벗처럼 살얼음이 꼈다. 정말 맛이 있을까.

잘 섞은 막걸리 귤 소르베를 한 입 떠서 입에 넣었다. 우와! 알코올 맛은 귤과 꿀 사이에 쏙 숨어 버리고, 단맛만 혀에 맴돈다. 막걸리의 구수함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막걸리와 셔벗이라니, 동양과 서양의 오묘한 융합이다. 긴가민가한 얼굴로 한 입 떠먹은 어머니도 한 통을 다 비웠다.

한 입만, 한 입만 더 하다가 어느새 텅텅 비어 버린 통이 어릴 적 원기소를 생각나게 한다고 했다. 이미 충분히 먹었는데, 그 맛을 또 보고파서 할머니에게 칭얼거렸다던 엄마의 추억이 떠오른다.
 
 막걸리
 막걸리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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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막걸리를 좋아하기로 했다. 청주처럼 맑지도 않고, 와인처럼 은은하지도 않고, 다음날 머리가 깨질까 숙취를 걱정해야 했던 막걸리가 좋아졌다. 막 걸러내서 막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이것저것 따지며 거르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한 그 모습이 좋다. 다른 술들은 음료를 만들거나, 요리 잡내를 없애는 등의 역할에 그치지만, 막걸리는 그 자체로 먹는 요리가 되는 점도 재밌다.

술지게미, 술빵 등에는 근대사회의 우리 모습과 추억이 서려 있다. 때 탄 그 모습 그대로 즐겨 먹는 막걸리의 모습이 우리와 닮았다. 만약 집에서 놀고 있는 막걸리가 있다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켜 보자. 어느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막걸리 생각만 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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