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최운산은 김성녀와 사이에 열한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중 딸 넷과 아들 셋은 건강하게 자랐다. 남편이 무장전쟁으로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빌 때 가정을 지키고 전비를 조달하는 역할은 온전히 부인 김성녀의 몫이었다. 봉오동전투에서는 직접 전장에 나서 주요 역할을 해내기도 하였다. 

남자들이 독립전선에 나서 싸울 때에 그 가정은 극심한 어려움에 빠진다. '불령선인'의 낙인이 찍히거나 생활고에 시달린다. 남성들이 독립운동에 나서고자 해도 가정 때문에 망설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뒷바라지 해온 남성들의 어머니ㆍ아내ㆍ딸들의 역할은 대부분 잊혀진다.

김성녀는 남편 최운산의 동지ㆍ전우ㆍ아내ㆍ7남매의 어머니 역할을 모두 해낸 당찬 여걸이었다. 

최운산 장군과 혼인한 순간 김성녀 여사의 삶은 이미 한 명의 여성독립운동가로 거듭나는 길에 들어섰다.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먼저 내어주는 남편의 선택에 단 한 번도 불만을 가지거나 훼방을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이 가능하도록 평생 당신의 몫을 충실히 살아내셨기 때문이다.

김성녀 여사는 청년 최명길이 독립투사 최운산으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셨다. 그래서 부대원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부터 봉오동 전투 실제 상황까지, 독립군들이 머무를 공간이 부족해 1915년 연병장을 만들고 막사를 지었던 모든 역사를 다 설명해주실 수 있었다. (주석 8)


김성녀는 남편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때 홀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키웠다. 네 명을 일찍 잃었지만 7남매를 올곧게 키웠다. 여기서는 장남 최봉우에 관해 살펴본다. 아버지를 닮아 수려한 용모에 담대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 몰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연병장과 본부가 있던 상촌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봉오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소년은 작은 섬나라가 거대한 중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일본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최운산)가 일본 유학을 허락하지 않자 용돈을 모아 10대 초반에 사촌(최진동의 아들)과 함께 무작정 봉오동을 떠났고, 도쿄에 도착해서야 집으로 소식을 알렸다. 아무리 봉오동대첩의 영웅이라도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어머니는 생활비를 보내고 최봉우는 도쿄에서 중고등학교에 이어 대학에 진학하였다.

하지만 무인의 피는 속일 수 없었던지, 최봉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3학년을 마친 뒤 더 이상 징집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졸업을 포기하고 자퇴하였다. 독립군 장군의 아들로서 일본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뼈저린 각심이었다. 그리고 고향인 봉오동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일본 명문대 출신의 귀향이지만 고향 봉오동은 안전한 공간이 못 되었다. 일제의 점령지역이기 때문이다. 일제 헌병대는 그를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였다. 그리고 평양으로 끌어갔다. 선대 못지않은 최봉우의 기구한 삶은 뒤에서 살펴본다.

여자 독립군 김성녀의 얘기를 더 해보자.

일생 남편을 사랑하고 존중했던 김성녀 여사는 최운산 장군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다. 간도 제일의 거부였던 최운산 장군이 봉오동 청산리 전투뿐 아니라 연해주와 북만을 넘나들며 독립군들을 모아 훈련하고 무장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가진 재산을 모두 소모시키는 것을 보면서 아무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최운산 장군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일을 형님인 최진동 장군의 이름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가끔 불만을 표하셨다. 군자금을 보내고 성금을 내어놓는 일 뿐 아니라 군대 운영의 모든 일에 사령관인 형님을 앞세우고 자신은 마치 그림자처럼 뒤에 서 계셨던 것이다.

김성녀 여사가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최운산 장군은 허허 웃으시며 "내 일이 곧 형님의 일이요. 나는 아무래도 괜찮소" 하고 답하셨다고 한다. (주석 9)


주석
8> 앞의 책, 99쪽.
9> 앞의 책, 100~10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