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고 듣는 것도 좋아한다. 수업이 지루해질 때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서른 명, 한 학급 아이들 모두의 눈이 나를 향하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을 때의 짜릿함을 느끼며 조선시대 전기수의 심정이 되었다. 그가 지배했던 뒷골목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어도 칼같이 이야기를 잘랐다. 다음 시간을 기다리라는 예고와 함께.

수업시간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교실 밖까지 따라 나와 다음의 상황을 묻기까지 하면, 수업시간을 조금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는 뿌듯함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더욱 이야기의 힘을 믿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야기도 역시 수업의 내용이었지만, 아이들은 이야기를 위해 수업에 더 집중했다. 이후 교과의 모든 내용을 이야기로 만들어 전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소재가 고갈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수집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야기를 모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소설 읽기라고 생각했다. 특히 시대적 배경을 탄탄히 갖고 있는 소설은 더할 나위 없었다. 살을 붙이기도 좋았고 각색 하기도 용이했다. 내게 이야기는 교육방법이었고 교육철학이었고 교과 내용이었다.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한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서부 개척시대, 거칠고 폭력이 난무하지만 영화는 전반적으로 잔잔하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5년 뒤인 1870년. 제3 텍사스 보병대 대위 출신 제퍼슨 카일 키드(톰 행크스)는 텍사스 마을 곳곳을 돌며 사람들에게 온 세상의 멋진 이야기를 전하며 떠돌아다닌다.

그는 텍사스 북부 위치토폴스를 지나다 백인의 공격으로 죽은 인디언을 발견하고, 그가 데리고 있던 어린 소녀 조해나 리안 버거(헬레나 챙겔)를 만난다. 조해나는 6년 전 인디언에 의해 힐 컨트리에서 납치됐고, 다시 5년 후 그녀를 돌보던 인디언을 살해하는 현장에서 살아남은 소녀다. 그녀는 카이오와 언어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화면 가득 홀로 남겨진 소녀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기억엔 없는 듯하지만, 부모를 잃은 어린 시절의 상실에 이은 두 번째 상실과 공포. 충격으로 입을 굳게 닫고 세상을 향해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는 어린 소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 수 없다.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소녀의 두려움이 그대로 전해진다. 자신을 '돌아가는 물'과 '세 개의 점'의 딸, 인디언의 아이라고 착각하는 그녀에게 키드가 부르는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

키드는 조해나를 레드리버의 연방 사령부로 데려가지만 인디언 담당관은 3개월 뒤에나 온다는 말을 들을 뿐, 누구도 어린 소녀에게 관심이 없다. 인근에 사는 부부에게 그녀를 의탁하려 하지만 부부는 짐을 떠맡았다는 내색을 피하지 않는다. 잠시 머물던 그 집에서 무작정 탈출을 감행한 조해나, 부부는 그런 상황을 난감해한다. 하는 수 없이 키드는 직접 카스트로빌의 친척집에 데려다 주기로 하고 먼 여정을 떠난다.  

'사나워 보이는 아이', '저주에 걸린 아이'는 사람들이 그녀를 보는 시선이다. 더러운 옷을 갈아입는 것도 거부하고 소리 지르며 도망친다. 낡고 더러운 인디언의 옷을 기어코 몸에 걸치려는 아이다. 그러나 키드는 그 아이에게 네가 무엇을 입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외적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이나 고아가 된 아이의 내면을 키드는 이해하는 것 같다.

상처 입은 소녀를 떠맡은 키드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는 왜 어린 소녀를 외면하지 않았을까. 해야 할 일도 있고 세상은 혼란하다. 어찌 보면 조해나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집을 떠나 먼 곳에서 하루하루를 떠도는 그에게 어린 소녀의 상실이, 기댈 곳 없는 외로움이 자신과 닮아서 눈에 들어왔던 것은 아닐까.

조해나를 데리고 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650km에 되는 기나긴 여정. 그 길에서 둘은 그녀를 납치해 팔아먹으려는 무법자들과 총격전 끝에 그들을 물리치기도 하고, 버펄로를 몰살시켜 가죽을 벗겨 파는 악덕 사업가의 위협에서 빠져나오기도 하며, 숨쉬기조차 힘든 모래 폭풍에서 간신히 빠져나오기도 한다.

드디어 도착, 친척에게 그녀를 맡기고 집에 돌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집은 이미 집이 아니다. 부인의 부재를 확인하며 지켜야 할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뀐 것 같다. 결심한 듯 두고 온 조해나를 찾아 간 그는 그녀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의 선택에 맡기며 손을 내민다. 우연히 만난 고아 소녀와 거친 여행길에서 겪은 시간들을 통해 그의 마음은 바뀐 듯하다.         

전쟁의 폐허와 약탈과 힘의 논리만이 지배하는 땅, 안정이라곤 느낄 수 없지만 키드와 조해나는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간다. 모든 곳이 혼돈이고 온통 삐걱대는 땅이지만 인간적 교류는 존재하고 삶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식을 전하는 키드와 10센트의 희망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을 보며, 뉴스와 이야기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탄광촌 인부들의 저항 이야기에 열광한다. 민중들의 불의에 대한 저항, 고난한 삶의 극복과정에 사람들은 감동받고 변화된다. 이야기의 힘은 악덕 사업가에게 죽을 위기에서 그들을 구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 극복 이야기는 새로운 삶의 의지와 희망을 부른다. 세상의 소식을 전하는 남북전쟁 참전 용사의 멋진 변화의 소식은 시대를 읽게 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혁명과도 같다. 조선시대 뒷골목 상권의 주역이었던 전기수처럼 키드는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을 빛으로 이끄는 주역이다.

영화는 꿈과 희망, 사랑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인간은 꿈과 사랑에 늘 목말라하고 꿈과 사랑을 담은 이야기를 쫓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폴래트 질스(Jiles, Paulette)의 동명의 소설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주목한 것도 그러한 지점은 아닐까. 본 시리즈로 유명한 감독이지만 화려한 액션이나 추적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광활한 들, 푸른 하늘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은 혹독한 시대와 상관없이 평화롭다. 그런 풍경에서 서로의 상처를 감싸는 두 사람의 모습이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키드가 선별해서 읽어주는 이야기다. 미디어의 홍수인 세상,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세상인 지금 시대에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명의 위협에도 악덕 사업가가 만들어 내는 가짜 뉴스를 과감히 제외하고 진실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있고, 그 이야기가 사람들을 희망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영화는 참된 언론, 진실된 보도, 이야기의 힘을 말하는 것 같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어느 것이 더 깊고 짙은 상실인지 대결하는 것 같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변은 조해나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희망과 용기를 얻는 이야기의 힘을 오늘 이 시대에도 느끼고 싶다. 
뉴스 오브 더 월드 톰 행크스 폴 그린그래스 이야기의 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